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토르스의 기사단이 전 제국에 명성을 떨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강력한 소드마스터의 존재.
구성원들 모두가 한물갔다는 세간의 눈초리를 받다가 토르스의 재활 시설 덕에 재기했다는 공통점.
강력한 구심점이 두 가지나 있는 데다 개개인의 자질이 출중하니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토르스 자체의 명성 역시 드높아졌다.
하지만 카리나는 그 사실들을 제대로 체감하지 못했다.
이제 토르스가 안정되었으니, 그녀의 관심사 역시 자신과 아이들에게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엄마, 이것 좀 봐 주세요.”
롤랜드가 반은 긴장하고, 반은 흥분한 듯한 얼굴로 종이를 펼쳐서 보여 주었다.
마법식이었다.
‘……!’
카리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마법식을 살폈다.
“마법식이구나?”
“네. 제가 만들었어요.”
“무슨 마법식인데?”
롤랜드는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 하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까치발을 들고는 카리나의 귓가에 닿기 위해 동동거렸다.
카리나는 웃으며 롤랜드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기울여주었다.
롤랜드가 엄청난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카리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엄마를 보호해 줄 마법이에요.”
“정말?”
“네.”
롤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정석에다 걸 수도 있어요. 엄마가 만든 마정석으로 하니까, 더 잘 되더라고요.”
“…….”
카리나는 잠시 목이 메어 롤랜드를 바라보았다.
롤랜드는 이제 겨우 여덟 살이었다. 부모가 지켜야 할 나이.
하지만 롤랜드는 도리어, 카리나를 위한 방어 마법을 만들었다며 기뻐하며 달려왔다.
카리나는 롤랜드가 왜 남들의 시선을 피하면서 알렸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도 불안한 거야. 롤랜드는.’
그들이 토르스에 온 지 넉 달이 지났다.
공작저 역시 이제는 집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이들도 생겼다.
하지만 카리나는 알았다.
아이들은 아직도 렝케 경에 대한 악몽을 꾸고 있고, 이 방어 마법은 아이들 나름의 대비책이라는 걸.
“고마워.”
“위험할 때, 꼭 써요.”
“롤랜드가 있어서 든든한걸?”
롤랜드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멜리사는?”
“멜리사는 마정석에 마법을 거는 건 못 하는데, 다른 방어 마법은 잘해요. 마정석이 없어도 괜찮아요.”
“둘 모두 정말 대단하네. 여태까지 열심히 배웠구나.”
한때, 자신은 아이들이 자유자재로 마법을 쓸 수 있으며 언젠가는 훌륭한 마법사가 되리라는 사실을 부러워했다.
카리나는 인정했다.
자신은 어쩌면, 아이들의 재능을 조금은 질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카리나는 자신만의 능력과 재능을 찾았다.
아이들의 재능을 순수하게 감탄하며 응원해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버케인 씨가 찾아오셨습니다.”
“체스가?”
카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기사단이 자리를 잡자 체스도 이전처럼 눈코입 뜰 새 없이 바쁘던 때에 비해서 숨 돌릴 여유가 있었다.
잠시 후.
체스가 별채에 들어섰다.
그는 검고 부티나는 긴 로브를 두르고 있었는데, 늦여름엔 조금 어울리지 않았지만 제법 위풍당당했다.
“무슨 일이야?”
체스는 단 몇 개월 만에 이전의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천방지축에서 노련한 마법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 쾌활한 성정은 여전했기에, 아이들은 공작가의 구성원 중 체스를 두 번째로 좋아했다.
당연히, 첫 번째는 아스트리드였고.
“부인을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
“누군데?”
카리나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자신의 공이 알려진 이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녀를 만나고 싶어 했다.
카리나는 그들 모두를 가리지 않고 직접 만나보았다.
처음엔 호기심에서였고, 그 뒤에는 쓸만한 인력을 찾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대부분은 말을 섞는 시간이 아까운 어중이떠중이에 불과했다.
카리나는 이내 자신이 공작가에 연줄을 댈 발판쯤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만만하니까.’
애가 둘 딸린 평민 과부.
개중엔 심지어 그녀를 유혹하려고 든 작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사람들을 만나는 걸 멈추지 않았다.
100개의 돌멩이 중 진주가 단 한 알만 있다고 해도, 이득이었으니까.
“릴리스 포드. 알아?”
카리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처음 들어.”
공작가의 일을 한다는 건, 처음 듣는 이름과 작위의 바다에서 헤매게 되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다행히 카리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이름들을 쉽게 쉽게 기억했다.
릴리스 포드라는 이름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포드 상단의 상단주.”
“……!”
