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공작가의 가신, 카리나 블로에입니다.”
카리나는 곧바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
아서 템프턴은 그녀를 짐승처럼 번득이는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카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위압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처음 만났을 당시의 클로드 데비아탄이 매서운 눈보라였다면, 이 남자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집어삼킬 준비가 되어 있는 맹수였다.
“난 너를 믿지 않아.”
위험한 목소리가 카리나의 귓가에 울렸다.
“거친 손, 바르지 못한 자세, 그리고 그 너저분한 옷. 제 주제를 모르는 하녀쯤 되겠군.”
“…….”
카리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서 템프턴은 커도 너무 큰 착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하녀가 가신을 사칭하다니, 간도 크군.”
아서는 한 발짝 성큼 걸어 카리나를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너 같은 것…… 죽여 버려도 아무도 모른다.”
칼이 검집에서 풀려나오는 금속성 소리가 들렸다.
바로 그 순간.
카리나는 쓰러졌다.
눈앞에 떠오르는 시뻘건 글씨를 느끼면서.
「“아서 템프턴이다.”
머리가 희끗해지기 시작한 소드마스터가 롤랜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소드마스터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서 템프턴은 의례적인 인사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쪽은 영광인가? 나는 아닌데.”
“…….”
롤랜드는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사실상 평민 출신의 마법사인 그에게 처음부터 적개심을 가진 사람들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익숙한 반응이었다.
“이렇게 어린 애송이와 임무를 해야 하다니…… 세상이 말세로군.”
롤랜드는 살짝 놀랐다.
아서 템프턴은 그가 아닌, 황실에 화를 내고 있었다.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저도 제 몫은 하니까요.”
“살아남는 게 네 몫이다, 꼬맹아.”
롤랜드는 그제야 아서가 기분이 나쁜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물 둥지를 격파하는 임무였다.
만약 지원군이 많다면 딱히 어려운 임무가 아니었지만, 문제는 지원군이 한 명도 없다는 점이었다.
‘소드마스터와 마법사의 조합이니까, 지원군은 사치라고 생각했겠지.’
사실 아서 템프턴은 혈혈단신으로 마물 둥지를 격파한 경험도 적지 않았다.
자신을 발목만 잡는 짐덩어리 취급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음 날.
아서 템프턴은 롤랜드가 마물의 둥지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했다.
롤랜드는 괜히 그와 다투다가 임무를 그르치기 싫었기 때문에 원거리에서 지원 마법만 사용했다.
‘대단하긴 해.’
아서 템프턴의 실력은 결코 부정하기 어려웠다.
이런 인재가 겨우 5년 전부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마침내 모든 마물들이 아서의 대검에 베여 바닥에 나뒹굴었을 때, 롤랜드는 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헉, 헉, 허억…….”
아서 템프턴은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가 한 일을 생각하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롤랜드는 무언가 꺼림칙한 사실을 발견했다.
아서 템프턴의 손가락들이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꺼내려는 것처럼 허리띠에 찬 주머니를 뒤지다가 경련 때문에 포기하곤 했다.
“제가 대신 꺼내 드리겠습니다.“
“……약병.”
롤랜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머니에서 약병을 하나 찾았다.
“먹여 드릴까요?”
“…….”
아서 템프턴은 그를 노려보더니, 오른손을 쫘악 펼쳤다.
“2개.”
롤랜드는 약병에서 알약 두 개를 꺼내, 아서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물도 없이 알약들을 삼켰다.
그리고, 손가락의 경련도 그 순간 멈추었다.
롤랜드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실패한 모양이었다.
아서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신기한가.”
“죄송합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다들 너처럼 반응해.”
“…….”
“이 약이 뭔지 궁금하겠군.”
롤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는 여태까지 숱하게 많은 설명을 해온 것처럼 담담하게 대답했다.
“마정석 광산에서 자라는 이끼로 만든 약이다.”
“예?”
“마법사니 이해는 쉽겠군. 검사 역시 수련을 계속한다면 일종의 마력을 지닐 수 있다. 마법사들의 것들과는 다르지만.”
“그건 압니다.”
“그 마력이 흐트러지면…… 아까와 같은 꼴이 나지.”
롤랜드는 경련하던 열 개의 손가락을 떠올렸다.
참혹한 모습이었다.
“왜 그런지는 아무도 몰라. 내게 중요한 건, 황실이 마정석 광산을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그렇다면 아서의 약은 모두 황실에서 만든 것이리라.
하지만 아서는 결코 황실에 호의적인 어투가 아니었다.
롤랜드는 이내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럼, 약 역시 독점하고 있다는 뜻이군요.”
“정확해.”
아서 템프턴은 한숨을 내쉬었다.
“엄밀히 말해서, 이건 임시방편일 뿐이야.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은…… 마정석을 소화하는 거다.”
롤랜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인간이 마정석을 소화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옛 문헌에, 마정석으로 꽃을 키워냈다는 기록은 있었으나 비유적 표현이라는 게 정설이었다.
“불가능한 일 아닌가요?”
“그래. 불가능하지.”
아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난 평생 황실의 개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다.”」
카리나는 눈을 떴다.
자신은 차가운 바닥에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일어날 기운이 없어 눈을 감은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온몸이 뻐근했다.
‘그냥 놔두고 가버렸구나.’
하지만 전혀 속상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카리나는 아서 템프턴의 병을 고칠 방법을 알아냈다.
기뻐서 방방 뛴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하나 더.
‘혹시…….’
이제 카리나는 이제 언제, 어느 시점에서 소설의 글귀가 눈앞에 나타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이안 베온헴에 대한 글귀가 떠올랐을 때와 롤랜드에 대한 글귀가 떠올랐을 때.
그리고 방금, 아서 템프턴에 대한 글귀가 떠올랐을 때까지 종합해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나나 아이들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글씨가 나타나는 게 아닐까.’
만약 카리나의 추측이 맞다면, 아서가 그녀에게 적대적인 건 차라리 행운이었다.
바로 그때.
‘……!’
찬물이 그녀의 얼굴을 덮쳤다.
“악!”
카리나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히, 그녀에게 물을 퍼부은 건 아서 템프턴이었다.
그녀는 물을 뚝뚝 흘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런 구호 조치도 취하지 않고 가 버린 것까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건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너, 뭐냐.”
항의하기 위해 입을 벌린 카리나보다, 아서 템프턴이 조금 더 빨랐다.
“연극은 아닌 것 같고. 겨우 칼 좀 뽑았다고 놀라서 쓰러지다니…… 남부 여자들은 원래 이렇게 약한가?”
카리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가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든 알 바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그의 인식은, 오늘부로 완전히 바뀌게 될 테니까.
“아서 템프턴.”
그녀는 선언했다.
“절 죽이면 후회할 거예요.”
“……아무리 천한 하녀라고는 하나 공작가의 사람을 죽일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거짓말.
아서 템프턴은 분명, 카리나를 죽이려고 했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그 사실은 당분간 수면 밑에 묻어 두기로 했다.
“그런 의미가 아닌데요.”
카리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경련, 고치고 싶죠?”
“……그걸 어떻게.”
다시 살기가 느껴졌다.
카리나는 웃었다.
“말했잖아요. 저는 토르스 공작가의 가신이라니까?”
“…….”
아서 템프턴은 험상궂은 얼굴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카리나는 그 시선을 지지 않고 그대로 맞받아쳤다.
“고칠 수 있어요, 그 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