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카리나는 거실의 소파에 앉아 열심히 설계도면을 뒤적거렸다.
예상은 했지만, 온천 개발은 생각보다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카리나가 기억 속 희미한 지식들에 의지하며 민간 기술자들과 상담해야 할 정도였다.
그래 봤자,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정도였지만.
“……엄마.”
롤랜드가 조금 초조한 목소리로 카리나를 불렀다.
카리나는 서류를 넘기며 롤랜드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롤랜드?”
“있잖아요…….”
카리나는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롤랜드의 저 목소리를 알았다.
‘무언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 거야.’
평소 롤랜드나 멜리사는 카리나에게 무언가를 해달라고 청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가끔은 에두아르를 더 편하게 여기는 것 같아 섭섭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롤랜드는 아주 가끔, 무언가 원하는 게 있을 때 망설이고 망설이다 말을 꺼내곤 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다음 주 토요일에 축제가 열린대요. 시내에서요.”
“가고 싶어?”
카리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네.”
롤랜드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다들 바쁘니까……. 저랑 멜리사만이라도 가면 안 될까요?”
“이런.”
카리나는 아예 의자에서 일어서서, 롤랜드를 안아 올렸다가…….
바로 내려놓았다.
‘너무 무거워졌어.’
카리나는 다음부터 롤랜드를 들어 올릴 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입을 열었다.
“왜, 너희들끼리만 가고 싶어? 엄마 빼놓고?”
“그, 그건 아니에요!”
롤랜드가 바로 흥분하며 소리쳤다.
“그으, 엄마는…… 바쁘잖아요.”
“바쁘기는.”
카리나는 롤랜드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아무리 그래도 축제 한 번 가 볼 시간이 없진 않아.”
“진짜요?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한나절 정도 놀지도 못하고 이 종이 더미들만 들여다보고 있는 게 무리하는 거겠지?”
아무리 롤랜드가 또래에 비해 똘똘하다고 한들 성인의 논리를 당해내지는 못했다.
“그럼, 저희 같이 가는 거예요? 진짜요? 엄마랑 같이?”
롤랜드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쏟아냈다.
“그럼. 못 믿겠어?”
“아뇨!”
롤랜드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나는 웃으며 다시 서류로 고개를 돌리다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멜리사는?”
“…….”
롤랜드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설마…….’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만약 멜리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롤랜드가 자신에게 한가롭게 축제 얘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런 반응은…….
‘싸웠네.’
카리나는 걱정스럽게 롤랜드를 바라보았다.
멜리사와 롤랜드가 여태까지 싸운 건 단 한 번뿐이었다.
“롤랜드.”
“…….”
“멜리사랑 싸웠어?”
롤랜드는 잠시 눈을 도르륵 굴리며 카리나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유, 알 수 있을까?”
“……멜리사는 엄마한테 물어보지 말라고 했어요.”
“왜?”
“엄마는 많이 바쁘니까요…….”
카리나는 상황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둘은 자신에게 축제에 가도 되냐고 부탁할지 말지를 두고 싸운 것이다.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멜리사는 아직 자신에게 마음을 다 열지 못한 듯했다.
“말해 줘서 고마워, 롤랜드. 그리고 축제에 가자고 해 줘서 고맙고.”
“제가 엄마 일을 만든 건 맞잖아요.”
카리나는 롤랜드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일이라니. 휴식이지.”
“…….”
롤랜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카리나에게 부담감을 지우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카리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있잖아, 나는 여태까지 축제에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진짜요?”
“그럼, 진짜지. 그래서 정말 기대된단다.”
렝케 경의 저택 인근의 마을에는 가끔씩 축제가 열렸다.
사용인들은 그 축제에 참가해서, 이것저것 주전부리들을 먹고 각종 잡화를 사 오곤 했지만 외출 허락을 받지 못하는 카리나에겐 머나먼 세상 얘기나 다름없었다.
카리나는 멜리사에게는 따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멜리사에게 롤랜드와 싸웠냐고 하면, 롤랜드가 멜리사를 일러바친 듯한 상황이 되어 둘 모두가 상처받을 것이다.
