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뭔데요?”
카리나는 에이드리안을 향해 서둘러 다가갔다.
다음 순간, 그녀가 눈을 의심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에이드리안이 잡초를 보호하듯 앞으로 엎드리는 게 아닌가.
“오지 마십시오!”
“뭐라고요?”
카리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에이드리안이 여태까지 한 행동들은 모두 예상한 범주였다.
‘콧대 높은 귀족 도련님이니까 그럴 만해.’ 라고 할 만한.
그러나 이건…… 기행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에이드리안은 카리나의 반응을 아예 눈치채지 못했거나, 혹은 알아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그는 잡초가 귀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카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하.’
이쯤 되면 모를 수가 없다.
카리나는 그를 자극하지 않게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물었다.
“희귀종인가요?”
에이드리안이 눈을 부라렸다.
“부인, 희귀종이냐고요? 이건 신종입니다!”
“신종이라고요?”
카리나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이 잡초가 어디 깊숙한 산속이나 절벽 위에 자라난 것도 아니다.
평범한 훈련장일 뿐인데 희귀종도 아닌 신종이라니.
에이드리안은 카리나가 당황하든 말든 신종을 발견했다는 기쁨에 차 있는 듯했다.
“내가 124년 만에 신종을 발견했다는 걸 알면 학회 그 멍청이들이 무슨 말을 할지…….”
“이게 신종이라는 걸 어떻게 알죠? 그냥, 에이드리안 경이 모르는 풀일 수도 있잖아요.”
에이드리안이 눈을 부라렸다.
“절 대체 뭐로 보는 겁니까? 전 대륙의 풀 중 제가 모르는 건 없습니다. 이건 신종이 확실합니다!”
“여긴 베가 왕국과 가까워요. 베가 왕국에서 넘어왔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요?”
“우린 베가 왕국의 학자들과도 교류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풍토가 크게 다르지도 않고요.”
에이드리안은 몸을 일으켰다.
“이 꽃을 다른 곳에서도 본 적이 있습니까? 공작저 안이라도 괜찮습니다.”
카리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평소 식물에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법 눈에 띄는 꽃이 피는 편이니 다른 곳에서 봤다면 기억에 남을 것이다.
“없는 것 같네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에이드리안이 선언했다.
“이 정도로 군락이 형성될 정도면 상당히 많이 퍼져 있을 겁니다. 블로에 부인이 못 봤을 뿐이겠죠.”
“찾아보세요.”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점심 시간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았다.
게다가 이 괴짜 식물학자가 공작저의 식물에 흥미를 보인다면 좋은 일이었다.
두 시간여 후.
이미 약속한 시각이 지나 있었지만 에이드리안은 개의치 않은 듯했다.
그는 땀을 쏟아내면서 씩씩거렸다.
“이럴 리가 없는데……!”
“아직 덜 찾아보신 게 아닐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식물이 자랄 만한 곳은 다 보았단 말입니다.”
그는 생각에 곰곰이 잠기더니, 이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당장 이곳을 보존해야 합니다. 왜 여기에서만 자라는지도 알아야겠고요. 다양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글쎄요.”
카리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에이드리안을 붙들 기회를 그냥 놓칠 수는 없었다.
“이 식물은 공작가의 소유입니다. 공작 각하의 허락을 받지 않고선 연구하실 수 없어요.”
“그런 게 어딨습니까!”
에이드리안이 거세게 항의했다.
카리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당장, 각하의 초대 없이는 여기에 들어오실 수도 없을 텐데요?”
“…….”
에이드리안은 한 방 먹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각하께서 기다리실 텐데……. 저라면 가서 허락을 구하겠어요.”
에이드리안은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카리나를 따라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그는 계속 무언가를 궁시렁궁시렁 중얼거리며 불평했지만, 카리나는 개의치 않았다.
‘거의 다 잡은 물고기나 다름없어.’
식사 테이블엔 카리나가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는 음식들이 올라와 있었다.
정어리 파이, 고기 소스를 얹은 으깬 감자, 훈제 생선…….
솔직히, 카리나의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하지만 에이드리안은 반쯤 눈물을 흘리면서 우걱우걱 먹었다.
“경이 어릴 때 서부에서 자랐다고 해서, 서부 음식으로 준비해 보았는데 입맛에 잘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군.”
에이드리안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음식을 모조리 먹어 치웠다.
제대로 된 이야기는 디저트가 나왔을 때에야 시작되었다.
그것도 에이드리안이 먼저.
“각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뭔가?”
“공작저에 한 번도 학계에 보고된 바가 없는 신종 식물이 자라고 있습니다. 연구를 허가해 주십시오.”
