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입양합니다 (73)화 (73/145)

<73화>

“아.”

카리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오인으로 인한 부끄러움 탓이 아니었다.

‘대단하다는 게, 나에 대한 칭찬이었구나.’

가슴 속에서 무언가 간질간질한 감정이 일었다.

카리나는 순수한 칭찬에 약했다.

별것 아닌 것으로 대단하다는 말을 들으니, 손발을 어찌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클로드의 이어진 말에 카리나는 더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부인이 조사해준 덕분에 많은 영지민들을 치료할 수 있겠어.”

“영지민들이요……?”

카리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자신은 이 온천이 기사들을 위한 유인책이라고 확실하게 밝혔다.

하지만 느닷없이 영지민이라니.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래, 영지민들을 위한 치료소.”

항상 냉정하거나 무감각하기만 하던 클로드의 목소리가 달콤한 기운을 띄었다.

“진작 발견하지 못한 게 안타까워. 그랬다면 더욱 많은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었을 텐데…….”

아.

카리나는 자신의 초라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렝케 경의 저택에서 일하던 시절엔 습진이 심하다 못해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동료 하녀들처럼 기름을 손에 열심히 발라보아도 제대로 낫지 않았다.

토르스로 온 이후, 손에 물을 묻히며 일할 필요가 없어 습진이 사라졌지만 분명 예전의 그녀처럼 습진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습진뿐만이겠는가.

뙤약볕 아래에서 일하는 농부, 소금물을 몸에 뒤집어씌우며 일하는 어부, 그리고 독성이 있는 재료를 만져야 하는 기술자들까지…….

‘왜 나는, 돈벌이나 유인책으로만 생각했을까.’

카리나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이번에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영지민들을 위한 치료소를 세운다면 당장 이득을 보기에 힘들어.’

토르스의 자산과 인력은 한정되어 있다. 만약 영지민들을 위한 치료소를 먼저 세운다면, 기사들을 위한 재활 시설은 저 멀리 밀려 버리고 말 것이다.

‘어쩌면 아예 세우지 못할 수도 있고.’

영지민들을 위한 치료소가 어디 보통 규모겠는가.

그 운영유지비 역시 막대한 돈이 투입될 게 뻔했다.

“각하, 지금 토르스에 필요한 건…….”

“기사단이지. 알고 있다.”

클로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맙다, 부인. 그냥 꿈을 잠시 꾸었을 뿐이야. 내겐 치료소를 만들 자금도 인력도 없으니…… 그저 꿈일 뿐이지.”

카리나는 안도했다.

아니, 안도해야 할 터였다.

클로드가 별다른 고집을 부리지 않고 기사들을 위한 재활 시설을 만드는 데 동의했으니까.

‘하지만, 대체 왜…….’

클로드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으니 가슴이 조여드는 걸까.

그 감정을 견딜 수가 없어 카리나는 입을 열었다.

“저어…… 재활 시설로 다진 기반과 정보로 치료소를 열면 훨씬 나을 거에요. 단지 선후의 문제니까…….”

“고맙다.”

짤막한 감사 인사에 무심코 클로드를 바라본 카리나는 숨을 삼켰다.

클로드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오직 그녀 자신만을 눈에 담고 있었다.

왜인지 그 시선이 견딜 수가 없어져서, 카리나는 베리티 솔베타인을 직접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겠다는 핑계를 대며 집무실을 나왔다.

‘……집중하자, 집중.’

카리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었다.

삿된 감정에 흔들릴 여유 따위가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베리티 솔베타인을 찾아갔다.

“노쇠하거나 회복이 어려울 정도의 기사들이라고요?”

베리티 솔베타인의 반응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도르륵 굴리더니, 허공을 쳐다보며 소리 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대충 ‘신이시여.’ 같은 말이었다.

“한 무리의 환자들을 데려다가, 새 사람으로 만들어 놓겠다니. 각하께선 꿈도 크시군요.”

“사실, 제 생각이었어요.”

카리나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부인의 생각이라고요?”

베리티는 찻잔을 엎지르고 말았다.

재킷에 갈색 찻물이 들었지만 그녀는 손으로 대충 털어냈다.

카리나는 초조하게 물었다.

“그렇게 이상한가요?”

“그건 아닙니다.”

베리티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생각 자체는 좋습니다. 아주 좋은 발상이죠. 다만…….”

베리티가 카리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부인과 어울리지 않을 뿐.”

카리나는 아주 잠시 침묵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슨 뜻이죠?”

“부인은 현실주의자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카리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현실주의라거나, 이상주의라거나.

한 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단어였다.

