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축제에 간다고 들었다.”
“체스가 말하던가요?”
카리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체스와 클로드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친해진 모양이었다.
‘하기야, 각하께선 체스의 은인이니까.’
예상대로 클로드는 카리나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더군.”
“네. 그래서 체스가 오기로 했는데…….”
“오늘 원래 정해진 임무가 있어서. 깜박하고 부인과 약속을 잡은 모양이다. 미안하게 되었군.”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임무가 있었다면 어쩔 수 없죠. 저 혼자서 애들을 못 보는 것도 아니니 괜찮아요.”
“그, 부인.”
클로드가 묘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같이 가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카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각하께서요?”
“역시 부담스러운가.”
“아, 아뇨. 저야 감사하죠.”
카리나는 바로 수락했다.
동료가 아닌, 고용주와 함께 축제를 간다는 건 다소 부담스럽긴 해도 어쨌든 아이가 둘이었다.
조금 신세를 지는 편이 낫다.
더군다나 클로드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나야말로 고맙군. 어차피 시찰을 해야 하는데, 이목을 끄는 건 좋지 않아서.”
“축제에 시찰을 하러 가신다고요?”
“……그래.”
클로드의 대답은 느리게 돌아왔다.
“축제엔 외지인들이 모이기 마련이지.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종종 가는 편이야.”
“아…….”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방해가 될 수 없죠. 아이들은 제가 돌볼게요. 각하께선 저희에게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다녀오세요.”
“아, 부인과 아이들이 필요해. 축제를 혼자 다니는 것만큼 눈에 띄는 것도 없으니까.”
“그런가요?”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축제를 가 본 적이 없으니 클로드의 말이 대관절 맞는지 틀렸는지를 알 수 없었다.
클로드가 힘주어 말했다.
“확실해. 가끔은 수상한 자로 오인되어서 쫓겨난 적도 있다.”
카리나는 쿡쿡거리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공작이 쫓겨나다니!
분명 그 불운한 사람은 클로드의 정체를 알자마자 엉덩방아라도 찧었을 것이다.
“그렇다면야…… 도움이 된다니 기쁘네요.”
“나도 부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쁘군.”
잠시 후.
그들은 축제가 열리는 시내를 향해 출발했다.
멜리사는 체스가 아닌 클로드가 함께 간다는 소식을 듣자 굉장히 실망했지만, 롤랜드는 도리어 좋아했다.
소설 속 롤랜드와 클로드의 관계를 생각하면 상당히 염려되는 상황이었지만, 카리나는 오늘만큼은 개의치 않기로 했다.
‘어차피 5년 뒤면 북부를 떠날 거고, 아이들은 마탑에 들어갈 거야. 오늘만큼은…… 각하를 믿어보자.’
그녀는 롤랜드를 클로드 방향으로 살짝 밀었다.
“각하, 제 아들을 맡아 주세요.”
“알겠다.”
롤랜드는 바싹 긴장한 얼굴로 클로드의 손을 잡았다.
그들은 그 상태로 마차에서 내려 축제장으로 들어갔다.
카리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
시각, 청각, 후각…….
모든 게 갑작스런 자극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여기저기에서 춤을 추었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고, 뱃속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가 어디선가 풍겨와 침이 절로 입에 고였다.
카리나는 아이들에게 복숭아 파이를 하나씩 물려주고는, 자신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맛있어……!’
당연히 에두아르가 만든 빵이 더 맛있었지만, 이렇게 길거리에서 먹으니 평범한 빵도 맛이 몇 배는 더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축제장을 거니는 카리나와 일행의 눈에 산더미 같이 쌓아 놓은 장난감들이 눈에 들어왔다.
‘장난감 상인이 왔나 보네. 하나 사 줄까?’
카리나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자신이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난감 상인은 어디에도 없고, 큰 소리로 목청을 틔우는 경매꾼 주위로 구경꾼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다.
바로 장난감 경매였다.
롤랜드는 크게 관심 없어 했지만, 멜리사의 눈은 장난감 경매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싸다 싸! 단돈 1키브린부터 시작합니다! 자자, 여기 이 멋진 목마가 있습니다. 1키브린이면 완전 거저겠죠? 근데 거저일 리는…… 없겠죠?”
사람들이 너도나도 손을 들면서 외쳤다.
“2키브린!”
“3키브린!”
“아니, 5키브린!”
커다란 목마는 결국 12키브린에 어느 꼬마에게 돌아갔다.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공작저로 들어오기 이전엔 사지도 못하면서 장난감 가게만 보이면 눈이 돌아갔기 때문에 대충 시세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싸도 50키브린은 할 텐데!’
경매꾼은 능청스럽게 다음 장난감을 소개했다.
