<85화>
카리나와 렝케가 재회한 날로부터 정확히 한 달 전.
어둑한 지하실.
렝케 브리튼의 실험실에선 격노한 고함이 울려 퍼졌다.
“왜 이렇게 간단한 마법 하나 제대로 못 하는 거냐!”
롤랜드를 대신해 대마법사가 되어 줄 아이, 올리버 라크포드는 분명 열 살짜리 아이치고는 충분히 잘 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롤랜드가 기준인 렝케의 눈에는 재능도 노력도 영 성에 차지 않았다.
재능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노력만큼은 뼈가 부러질 정도로 해야 할 것 아닌가.
실망스럽게도 올리버는 힘겨운 훈련을 이리저리 빠져나갈 궁리만 할 뿐이었다.
‘역시, 그 계집애 같은 존재가 필요해.’
하지만 올리버는 그간 렝케가 고아원에서 데려온 거의 모든 아이들처럼 가족이 없는 천애 고아였다.
‘열 살쯤 되니 머리가 커서, 하녀에게 정을 붙이지도 않아.’
가장 효과적인 형제자매는커녕 카리나처럼 써먹을 하녀조차 없으니, 올리버의 성취가 지지부진한 것도 당연했다.
렝케가 올리버를 내쫓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돈.
아이 하나를 데려오고, 키우고 교육하는 덴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다.
더군다나 거의 성공 직전까지 갔던 롤랜드를 잃었기에, 눈이 높아진 그는 기대치에 맞는 아이를 찾기 위해 더욱더 많은 재산을 써야 했다.
오랜 세월 축적된 가문의 재산이 드디어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이놈까지 내쫓을 순 없어.’
그나마 올리버는 여태까지 데려온 쓰레기들 중에선 롤랜드 다음 정도는 되었다.
롤랜드와 수준 차이가 무지막지하게 난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약해빠진 놈이라 마력 유도제를 투입할 수도 없고……. 난감하군.’
그때, 실험실로 한 하녀가 황급히 뛰어들어왔다.
“주인님, 에보슨 씨가 도착하셨습니다.”
렝케는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었다.
에보슨은 그의 유일한 수입원이라고 할 수 있는 거래처였는데, 최근 들어 그를 대놓고 무시하곤 했다.
‘천한 농노의 자식 주제에.’
본디 에보슨의 부모는 귀족의 반노예라고 할 수 있는 농노였다.
하지만 에보슨은 타고난 재능과 근성으로 돈을 모아 부모와 자신의 신분을 격상시켰다.
‘그래도 한 번 농노는 평생 농노지.’
아무리 에보슨이 지금 돈이 많다 한들 그 더러운 피가 어디 가지는 않을 것이다.
롤랜드와 멜리사 남매가 그러했듯 말이다.
그는 서둘러 에보슨이 기다리는 응접실로 발을 옮겼다.
“잘 지냈나?”
렝케는 에보슨의 친근한 인사에 대꾸하지 않았다.
에보슨은 렝케의 재산을 완전히 틀어쥐는 갑이 되었을 때부터 렝케의 둘도 없는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역겨워.’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평민일 뿐이다.
자신 같은 진짜 귀족에서 말을 함부로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지만, 당장 돈이 급한 렝케는 참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지?”
“그건 내가 물어야 할 것 같은데, 렝케.”
에보슨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다 뭐지?”
그는 렝케에게 몇 장의 종이를 내던졌다.
렝케는 빼곡히 적힌 글씨를 빠르게 훑었다.
‘…….’
간단히 말해, 그가 거의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몇 장의 서류였다.
남은 건 이 저택과 영지뿐.
대대로 내려온 저택을 판다는 건, 귀족 작위를 판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평생의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년만 아니었어도……!’
렝케는 이를 으득 갈았다.
만약 카리나가 롤랜드와 멜리사를 데리고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롤랜드에게 마력 유도제를 투여하는 실험이 성공했더라면…….
지금쯤 그는 돈과 명예를 걸머쥐었을 것이다.
하지만 롤랜드는 코앞에서 사라져버렸다.
“에보슨, 알잖나. 지금은 애가 어려서 안 되지만, 커서 대마법사만 된다면….”
“짧아도 10년을 대체 어떻게 기다리라는 말인가?”
에보슨은 콧방귀를 뀌었다.
“걱정 말게. 협박하러 온 게 아니니까. 단지, 더 이상의 돈은 대줄 수 없어. 이 집안에서 내가 뜯어 갈 것도 더는 없고.”
“…….”
렝케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만약 여기서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면, 대마법사 하나를 키워내기 위해 바친 자신의 인생은 대체 뭐가 된다는 말인가.
“뭔가…… 방법이 없겠나?”