“멜리사에겐 네가 알려 줘. 나도 같이 간다고.”
“네!”
롤랜드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장 알려 줄게요.”
카리나는 멜리사에게 달려가는 롤랜드의 뒷모습을 웃으면서 바라보았다.
‘기대된다.’
고향보다 훨씬 물자가 풍부하고 사람도 많이 사는 토르스의 축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사 달라는 건 다 사 줄 수 있어.’
가신이 된 이후, 카리나는 상당히 많은 급료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카리나가 그 돈으로 한 것이라곤 자신과 아이들의 옷을 몇 벌 산 게 전부였다.
아이들은 아스트리드가 선물한 장난감에도 충분히 만족했으며 생필품은 공작저에서 모두 조달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돈을 펑펑 쓰며 낭비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5년 뒤의 독립을 위해선 돈을 모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기껏 버는 돈을 기왕이면 아이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사용하고 싶었다.
‘기대된다…….’
카리나는 서류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이제 정말로 일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축제의 전전날이 되었다.
카리나는 최대한 일에 집중하기 위해 사무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는 축제에 가기 위해 사무실에서 열심히 일하는 거라고 말을 해 두었더니 쉽게 납득했다.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카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체스였다.
그는 인사 한번 하지 않은 채 다짜고짜 용건부터 말했다.
“모레 축제에 간다면서?”
“응. 어떻게 안 거야?”
“멜리사가 자랑하더라. 모레 축제에 부인과 함께 가기로 했다고.”
“멜리사가?”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멜리사 역시 당연히 기대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롤랜드만큼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체스에게 자랑까지 했다니 의외였다.
체스는 그녀의 의구심을 눈치챘는지 우물쭈물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 생각인데. 나도 같이 가는 건 어때?”
“너도?”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함께 축제에 가고 싶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제안이었다.
“애는 둘이잖아. 부인은 한 명이고.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아?”
“있으면 좋긴 한데…… 애들이 얌전하니까, 걱정은 안 하고 있었어.”
“부인, 축제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체스가 잔뜩 폼을 잡으며 겁을 주었다.
“애들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으음…….”
카리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축제에 가 본 적이 없으니 인파의 규모를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아이들을 봐줄 사람이 늘어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 도와준다면 나야 고맙지.”
“그럼, 약속한 거다? 축제에 같이 가기로?”
카리나는 웃었다.
“왜 웃어?”
“그야, 도움을 받는 쪽은 난데 체스 너가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당연하지. 롤랜드랑 멜리사가 얼마나 귀엽다구.”
“애들을 좋아하는구나.”
체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좋아해. 동생이 없거든. 어쨌든, 약속한 거다? 잊으면 안 돼?”
“알겠어.”
카리나는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체스는 아이들에게 축제를 보여 줄 생각에 신이 난 모양이었다.
체스는 아직 남은 업무가 있다면서 금세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마침내 축제 당일이 되었다.
아이들은 전날 설레서 잠을 못 잔 탓에, 낮잠을 재워야 했다.
‘축제가 저녁에 시작해서 다행이야.’
아이들의 밤낮이 바뀌는 게 조금 걱정이긴 했지만, 하루쯤이면 괜찮을 것이다.
카리나는 웃으며 아이들을 깨웠다.
“이 잠꾸러기들아, 일어나. 축제 보러 가야지.”
“……!”
롤랜드와 멜리사가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튀어 올랐다.
“지금 가요?”
“그럼, 얼른 옷 입어. 체스를 기다리게 하면 안 되니까.”
아이들은 서둘러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카리나까지 몸단장을 끝냈을 무렵, 초인종이 울렸다.
‘체스구나.’
카리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
카리나의 입이 벌어졌다.
체스는 어디 가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 쑥스러운 얼굴로 문간에 서 있었다.
그녀는 떨떠름하게 클로드 데비아탄을 올려다보았다.
“각하, 무슨 일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