서랍이 굉장히 많은 미니어처 서랍이었다.
롤랜드나 멜리사 정도 되는 어린아이가 안고 다녀도 될 정도의 크기였지만, 끼워져 있는 서랍은 족히 20개는 넘어 보였다.
“여기 이 멋진 마법의 서랍장이 보이십니까.”
마법의 서랍이라니.
이상한 작명에 카리나의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열어 볼까요? 열어 보지 말까요?”
열어 주세요!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엽니다. 3, 2, 1, 1의 반의반, 1의 반의반의 반, 0!”
경매꾼이 서랍을 하나 골라 열자 안에 용수철로 부착되어 있는 작은 병정이 퐁 하고 튀어나왔다.
카리나의 눈에는 특이할 게 없는 장난감이었지만, 아이들은 크게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했다.
경매꾼은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귀족, 큰 지팡이를 든 마법사, 큰 낫을 든 사신, 열심히 일을 하는 대장장이 등 각종 인형들이 하나씩 튀어나왔다.
“없는 게 없는 마법의 서랍! 하지만 이것도 단돈 1키브린부터 시작한다는 말씀!”
카리나는 슬쩍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멜리사는 말할 것도 없고, 롤랜드마저도 서랍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것 하나 정도는 사 줄 수 있겠지.’
목마가 12키브린에서 멈췄다면, 저건 많아 보았자 50키브린 정도일 것이다.
“자, 1키브린! 계십니까!”
사방에서 1키브린, 2키브린 하면서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카리나도 용기를 내서 소리쳤다.
“10키브린!”
롤랜드와 멜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카리나를 올려다보았다.
카리나는 아이들을 향해 씨익 웃어주었다.
‘이 정도 사치야, 괜찮겠지.’
이미 10키브린을 넘어가는 순간 상당수의 경쟁자는 사라졌다.
장난감 경매는 싼값에 좋은 장난감을 얻어 보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15키브린.”
카리나는 의기양양하게 금액을 불렀다.
“15키브린 나왔습니다! 16키브린 없습니까? 그럼, 갈색 머리 꼬마 도련님과 아가씨에게…….”
“20키브린.”
카리나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통 크게 5키브린이나 올린 경쟁자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
카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장난감 경매의 참여자는 모두 아이거나 아이를 대동한 부모였다.
그런데 카리나의 경쟁자는 아이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머리는 새 둥지처럼 부스스했고, 지저분한 옷을 입고 있는 그는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이 장난감이 굉장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21키브린.”
“22키브린.”
“23키브린.”
어느덧 소란스럽던 사방엔 카리나와 경쟁자, 그리고 경매꾼의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금액은 카리나가 속으로 마지노선으로 생각한 50키브린까지 올라갔다.
‘미안하다, 얘들아.’
카리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만약 상대가 1키브린이라도 더 부른다면 관둘 생각이었다.
“50키브린.”
“…….”
고요한 침묵.
경매장 바깥에선 이런저런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순간만큼 경매장은 적막이 감돌았다.
잠시 후.
경매꾼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50키브린! 멋집니다! 우리 도련님과 아가씨, 멋진 어머니를 두셔서 기분 좋으시겠는데요? 여기…….”
“잠깐만!”
카리나의 경쟁자로부터 고함이 터져 나왔다.
“현금이 없어서 그래! 주인장, 지금 여관에 가서 현금을 가지고 오겠다. 아니, 내 이 자리에서 차용증을 써 줄게. 그러니…….”
경매꾼이 고개를 뻣뻣이 들고 경매의 패배자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현금이 없으면 꺼져. 그리고 얻다 대고 반말이야? 내가 네 종인 줄 알아? 술 먹었으면 가서 얌전히 잠이나 쳐 잡수쇼.”
카리나는 그들의 설전은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리며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넘겨주었다.
롤랜드와 멜리사는 얼마나 기뻤는지, 받은 그 자리에서 서랍장을 모조리 당겨보았다.
“너무…… 신기해요.”
“그렇게 신기해?”
“네. 엄마, 보세요. 코끼리랑 사슴도 있어요.”
경쟁자가 풀죽은 어깨로 그녀를 지나쳤다.
‘……?’
카리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에게서 약초 냄새가 진하게 났기 때문이었다.
카리나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손에 저건…… 풀물이네.’
옷에 묻은 얼룩 역시 풀물이었다.
자세히 보니 가방에는 식물학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장비를 이것저것 매달고 있었다.
카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베리티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가능하다면 좋은 식물학자도 구해 주세요. 필요하거든요.’
그동안 제국의 식물학자들에게 숱하게 많은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보내는 족족 퇴짜놓는 답장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그런데, 토르스에 제 발로 들어온 식물학자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