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아서 템프턴의 완치 소식은 순식간에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카리나는 몰랐지만, 한때 아서 템프턴은 황제로부터 작위와 성을 하사받을 정도로 제국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기사였던 것이다.
아서 볼턴 백작.
한때 그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부상 이후, 백작위와 성은 회수되었고 한때의 인재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아서 템프턴의 완치와 함께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간 소문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그가 토르스 공작가의 가신에게 구애 중이라는 소문이었다.
그것도 평민 과부에게.
‘…….’
카리나는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입단속을 해뒀어야 했는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누구의 입단속도 하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베리티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생각한 듯했지만, 문제는 에이드리안이었다.
그는 아서 템프턴이 카리나를 단순히 약초의 숙주 정도로 취급한다고 생각하여 분노한 나머지 사방에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그 결과, 제국 전역에서 아서 템프턴이 평민 과부에게 청혼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카리나의 이름은 제대로 퍼지지 않았다는 게 위안이었다.
소문에서 카리나의 역할은 그저 아서 템프턴의 불장난 상대에 불과했기 때문에 아무도 이름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카나 블룸, 리나 블로, 카시아 블롬…….
거기서 ‘카리나 블로에’를 생각해내기는 아무리 렝케 경이라도 어려울 것이다.
한편, 아서 템프턴이 아닌 다른 기사들에서도 성과는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유황 온천은 만병통치약은 되지 못해도 근육 질환과 피부병에 효과적이었다.
에이드리안과 베리티가 새롭게 만들어내는 약들도 치료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당연히 토르스의 기사단에 있던 어중이떠중이들은 모두 쫓겨났고, 그 자리는 유능한 기사들이 메꾸었다.
은퇴할 나이에 가까운 기사들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절반이 약간 안 되는 수가 마흔 미만의 젊은 기사들이었다.
갈수록 많은 기사들이 토르스로 몰려들어 입소 자격을 엄격하게 심사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다재다능한 기사들 중에서 아서 템프턴은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뭐, 해괴한 소문이 퍼지긴 했지만 이 정도 성과면 감수할 만하지.’
카리나는 태평하게 생각했다.
이제 만약 베가 왕국이 쳐들어오더라도 자신이 나가서 싸워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롤랜드의 능력과 경험을 밝힐지 말지를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공작 각하가, 그렇게 무리를 하지 않아도 돼.’
클로드 데비아탄은 이제 일전처럼 그 모든 것들을 홀로 감당할 필요가 없다.
그 하나만으로도 카리나는 지금과 같은 기사단을 만들어낸 보람을 느꼈다.
비록 카리나가 모든 계획을 세우고 총지휘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카리나가 원하는 건 명성이 아니었으니까.
“블로에 부인, 공작 각하께서 부르십니다.”
“각하께서?”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최근엔 둘 모두 바쁜 나머지,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웬만한 일들은 서면상으로 처리했다.
걸어서 이동할 시간마저 아까웠던 탓이었다.
“예. 지금 당장 오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모처럼의 휴식을 취하던 카리나는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섰다.
클로드 데비아탄은 별것 아닌 일로 지금처럼 바쁜 상황에 가신을 부르는 성정이 아니었다.
카리나는 아무 생각 없이 사용인을 따라가다 자신이 클로드의 사무실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죠?”
“아, 대연회장으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
의구심이 들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 사람은 클로드의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
‘가 보면 알겠지.’
잠시 후.
카리나는 대연회장에 도착했다.
거대한 홀이 그녀를 반겼다.
‘……?’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공작가의 모든 구성원이 대연회장에 모여 있었다.
가신들은 물론, 새롭게 기사단에 자리한 기사들, 사용인들, 심지어 아스트리드까지.
카리나는 문간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아는 얼굴을 찾았다.
바로 아서 템프턴이었다.
“아서 경, 무슨 일이죠?”
“모른다.”
아서는 무뚝뚝하게 대답했지만, 그녀를 위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카리나는 그의 곁에 서서 잠자코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보기 드물게 정복을 차려입고 있었는데, 평상시의 간소한 의복에서는 느낄 수 없는 위엄과 위압감이 드리워진 모습이었다.
마침내, 그의 입이 열렸다.
“이렇게 그대들을 부른 건, 기사단의 성과를 치하하기 위함이다.”
카리나는 금세 상황을 알아차렸다.
새로운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은 최근 들어 각종 공을 세웠다.
그들을 치하하기 위한 자리인 모양이었다.
“이미 그대들 중 몇몇은 짐작하고 있겠지만,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자가 있지.”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 템프턴이겠지.’
하지만, 클로드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었다.