여태까지 그녀의 삶은 당면한 문제들을 해치우기에도 벅찼던 것이다.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나도 현실주의자라서, 잘 알거든요. 부인은 나와 같은 부류입니다. 반면…….”

베리티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의 친애하는 각하께서는 이상만을 바라보시죠.”

“그만큼 뜬구름 잡는 계획이라는 뜻이군요.”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무모하기는 했다.

아무리 온천이 귀하다고는 하나 만병통치약도 아니오, 신비의 샘물도 아니었다.

그저 치료를 돕는 효과가 있을 뿐.

기껏 시설을 만들어 놓았는데, 나이 든 기사들이 비웃기만 하고 오지를 않으면 큰일이었다.

“그러나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

카리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조금 전까지 베리티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더더욱 기뻤다.

베리티가 미소 지었다.

“저는 한때, 남부가 강성했을 때를 기억하고 있거든요.”

“7년 전이군요.”

“예.”

베리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7년 사이에 정말 많은 것들이 달라졌죠. 죽은 호랑이를 뜯어먹는 하이에나들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 카리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좋습니다. 부인의 그 계획에…… 저도 한 몸 동참해 보지요. 하지만 보수는 넉넉히 주셔야 할 겁니다.”

“그건 제가 아니라, 각하와 상의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베리티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글쎄요, 부인이 결정권자 아닙니까? 굳이 이 안건이 아니라도 말입니다.”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카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베리티는 좋은 사람이고 유능한 의사였지만 오늘 보니 농이 도가 지나칠 때가 있는 듯했다.

“부인이 그렇다면야…… 하지만 각하께 제 얘기는 해 주세요. 보수 얘기도, 꼭 부탁드립니다.”

“네, 그럴게요.”

“아참, 가능하다면 좋은 식물학자도 구해 주세요. 필요하거든요.”

“식물학자요?”

카리나는 잠시 당황하며 되물었다.

“네. 재활은 생소한 분야라……. 다른 건 어느 정도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지만, 약초는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잘못 쓰면 큰일 나거든요.”

“추천할 만한 식물학자가 있나요?”

이번에는 베리티가 한숨을 내쉴 차례였다.

“그런 사람이 토르스에 있다면, 제가 진작 말을 했을 겁니다.”

“……노력해 볼게요.”

베리티가 웃었다.

“기대할게요.”

카리나는 곧장 클로드를 찾아가 보고했다.

클로드는 베리티의 협조 소식에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카리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솔베타인 선생님은 왜 가신이 아닌가요?”

“당연히 몇 번이나 청했지.”

클로드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때마다 거절당했을 뿐.”

“아…….”

“솔베타인은 자유로운 영혼이야. 솔직히, 부인에게 협조하겠다고 나선 것부터가 놀라운데.”

“많은 보수를 원한다고 했어요.”

“그렇겠지. 다른 건?”

“식물학자가 필요하대요.”

“……어려운 걸 요구하는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학자들은 세간의 이미지와는 달리 고독한 늑대가 아니었다.

도리어 어찌나 교류를 좋아하는지, 연구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수도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수도에 사는 학자를 단기간 고용하는 방법도 있기는 하다.”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리티는 동업자를 원하는 눈치였지만, 세상일은 그렇게 쉽게 굴러가지 않은 법이다.

클로드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부인, 온천까지 안내해 줄 수 있나?”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직접 가시게요?”

“내 눈으로 보긴 해야지.”

카리나는 미소 지었다.

클로드의 이런 원칙적인 면이 싫지가 않았다.

한 시간여 뒤.

그들은 온천에 도착했다.

클로드가 말을 워낙 빨리 달린 덕이었다.

“…….”

클로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카리나는 김이 올라오는 온천을 훑어보는 그의 시선에서, 장래 지어질 재활 시설과 치료소를 읽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름답군.”

그리고 그의 중얼거림도, 유유히 흘러가는 청록빛 강과 온천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닐 것이다.

클로드는 뜨거운 물이 퐁퐁 솟아나고 있는 온천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생각보다 작군.”

“아마 이 주변 땅은 모두 온천 지대일 거예요.”

“무슨 뜻이지?”

카리나는 평범한 자갈밭처럼 보이는 지점을 가리켰다.

“그냥, 이곳을 파도 온천수가 나오고…… 저곳을 파도 나올걸요? 얼마나 깊이 파는지의 문제지.”

잠시 후.

카리나는 그 말을 한 걸 후회했다.

클로드가 곧바로 그녀의 말이 옳은지 검증해 보았던 것이다.

즉…….

“블로에 부인!”

카리나는 느닷없이 땅에서 치솟은 뜨거운 물줄기를 흠뻑 뒤집어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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