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정확합니다. 역시 범상치 않은 분이시라, 이해력이 범인의 경지를 넘으셨군요.”
“참관하는 것뿐이라면 괜찮아요.”
카리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 몸에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려고 하거나, 뭘 먹이려고 하거나, 뭘 시키려고 한다면…….”
에이드리안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절 뭘로 보시는 겁니까! 저는 그렇게 파렴치한 놈이 아닙니다.”
“그래도, 연구라는 건 원래 그런 거잖아요.”
카리나는 렝케 경의 연구를 떠올렸다. 그는 잔혹하고 이기적이었지만 효율을 추구했다.
없는 연구법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에이드리안은 있는 힘껏 부정했다.
“요즘은 동물조차 건드리지 않는 추세입니다! 그렇게 위해를 가하는 방식은 저급한 놈들이나 하는 것이지요. 저는 그런 인간들을 학자라고도 부르지 않습니다.”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렝케 경에게 들려 주고 싶은 말이었다.
“그럼, 각하께서만 허락하신다면…….”
“부인만 괜찮다면야, 나는 상관없다.”
클로드는 에이드리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단, 허튼짓은 하지 말도록.”
“절대 안 하죠. 절대.”
에이드리안은 해명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카리나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가 또 이상한 아부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땅에 엎드린 상태로 신종 식물을 소중하게 매만지기만 할 뿐이었다.
“마분지처럼 뻣뻣한 감촉…… 이 기묘한 냄새……. 세상 어딜 가도 이렇게 독특한 꽃은 없을 겁니다.”
그는 행복하게 미소 지었다.
카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에이드리안은 훈련장에서 저 꽃들만 바라보며 하루종일 지낼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훈련장을 나섰다.
할 일이 태산이었다.
다음 날 저녁.
베리티와 에이드리안의 첫 만남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에이드리안은 베리티가 준 자료들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뭐야, 이런 거지 같은 것들을 나보고 연구하라고요? 내 좋은 머리를 너무 물로 보는 것 아닙니까?”
“그 좋은 머리, 여태까지 좀 쓸 데 있는 곳에 놀리지 그랬어요?”
“솔베타인 선생, 지금 할 말 다 했습니까?”
카리나는 둘의 사이를 중재해 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나마 에이드리안은 그녀를 반쯤 숭배하고 있었기에 베리티에 대한 태도를 서서히 정중하게 바꾸었다.
반면, 이미 에이드리안에 대한 인식이 최악이나 다름없었던 베리티는 완강했다.
“저런 자와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할 바에야 차라리 죽겠어요!”
결국 카리나는 둘 사이의 교류를 서면으로 제한해야 했다.
‘어쩔 수 없지, 뭐.’
카리나는 딱히 상심하지 않았다.
굳이 동료끼리 사이가 좋아야 할 필요는 없다.
더군다나 베리티도, 에이드리안도 재활 시설의 책임자일 뿐이다.
도가 지나칠 정도로 사이가 나쁘다면 적극적으로 나서 보겠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도리어 그들은 서로에 대한 경쟁심에 불타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카리나는 두근거리며 재활 시설의 완성을 기다렸다.
* * *
여름은 공사와 함께 지나갔다.
유황 온천을 끌어오는 데다 차후 영지민들의 치료소로 새롭게 단장할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기 때문에 상당한 대공사였다.
토르스의 기술자들은 간만의 대형 일거리로 신이 난 데다, 그 취지를 설명하자 더더욱 열의에 차서 열심히 일했다.
그 덕에 재활 시설은 카리나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휘황찬란한 건물이 되었다.
잘된 일이었다.
실력 있는 기사들은 기본적으로 재산과 지위가 있었기에 건물의 외관과 내부 시설의 질에도 상당한 신경을 쓸 것이다.
공사가 끝났으니 이제는 기사들을 불러들일 차례였다.
당연히 그건 클로드와 아스트리드의 몫이었다.
그들은 나이나 부상 탓에 은퇴한 기사들 중, 아직 현역에서 능력을 발휘할 만한 기사들을 골라 초청장을 보냈다.
그중엔 남부와 연이 없는 기사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재활 시설에 기사들이 입소하는 날이 되었다.
카리나는 자신 곁에서 묵묵히 기사들을 바라보고 있는 클로드를 향해 말을 걸었다.
“떨리네요.”
“잘 될 거다.”
클로드는 카리나에게 대답한다기보단, 그 자신에게 나직하게 읊조리는 것처럼 들렸다.
“다 잘 될 거야.”
