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카리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네……?”
“모르셨군요.”
릴리스가 미소지었다.
“블로에 부인. 부인이 재활 시설을 만든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만든 건 아니에요.”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의견을 제시했을 뿐이죠.”
“의견이 가장 중요합니다.”
릴리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의견이 없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으니까요.”
“의견뿐만이 아니지.”
클로드가 끼어들었다.
“부인은 모든 계획을 짜고, 인재를 영입하고, 시설의 첫 시공부터 개장까지 총괄했다.”
“저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겸손한 분이시군요.”
“…….”
카리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조금 전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여 끼어들지 못했다면, 지금은 달랐다.
이들은 그녀가 한 일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클로드야 항상 그랬지만, 포드 상단주까지.
릴리스가 카리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돈으로 사람을 묶는 건 쉽습니다. 하지만 쉬운 만큼 금방 떠나죠. 다른 곳에서 더 큰 돈을 제시하면 곧바로 등을 돌려 버릴 테니까요.”
카리나는 민망해져 릴리스의 시선을 피했다.
어차피 누구나 아는 원론적인 사실인데, 마치 대단한 발견인 것처럼 얘기하는 릴리스가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복지는 다릅니다.”
“복지요?”
잘 쓰지 않는 단어였으나, 어딘가 익숙했다.
“예.”
릴리스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만한 재활 시설을 갖추어 놓은 제국 어딜 가도 없을 겁니다. 현재 토르스 기사들의 수준이 그걸 증명하지 않습니까.”
전부 사실이긴 했지만, 대놓고 칭찬을 들으니 귀가 간지러웠다.
릴리스는 카리나의 쑥스러워하는 반응은 안중에도 없는 듯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강력한 기사단의 존재는, 저희처럼 보호가 필요한 이들에게 또 복지가 됩니다. 절대 돈으론 살 수 없는 것들이지요.”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동안 놓치고 있던 것들이었지. 다른 영지처럼 돈과 지위를 주려고 했을 뿐, 그들이 진정으로 무얼 원하는지에 대해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릴리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서 부인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어떤 사람인지 꼭 알고 싶었거든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 카리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카리나는 얼떨결에 그녀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그리고 앞으로 더 알아갈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릴리스의 노련한 눈을 마주하며 카리나는 직감했다.
토르스 공작가가 거대한 우군을 얻었다는 사실을.
포드 상단은 시작에 불과했다.
토르스 공작가가 인재를 대우하며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 제국에서 인재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후계자 자리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유명한 상단에서 내쫓긴 회계사.
암호학 연구비용만 지원해 주면 그 어떤 암호라도 풀어 주겠다는 중년의 암호학자.
아스트리드에 따르면, 제국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실력의 음유시인.
왕실의 기밀을 알았다는 이유로 혀가 잘리고 죽을 뻔한 위기에서 겨우 도망친 베가 왕국 출신 정보상.
그 어떤 자물쇠도 풀 수 있고, 자신 이외엔 아무도 풀지 못하는 자물쇠를 만들 수 있는 대장장이.
공작가의 세력이 점점 커져 갈수록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늘어난 가신들은 수많은 계획을 세우고, 이행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말에 따라 줄 실무자가 부족했던 것이다.
클로드는 급한 대로 회의를 소집했다. 하지만 그의 가신들은 행정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회의는 이내 미궁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카리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실무자는 대대적인 공개 모집으로 뽑는 게 어떨까요?”
카리나는 전생에 살던 세계에서 국가의 녹을 먹는 이들을 모집하던 방법을 떠올렸다.
‘시험이었지.’
전생처럼 복잡한 시험을 치를 필요는 없다.
학구적인 능력은 읽고 쓰는 것 정도만 할 줄 알면 된다.
가장 중요한 실무에 적합한 사람은 각 가신들이 필요한 사람을 면접으로 골라내어야 할 것이다.
“각 분야마다 그 신분에 상관없이 가장 어울리는 사람을 뽑는 공개 모집을 한다면, 인력난이 많이 해소될 거라고 봐요.”
“공개 모집이라…… 좋은 생각이군요.”
릴리스가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지금도 사람들이 암암리에 토르스로 찾아오긴 하지만, 대대적으로 공개 모집을 한다고 알리는 게 훨씬 획기적입니다.”
“저도 블로에 부인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클로드가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거대한 사업이 되겠군.”
“네. 차근차근 준비해야 혼란이 없으리라고 봐요.”
“알겠다. 나 역시 찬성한다.”
클로드가 찬성하면 완전히 결정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회의가 끝날 무렵엔 다른 사람들도 모두 찬성했기에 카리나의 의견은 곧바로 받아들여졌다.
공개 모집 제도를 준비할 사람은 자연히 카리나가 되었다.
