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좀 괴짜인 데다가 실력은 두고 보아야겠지만 하루 종일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카리나는 주저하지 않고 식물학자를 불렀다.
아이들과 클로드가 놀라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잠깐만요.”
“뭐야?”
식물학자는 즉각 반응했다.
“성함이 어찌 되시죠?”
“내 이름을 알아서 뭐 하려고? 그러는 그쪽 이름은 뭔데?”
“전 토르스 공작가의 가신, 카리나 블로에입니다.”
카리나는 담담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식물학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실례했군요.”
순식간에 식물학자의 태도가 공손해졌다.
“저는 에이드리안 오델입니다.”
카리나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그녀는 제국의 식물학자란 식물학자는 모두 살펴보았다.
분명, 이 남자의 이름도 어디선가 보았을 것이다.
이내 카리나는 식물학자의 정체를 기억해냈다.
‘확실해.’
에이드리안 오델.
한때는 제국 식물학회에서 제법 잘나가는 학자였으나 그 오만방자함과 기행으로 인해 제명되었다.
‘오델 자작의 둘째 아들이었지.’
학자들은 대부분 귀족 출신이었기에 딱히 놀랄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 카리나에게는 제법 걸림돌이 되었다.
오델 자작가는 최근의 사업 성공으로 인해 제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가문 중 하나였다.
당연히 오델 자작의 둘째 아들인 에이드리안은 돈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 것이다.
본디도 남을 생각하지 않은 기행으로 악명이 드높은 그가 치료 시설에 관심을 보일 리도 없었고.
‘그래도, 시도 한번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아.’
카리나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만약 상황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그녀는 그저 클로드에게 에이드리안을 초대해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밖에 없었다.
‘각하는 시찰 중이니까, 내가 말을 해야 해.’
카리나는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에이드리안 경, 그간 경 같은 인재를 찾고 있었어요.”
“……하.”
에이드리안의 반응은 카리나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제가 정말 잘났긴 하지만! 그래서 이런 시골에서도 스카웃을 당할 만하지만!”
카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라는 거야, 이 인간?’
에이드리안은 카리나가 제대로 반응할 틈을 주지 않았다.
“저는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아무리 제가 요즘 가문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런 촌동네에 눌러앉을 거라고 생각하면 완전히 오산…….”
카리나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식물학자가 필요하다고 해도 이 사람은 아니었다.
‘자기 입으로 자유로운 영혼이라니, 뭐 하는 사람이야.’
그때, 클로드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촌동네라 미안하군.”
“……!”
에이드리안 오델은 자리에서 반쯤 튀어 올랐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클로드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오랜만이군, 에이드리안 경. 아버지께선 잘 지내시나?”
“그,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이런 촌동네에 경 같은 인재가 왔으니 내가 더 송구스러워야 할 것 아닌가.”
에이드리안은 당황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제 입이 방정이라…… 하하.”
“경이 토르스까지 귀한 발걸음을 했는데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내일 정오쯤 시간을 내어 줄 수 있겠나?”
“물론…… 물론입니다. 꼭 가겠습니다. 초대 감사합니다.”
에이드리안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뒷걸음질을 치며 사라졌다.
카리나는 클로드를 향해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멋졌어요.”
클로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큰 기대는 하지 마라. 나는 저자에 대해 대강 알고 있어.”
“뭔가요?”
“어딘가에 매이는 걸 거부하지. 사실, 식물학회도 본인이 참다못해 나온 거다.”
“하지만, 학회에선 본인들이 제명했다고 발표했잖아요.”
“식물학회의 회원이 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어야 할 텐데, 스스로 나갔다고 말할 수가 없었겠지.”
“…….”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것에 대한 분노와는 별개로, 이렇게 식물학자를 또 한 명 놓치게 되었다는 실망감이 컸다.
클로드가 카리나의 어깨에 손을 살며시 얹었다.
“즐기려고 나온 축제 아닌가. 그렇게 속상해할 건 없어.”
“그래도 식물학자가 필요하기는 하니까요.”
“부인이 여기서 걱정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기분 전환을 하면 뭔가 떠오를지도 모르지.”
클로드의 말이 맞았다.
카리나는 아직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재밌어?”
“네!”
“조금만 더 구경하다가 집에 가자. 장난감은 내가 들고 있을게.”
“……제가 들고 있으면 안 돼요?”
롤랜드가 울망울망한 눈으로 카리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하지만 힘들면 꼭 나한테 말해야 해. 알겠지?”
“롤랜드가 힘들면 제가 들고 있을게요.”
“대신 둘 다 힘들면 내가 들 거야. 무리하면 안 돼.”
“네!”
아이들은 합창하듯 대답했다.