카리나는 한 명씩 입소하는 기사들을 살폈다.
그녀는 기사들의 명단은 굳이 살피지 않았다. 어차피 봐도 누가 누군지 모를 테니까.
더군다나 재활 시설의 운영 자체는 베리티가 총괄하고 있었다.
하지만 외형 정도는 눈에 익혀 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외부인이 침입했을 때, 구분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
카리나는 살짝 어리둥절해졌다.
대부분이 척 보기에도 반백은 될 듯한 노쇠한 기사들이었지만, 개중 젊은 기사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젊은 기사들이 많네요?”
“그래.”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나이에 훈련을 너무 열심히 하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들이 대부분이다. 치료가 필요하지만, 아직 자신의 잠재력조차 제대로 보여 주지 않은 젊은 기사들에게 투자할 가문은 많지 않지.”
“저들을 치료할 수 있다면 아무 걱정이 없겠네요.”
카리나는 젊은 기사들을 관심 있게 살폈다.
척 보기에도 실력자일 듯한 기사도 여럿 있었다.
“잠깐만요.”
카리나는 클로드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고는, 소매로 살짝 어느 기사를 가리켰다.
서른쯤 되었을까.
번쩍이는 금발과 금안. 그리고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듯한 근육이 인상적인 기사였다.
겉보기에는 아픈 구석이 전혀 없어 왜 토르스까지 왔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누구죠?”
클로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마음에 드나?”
“그냥, 궁금해서요.”
회복시킬 수만 있다면 기사단의 핵심 인력이 될 것 같아서 이름을 기억해 두고 싶었다.
클로드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아서 템프턴이다.”
“……!”
카리나는 비명을 지를 뻔한 입을 틀어막았다.
“부인, 왜 그러지?”
“아, 아니에요.”
카리나는 도리질을 쳤다.
아서 템프턴.
그도 분명, 전생에 읽은 소설 속의 요주의 인물 중 한 명이었다.
훗날 제국의 소드마스터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남자.
그는 출중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중년이 다 되어서야 날리게 되었는데, 바로 스물을 갓 넘겼을 때 입은 치명적인 부상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부상이었는지, 어떻게 그 부상을 이겨내고 재기하게 되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아서 템프턴은 열쇠였다.
토르스의 기사단을 부흥시킬.
며칠 후.
카리나는 베리티를 찾아갔다.
당연히, 아서 템프턴에 대해 묻기 위해서였다.
아서 템프턴을 보기만 한 것만으로는 아무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부상이 어떤 종류인지, 그리고 베리티와 에이드리안 둘만으로도 그를 치료할 수 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아서 템프턴이요? 역시 부인도 그자가 눈에 들어왔군요.”
베리티는 다짜고짜 찾아온 카리나가 특정 기사의 이름을 말해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골치 아픈 환자입니다.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가 검만 쥐었다 하면 뻣뻣하게 굳어 버려요. 개인적으론 심리적인 문제가 아닐까 한데…….”
“심리적이요?”
“네. 솔직히 온천도 아서 경에겐 근육 긴장 이완 말고는 큰 효능을 못 볼 것 같네요. 아마 곧 돌아갈 듯하니, 부인께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
카리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안 베온헴에 대한 소설의 문구가 눈앞에 떠오른 건, 그와 상당한 시간을 같은 공간에 보냈을 때였다.
‘찾아가야겠어.’
카리나는 베리티에게 간단한 감사 인사를 한 다음 곧장 재활 시설로 향했다.
각 기사들에게는 개인 객실이 주어졌기 때문에 카리나는 바로 아서 템프턴의 방으로 향했다.
만약 재활 시설이 자리를 굳힌 상태였다면 직원에게 말을 전해 달라고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재활 시설은 입소 초기였기 때문에, 모든 직원들이 일에 허덕이고 있었다.
‘겨우 이런 문제로 바쁜 사람들을 귀찮게 할 수는 없지.’
잠시 후, 카리나는 아서 템프턴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
그녀가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문이 안쪽에서 벌컥 하고 열렸다.
아서 템프턴이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 홀로 운동을 하고 있었던 듯, 가벼운 옷차림에 수건을 걸치고 있었다.
낯선 여자에게 드러낼 옷차림이 아니었는데도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도리어 흉흉한 눈빛으로 카리나를 쏘아보았다.
“누구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서 템프턴이 단순히 그녀에게 적대감을 표출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시선, 목소리, 태도…… 그 모든 것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위험해.’
카리나는 직감했다.
아서 템프턴은 정말로 그녀를 죽이고 싶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