클로드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담담하게 에이드리안의 말을 듣기만 했다.
“발에 밟힌 자국이 상당하더군요. 더 훼손되기 전에 당장 서식지를 보존해야 합니다.”
“어디서 자라던가?”
“훈련장입니다. 노란색 꽃이 피어서 보셨을 수도 있겠군요.”
“……역시.”
에이드리안은 놀란 나머지 자리를 반쯤 박차고 일어섰다.
“알고 계셨습니까?”
“신종인 줄까지는 몰랐지. 하지만 경의 말을 듣고 보니, 신종이 아닌 게 더 이상하겠군.”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클로드는 여태까지 훈련장의 잡초에 대해 관심 한 번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미리 알고 있었다니.
“그럼, 훈련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공작저 안이나, 밖이라도 좋으니……!”
“그건 훈련장에만 있을 수밖에 없어. 아무리 찾아보아도 시간 낭비일 거다.”
에이드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훈련장에서만 자란다는 말씀이십니까? 말도 안 됩니다!”
클로드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장담하건데, 나는 그 식물에 대해 경보단 훨씬 잘 알고 있어.”
그는 자리에서 우아하게 일어섰다.
“경이 그렇게까지 관심이 있다면 잠깐 훈련장에 가서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잠시 후.
그들은 훈련장에 도착했다.
에이드리안이 잔뜩 흥분하며 신종 식물을 향해 달려갔다.
분명 좀 전에 잔뜩 보았는데도 성에 차지 않은 모양이었다.
클로드가 입을 열었다.
“이게 어떻게 싹을 틔우는지 알고 있나?”
“오늘 봤는데,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꽃이 지고 씨앗을 맺어야 알겠죠. 그러니 연구 허가를…….”
“틀렸어.”
그는 에이드리안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
“이 꽃은 씨앗이 없다.”
“예?”
“씨앗으로 싹을 틔우는 게 아니야.”
에이드리안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클로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상대가 공작이다 보니 별달리 무례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카리나는 그의 표정에서 ‘별수 없는 멍청이군,’이라는 뜻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 식물은 부인이 마정석을 만든 자리마다 싹을 틔운다.”
“……!”
놀란 건 에이드리안 뿐만이 아니었다. 카리나 역시 몸이 달달 떨릴 정도로 놀랐다.
‘저게, 나 때문에 자란 거라고?’
카리나는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웬 신종 식물이 자신 때문에 나타났다니.
절로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아냐, 저자를 꼬드기기 위한 거짓말일지도 몰라.’
하지만 거짓말과 술수는 클로드의 방식이 아니었다.
카리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클로드의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
“부인, 마정석을 만들어 보겠나? 아무래도 직접 보여 주어야 할 것 같군.”
“……네.”
카리나는 마력을 분출했다.
이제 클로드의 도움이 없어도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마정석 정도는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었다.
순식간에 생성된 금빛 마정석 세 개가 땅으로 떨어졌다.
클로드는 조심스럽게 마정석들을 모조리 주워들어, 카리나에게 건네주었다.
즉각 에이드리안이 현미경을 꺼내 들고 마정석을 관찰했다.
“세상에……!”
에이드리안이 탄성을 내질렀다.
“각하, 각하께서 정확하게 보셨군요. 예, 정확히 마정석이 떨어진 자리마다 싹이 움텄습니다.”
“눈치챈 지는 좀 되었다만…… 신종인 줄은 몰랐군. 알았다면 식물학자를 좀 더 쉽게 영입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되었어.”
“식물학자가 필요하십니까?”
에이드리안은 마치 영입 제안을 들어 본 적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열광적으로 물었다.
“그래. 하지만 연락한 식물학자마다 거절당하는 상황이라 부끄럽군.”
“그 무례한 작자들에겐 신경도 쓰지 마십시오! 제가 하겠습니다! 단…….”
에이드리안이 카리나를 슬쩍 돌아보았다.
“블로에 부인을 연구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네?”
카리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저요? 절 연구한다고요? 경은 식물학자시잖아요!”
“블로에 부인.”
에이드리안은 아무 망설임 없이 카리나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당장 세레나데라도 부를 듯한 기세였다.
카리나는 기가 막혀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부인은 제 여신이자 뮤즈이십니다. 부디 대지에 은총을 내릴 때마다 참관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별별 해괴한 수식어에 카리나는 반쯤 기절할 지경이었다.
에이드리안의 말뜻을 잠시 생각한 다음에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어…… 그러니까, 마정석을 만들 때마다 옆에 있게 해 달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