카리나의 입이 벌어졌다.
‘포드…….’
상단주의 이름은 조금 전까지 몰랐어도, 포드 상단은 알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상단들은 각종 재화들의 유통만을 담당했는데, 포드 상단은 생산까지 함께 하는 것으로 제법 유명세를 탔던 것이다.
“하지만 포드 상단의 근거지는 수도잖아.”
여태까지 카리나를 만나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 남부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지. 부인에게 뭔가 다른 걸 원하는지도.”
카리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내게 원하는 게 뭘까?”
“내가 어떻게 알겠어? 꺼림칙하면 만나지 마. 알아서 돌려보낼게.”
“만나긴 만나야지.”
카리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직접 만나기 전까진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는 거니까.”
잠시 후.
릴리스 포드가 기다리고 있다는 응접실로 찾아간 카리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상단주 일행만 있어야 할 자리에 클로드 역시 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카리나를 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왔군.”
“각하께서도 계신지는 몰랐어요.”
“포드 상단주가 부인도 만난다기에, 같이 만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
카리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클로드가 와 있다는 사실은 이 자리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을 시사했다.
릴리스 포드가 카리나를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부인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카리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릴리스 포드는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중년의 부인이었다.
날카로운 시선과 빈틈 하나 없는 자세에서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카리나는 깨달았다.
‘이 자리는 철저히 계산된 자리야.’
릴리스 포드는 무언가를 얻어가고자 이 자리를 만들었다.
“블로에 부인도 왔으니 이제 시작해도 되겠군. 포드 상단주, 무슨 목적으로 여기까지 찾아왔나?”
릴리스는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이지적인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포드 상단을 대표하여, 공작가의 보호를 요청합니다.”
카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대담한 요구와 어울리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였다.
상단, 그것도 포드 상단만큼 규모가 큰 상단이 특정 가문에 매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히 이렇게 보호를 요청한다는 건…….
‘가신이 되겠다는 거야.’
클로드가 몸을 일으켰다.
“포드 상단주, 지금 자신이 무얼 요청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기를 바란다만.”
“예. 저는 공작 각하의 가신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유가 뭐지?”
“저희 상단은 다른 상단과 다릅니다. 생산자가 저희 상단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죠.”
릴리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명료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문제는, 생산부터 유통, 판매까지 전부 담당하다 보니 저희를 노리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희는 안전하기를 원합니다. 바로 토르스에서요.”
막힘없는 설명 그 어디에도 꾸며낸 듯한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클로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겨우 기사단의 보호를 받기 위해? 구성원들은 동의하던가?”
“만장일치였습니다.”
릴리스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침묵이 흘렀다.
카리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다.
솔직히, 그녀는 왜 릴리스가 자신도 만나고 싶어 했는지조차 감이 오지 않았다.
그냥 클로드와의 접견만 청하고, 가신이 되기를 요청하면 되는 문제였으니까.
잠시 후.
클로드가 입을 열었다.
“토르스의 기사단은 토르스 전체를 위한다. 일개 상단 하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가 공작 각하의 가신이 된다면, 그건 저희 상단 역시 토르스의 일부가 된다는 뜻입니다.”
릴리스가 선언했다.
“저희를 믿어 주십시오. 각하의 기사단만큼이나, 토르스에 공헌할 자신이 있습니다.”
“좋다.”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상황이 복잡했던 체스를 제외하고는, 항상 그녀는 클로드가 남에게 가신이 되어 달라 청했다는 이야기만 들어왔다.
하지만 지금.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상단 중 하나가 토르스의 가신이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단, 1년을 유예 기간으로 두지. 그동안 얼마나 공헌하는지를 지켜보겠다.”
“역시 각하께서는 합리적이시군요.”
릴리스는 반쯤 감탄한 듯한 목소리였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건 두고 봐야지.”
카리나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포드 상단이 토르스를 위해 일한다니……!’
그동안 토르스는 아무리 훌륭한 도자기 장인이 있어도, 아무리 카리나가 품질 좋은 마정석을 만들어내어도 팔 수가 없었다.
그 어떤 상단도 토르스의 주 수출 품목이 아닌, 자질구레한 재화의 수출을 도맡으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단순한 거래 관계가 아닌, 가신이 되겠다는 상단이 나타났다.
길이 열린 것이다.
릴리스가 카리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부인, 뭔가 궁금한 게 있으신 듯하군요.”
“아, 아뇨.”
카리나는 손을 내저었다.
궁금한 점이야 많았지만, 괜스레 잘못된 말을 해서 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뭐든 말해 보십시오. 사실, 저희가 토르스에 정착하기로 한 이유는 바로 부인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