카리나는 언제 휴식을 취할 기회가 있었냐는 듯 바빠졌다.
하지만 카리나는 개의치 않았다.
공개 모집 제도가 정착하면, 자신은 정말로 할 일이 없어질 테니까.
여유야 그때 가서 부리면 된다.
카리나의 신경을 건드린 사건이 일어난 건, 공개 모집 제도를 정신없이 준비하던 가장 바쁜 때였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카리나는 기가 막혀 수도에서 온 사내를 빤히 쳐다보았다.
수도에서 가장 기세등등한 가문 중 하나인 폰더 공작가의 가신은, 거만한 어조로 조금 전 자신의 말을 되풀이했다.
“폰더 공작가로 들어올 기회를 주겠다, 카리나 블로에.”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저는 토르스 공작가의 가신입니다.”
“그걸 모르고 하는 소리 같나?”
그는 대놓고 카리나를 비웃었다.
“이런 촌구석에서 재능을 썩힐 게 아니라, 황제 폐하 다음가는 가문으로 들어오라는 말이다.”
“…….”
카리나는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는 카리나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음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생각해 보아라. 너 같은 평민에게 이런 기회가 두 번 주어질 리가 없으니까. 돈은 여기서 주는 것의 다섯 배를 주지.”
“……무례하다.”
낯설고 오만한 말투가 입에서 생경하게 느껴졌다.
사내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카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의자에 딱 붙어 앉은 채 고개를 올려 폰더 공작가의 가신으 쏘아보았다.
“무례하다고 했다.”
“이 천한 여자가……!”
“어디 그 천한 말을 입에 담는 본인은, 천한 게 아닌가?”
카리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두르지도, 흥분하지도 않고 여유 있게.
“나 또한 공작 각하의 가신이다. 아무리 네가 수도에서 왔다 한들, 여긴 토르스야. 그리고…….”
카리나는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토르스에 왔으면 토르스의 법을 따라야지.”
“하! 제국 어딜 가나 법은 똑같다. 너 같은 비천하고 어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여자는…….”
카리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 말을 그대로 공작 각하께 들려드리면 어떻게 될까? 나를 빼내려 했다는 사실까지, 전부.”
“…….”
사내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애초에 카리나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리라는 생각을 못한 탓이었다.
귀족인 가신이 평민인 가신을 모욕한 건 세간의 얘깃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하지만 한 가문이, 다른 가문의 핵심 가신을 빼내려 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만약 정식으로 클로드가 이의를 제의한다면 큰 문제로 번질 수도 있는 안건이었다.
관련된 분쟁으로 인해 대법정에 회부되는 가문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간 클로드 데비아탄은 자신의 가신들을 너무나 손쉽게 놓아주었고, 그의 옛 가신들 역시 유혹에 쉽게 쉽게 넘어갔기 때문에 폰더 공작가는 카리나 역시 얕보았던 것이다.
“……블로에 부인.”
카리나는 팔을 쭉 뻗어 문을 가리켰다.
“나가는 길은 저쪽입니다.”
“사, 사과하겠다!”
사내는 카리나를 향해 연신 사과의 말을 쏟아냈다.
생각이 짧았다,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지 않으냐, 이런 일로 제국의 가장 큰 가문들이 다투면 세간 사람들이 보기에 좋지 않다…….
카리나는 그에게 들려줄 대답은 단 한 마디뿐이었다.
“나가세요.”
사내는 여기 머물러 카리나의 심기를 거스르는 게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 듯, 서둘러 밖으로 사라졌다.
카리나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를 좀 식혀야겠어.’
결론적으로, 그녀는 클로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걸로 정식 이의를 제기하는 게 더 손해야.’
클로드는 설령 그녀가 조른다 한들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영지를 위한 일이니까.
하지만 카리나는 알았다.
클로드는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리라는 걸.
그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폰더 공작가의 가신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용인이 미안한 얼굴로 들어왔다.
“부인, 볼턴 경께서 부인을 뵙자고 하십니다.”
“볼턴 경?”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카리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 듣는 이름이 아니었던가.
‘오늘은 피곤하긴 한데…… 됐어, 다음에 만나는 게 더 피곤해.’
그녀는 사용인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뭐 하는 사람이죠?”
“마법사라고 합니다.”
“……!”
아무리 토르스에 인재가 많아졌다곤 하나 마법사는 체스 한 명뿐이었다.
“어서 들어오라고 하세요.”
카리나는 두근거리며 볼턴 경을 기다렸다.
잠시 후.
딸깍.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그리고 학대의 흔적을 완전히 숨길 순 없는 열 살 남짓한 소년도.
카리나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었다.
“오랜만이구나.”
지옥에서 그녀를 잡으러 온 악귀의 인사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