“카리나 블로에.”
“……?”
카리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클로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대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고자 한 것. 그리고 시설의 설립을 총괄해서 지휘한 것. 불치병의 치료제를 발견한 것. 이 모든 게 블로에 부인의 공이다.”
“……!”
목에서 무언가 먹먹한 기운이 치밀어 올랐다.
카리나는 한 번도 자신의 공이 모두에게 인정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모든 공은 클로드에게 돌려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불만은 없었다.
그녀는 이미 가신으로서 충분한 보수와 지위를 보장받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클로드는 그녀가 한 일을 공작가의 모든 구성원 앞에서 공표했다.
카리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는…….
전생에 읽은 소설 속에서 묘사된, 인재욕에 불타 수단도 방법도 가리지 않는 토르스 공작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클로드 데비아탄은 모두가 카리나에게 환호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특히 카리나의 아이디어에 가장 수혜를 많이 입은 기사들의 환호성이 가장 컸다.
정작, 그중 가장 큰 덕을 보았다고 할 수 있는 아서 템프턴은 무표정하게 카리나의 모습만을 눈으로 좇고 있을 뿐이었지만.
‘……마음에 안 들어.’
그는 문득 심기가 불편해졌다.
카리나는 아서 템프턴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아서가 카리나에게 청혼했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비록 카리나가 단칼에 거절했다고는 하나, 남녀 간의 일은 그렇게 단순하게 끝나지는 않는 법이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클로드는 잡념을 지우려고 애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크게 자신을 꾸짖었다.
‘블로에 부인이 누구와 재혼하든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닐 텐데.’
더군다나 상대는 새롭게 탄생한 기사단의 핵심 인력이다.
가신인 카리나와 결혼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도 없었다.
아서 템프턴을 토르스에 정착시키면 그녀 또한 이곳에 정착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이 차가 제법 나기는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 전남편도 카리나 보다 나이가 꽤 많았을 것이다.
‘어쩌면, 나이가 많은 게 취향일지도…….’
클로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카리나는 5년 뒤에 떠날 사람이 아닌가.
그러니 만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다고 해도 전혀 신경을 쓰지 말아야…….
‘아니지.’
카리나 블로에는 자신의 소중한 가신이었다.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려 됨됨이도 제대로 모르는 남자와 결혼해, 불행한 신혼을 보내게 되면 큰일이었다.
‘정신 차려라.’
클로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무래도 오늘 자신의 상태가 영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집중해.’
모처럼 준비한 자리를 겨우 삿된 생각 때문에 망칠 수는 없었다.
그는 최대한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에이드리안과 베리티를 치하하고, 아서 템프턴에게 기사단의 부단장급 지위를 내려주었다.
마침내.
기나긴 행사가 끝이 났다.
그는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기사들의 뒷모습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기사들의 성질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었다.
‘……?’
클로드 데비아탄은 잘 당황하지 않은 성격이었다.
하지만 기사들이 모두 홀을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카리나 블로에 한 명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었을 때.
그의 심장은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블로에 부인?”
카리나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좋은 향기에 목이 조여오는 듯했다.
‘그 꽃 때문이야.’
에이드리안 오델이 카리나의 근처를 졸졸 따라다니며 연구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카리나에게선 꽃향기가 진하게 났다.
사실 아스트리드를 포함한 귀족 여인들은 모두 값비싼 향수를 뿌리고 다녔고, 카리나에게서 나는 향기 역시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카리나 블로에의 향기에는 숨이 막히는지는 그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카리나가 세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각하.”
클로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빨리 에이드리안이 연구를 적당히 끝내기를 바랐다.
그런다면 저 향기도 사라질 것이고, 자신도 카리나가 다가올 때마다 당황하지 않을 테니까.
“감사드립니다.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카리나가 진지하게 물었다.
“만약 각하의 말이 맞다면 그 당연한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을까요?”
“당연히 자신의 이득을 위해 가신의 공을 치하하지 않는 사람들이야 많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자들의 행동이 옳은 것도 아니다.”
“…….”
카리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클로드는 바싹 긴장했다.
혹시 자신이, 이 여인의 심기를 거슬렸나 싶어서.
마침내, 카리나의 작은 입술이 달싹였다.
“저는 각하가 존경스러워요.”
카리나의 목소리가, 클로드의 귓가를 간질이더니 사로잡아 놓아주지를 않았다.
심장이 쿵쿵거리다 못해 갈비뼈가 뻐근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가신의 공을 낚아채겠죠. ‘왜 안 돼?’ 라고 하면서요.”
“고맙다.”
클로드 데비아탄이 지금 이 순간,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