카리나는 아이들과 함께 축제 거리를 거닐었다.
‘체스의 말이 맞기는 맞네.’
축제 거리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인파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휩쓸리다시피 할 정도였다.
결국 장난감 상자 역시 카리나가 들어야 했다. 클로드가 들어 주겠다는 듯한 손짓을 보냈지만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시찰 중이시잖아요. 이런 걸 들고 있으면 당연히 눈에 띈다고요.”
“……그렇군.”
클로드는 순순히 수긍했지만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각하도 이런 장난감을 좋아하나 보네.’
애들 장난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에이드리안에 이어 클로드까지 관심을 보일 정도면 상당히 잘 만든 장난감인 것 같았다.
그들은 천천히 축제 거리를 거닐었다. 딱히 뭔가를 사지 않고 구경만 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러던 도중, 주머니칼을 매대에 잔뜩 늘어놓고 파는 상인이 카리나의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가 날이 굉장히 잘 든 것이, 상당히 유용해 보였다.
카리나는 주머니칼을 직접 쥐어 보았다.
“마음에 드나?”
“네.”
카리나는 망설이지 않고 하나를 구매했다.
클로드가 다시 섭섭해하는 눈길로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또 아쉬워하네.’
아무래도 클로드는 이 주머니칼 역시 마음에 들어 한 듯했다.
카리나는 주머니칼을 그에게 내밀었다.
“각하께서 가지실래요?”
“아, 아니다.”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거 같아서요.”
“그게…….”
클로드가 당황하면서 머리를 살짝 쓸어넘겼다.
“그냥, 나 역시 부인이 그걸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정말 그런 이유인가요?”
“그래. 다른 이유는 전혀 없어.”
카리나는 클로드의 말을 믿어 주기로 했다.
어차피 클로드는 원한다면 이런 주머니칼 따위는 수십 개라도 가질 수 있을 터.
하나 정도는 자신이 가져도 되지 않겠는가.
카리나는 주머니칼을 품에 소중히 넣으며 화제를 돌렸다.
“참, 시찰은요?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미 끝났어.”
“네……?”
클로드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부인과 아이들이 경매에 참가하는 사이에 다녀왔어. 알아낼 건 다 알아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카리나는 자신이 경매에 참가하는 내내 클로드가 뒤에 서 있었다고 기억했지만, 그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피곤해서 시찰을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지.’
클로드가 이미 충분히 지친 상태에서 아이들을 돌봐 달라고 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에서 볼 만한 건 다 본 것 같은데…… 돌아갈까요?”
“벌써 돌아가겠다고?”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또 아쉽다는 얼굴이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이들도 피곤해하고요.”
“아.”
클로드는 이제 눈이 반쯤 감기기 시작하는 롤랜드를 바라보았다.
카리나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역시 클로드 데비아탄은 자신이 피곤하다는 사실조차 인정하기 싫어하는 성향의 남자였다.
카리나는 대놓고 하품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저도 피곤하네요. 얼른 돌아가요.”
* * *
다음 날 점심.
에이드리안이 못마땅한 얼굴로 공작저를 찾았다.
클로드 앞에서는 어느 정도 표정 관리를 했지만, 카리나에겐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부인 때문에 제가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알긴 알아요?”
“제가 뭘 곤란하게 해 드렸는데요?”
“이럴 시간에 산이나 하나라도 더 돌아다니는 게 더 낫지, 괜히 엮여서…….”
카리나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에이드리안 경을 초대한 건 각하시잖아요. 불만은 각하께 말씀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
에이드리안은 입을 꾹 다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이 같은 모양새였지만, 카리나는 그의 시선이 땅바닥의 잡초들을 훑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 사람을 붙잡을 수 있기만 하다면 좋을 텐데…….’
성격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어차피 에이드리안과 함께 일해야 할 사람은 베리티였다.
베리티 또한 성격이 만만치 않으니 에이드리안을 잘 버텨낼 것이다.
“이건 뭡니까?”
“네?”
카리나는 에이드리안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클로드에게서 훈련을 받는 훈련장이었다.
‘……?’
그녀는 어이가 없어 입술만 달싹거렸다. 에이드리안은 웬 잡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단단히 다져진 훈련장의 흙을 뚫고 올라와 제법 독하다고 생각한 잡초였다.
작고 노란 은방울꽃과 비슷하게 생겨 제법 이쁘긴 했지만, 그래도 잡초는 잡초다.
“그냥 잡초잖아요.”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확히 무슨 잡초인지는 모르겠어요. 식물학자는 에이드리안 경 아닌가요?”
“…….”
에이드리안은 그녀의 말은 들은 체 만 체 하고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잡초를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커다란 손으로 잡초를 조심스럽게 들추어보기도 했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말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