평민에게 매달리는 건 굴욕적이었지만 렝케는 훗날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잠깐의 굴욕은 얼마든지 참아넘길 수 있었다.
“……없진 않을 것 같은데.”
“뭐지?”
에보슨은 망설임 없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토르스 공작가.”
“토르스?”
렝케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촌구석?”
토르스는 남부 최하단의 영지였다.
렝케는 그곳을 지도에서나 보았을 정도였다.
“요새 인재들을 끌어모으고, 아낌없이 지원해 준다는 소문이 파다해.”
“인재라…….”
렝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 멍청이가, 과연 공작이 원하는 수준의 인재일지는 모르겠군.”
“어린애 말고.”
“그럼?”
“렝케 자네 말일세.”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렝케는 생각에 잠겼다.
에보슨은 후레자식이었지만 머리는 잘 돌아갔다.
공작가의 후원이라면 당장 재정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자신이 원하는 실험과 양육을 충분히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생각해 보지.”
그로부터 단 사흘 후.
렝케는 올리버와 함께 남쪽으로 가는 기나긴 여행을 떠났다.
‘빌어먹을’
돈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가장 싼 짐마차를 타야만 했다.
마침내 토르스에 도착했을 때, 렝케는 열 살은 더 늙은 느낌이었다.
‘상관없어. 지원만 받을 수 있다면…!’
렝케는 자신의 실력이 제국 마법사들 중 상위권 속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선 능력을 보여서 신뢰를 받은 다음, 올리버나 아니면 다른 쓸 만한 아이에 대한 지원을 받는 게 그의 목표였다.
그리고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 않는 목표이기도 했고.
‘남부에 또 재능 있는 어린애가 있을지도 모르지.’
남부의 고아원을 뒤져볼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일단은 공작가의 가신이 되는 게 급선무였다.
‘마법사라….’
다짜고짜 공작을 찾아가서, 그의 가신이 되겠다고 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다.
공작이 신뢰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다리를 놓아 달라고 부탁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렝케는 공작가의 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체스 버케인.
평민이라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도리어 귀족인 자신이 비교우위에 서게 되니 나쁘지 않았다.
더군다나 소탈하여 누구든지 쉽게 만나 준다고 했다.
그는 올리버는 싸구려 여관에 반쯤 감금해 놓은 채, 체스 버케인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북부에서 왔다고요?”
체스 버케인은 매우 젊은 마법사였다. 렝케는 그에게서 꿈틀거리는 재능을 느낄 수 있었다.
‘아깝군.’
만약 체스가 열 살이었다면 납치하여 대마법사로 키웠을 것이다.
하지만 체스 버케인은 공작의 가신이었고, 지금 렝케는 그에게 부탁을 해야 할 처지였다.
“예. 실력에는 자신 있습니다.”
“북부 마법사들의 실력은 유명하니까, 굳이 설명 안 해도 돼요. 토르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체스는 점잖게 말하려고 했지만 신이 난 기색이 역력했다.
좋은 신호였다.
“아마, 거의 바로 받아주실 걸요. 안 그래도 그 많은 일들을 제가 다 하느라…… 어휴.”
“가신이 꽤 많지 않습니까?”
“다 임시라서요. 각하께서 신뢰하시는 사람은 몇 없죠. 저, 치체스터 경, 에두아르 씨, 블로에 부인…….”
“블로에?”
렝케는 눈살을 찌푸렸다.
블로에는 죽은 여동생이 결혼하면서 얻은 성이었다.
롤랜드와 멜리사 남매에게 자신이 외삼촌이라고 속이고 데려올 때 붙여 준 성이기도 했다.
‘설마…….’
체스가 쾌활하게 얘기했다.
“아, 블로에 부인에 대해 들어보셨군요? 워낙 유명하긴 하죠.”
“이름이…….”
“카리나 블로에. 아, 아네! 딱 안다는 표정이다.”
음산한 웃음이 렝케의 입에 걸렸다.
“잘 알죠. 매우.”
* * *
바로 그 다음 날.
렝케는 카리나 블로에를 찾아갔다.
겨우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카리나는 그가 아는 음울한 하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
카리나는 경악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렝케는 그 시선을 즐겼다.
“오랜만이구나.”
“돌아가세요.”
카리나는 최대한 냉정하게 말하려 애쓰는 듯했지만,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를 제어하지 못했다.
“네 성과에 대해 잘 들었다. 공작의 신뢰를 받고 있다더군. 아주 훌륭해.”
렝케는 차디찬 목소리로 비수를 던졌다.
친딸의 심장을 꿰뚫고도 남을.
“하지만 네가 천한 사생아인 것도 모자라 주인을 배신한 개라는 사실이 알려져도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