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클로드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내 여동생을 내가 걱정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인가?”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문제 될 거 없어요. 단지, 아스트리드 님이 그 말을 직접 들었더라면 좋아하실 거라는 생각은 드네요.”
클로드는 조금 머뭇거렸다.
“……아스트리드는 이게 지나친 간섭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지나친 간섭이라고요?”
카리나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이 남매는 대체 여태까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건가.
“전혀요! 아스트리드 님은 관심을 좋아해요. 아니, 각하로부터 관심을 받고 싶어 하신다고요.”
“아니, 이건, 관심이 아니라…….”
클로드가 손을 내젓더니, 할 말을 못 찾은 것처럼 허공을 잠시 노려보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두려워. 아스트리드가 내가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할까 봐.”
“…….”
카리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빠르게 대답했다.
“그런 걸 두려워하신다면 평생 아스트리드 님과 가까워질 수 없으실 거예요.”
“그런가? 그렇겠지.”
의외로, 클로드는 수긍하는 듯했다.
바로 다음 말을 하기 전까지는.
“아스트리드에게 성급히 다가서다가 상처를 입히는 게 그 무엇보다도 두려워. 언젠가는 기회가 있겠지.”
“그동안 7년이 흘렀어요, 각하. 대체 그 기회는 언제 오는 건가요?”
클로드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의 시선이 아주 잠시 동안 카리나의 얼굴에 머무르더니, 쑥스러운 듯 허공으로 비껴갔다.
“……부럽군. 부인의 그런 면이.”
“부럽다면 움직이세요.”
카리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스트리드 님께 직접 말하시라고요. 걱정했다고, 여태까지 잘 커 줘서 대견하다고…… 티파티 준비도 얼마나 열심히 하셨는지, 다 알고 계시잖아요.”
그녀는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한때, 카리나가 클로드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카리나는 클로드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 자신이 용기를 내기만 한다면, 클로드와 아스트리드 사이의 문제도 여름날 눈송이처럼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도.
“각하께선 가족 역할을 더는 제게 떠맡기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죠. 이제 그 약속을 지키실 때예요.”
클로드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부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동안 내가 너무 겁을 낸 것 같군.”
“그러실 만도 했어요.”
카리나는 클로드를 충분히 이해했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일수록 작은 관계마저 망치고 싶지 않아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이다.
클로드가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블로에 부인, 그대는 정말로…….”
“까아악!”
느닷없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카리나는 그제야 자신이 티파티 쪽엔 거의 신경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고개를 황급히 돌리니, 아수라장이 된 안뜰이 눈에 들어왔다.
귀족 영애들이 혼비백산이 되어 사방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곧바로 안뜰로 뛰쳐나가려는 클로드를 카리나가 제지했다.
“제가 가 볼게요.”
“부인, 내 여동생이다.”
“이 티파티는 아스트리드 님의 티파티예요.”
카리나는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각하께서 나타난 순간, 티파티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거고요. 이해하시겠어요?”
“…….”
“각하, 아스트리드 님에게 이 티파티가 어떤 의미인지 아시잖아요.”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 주었다.
카리나는 서둘러 안뜰로 나섰다.
별로 긴장은 되지 않았다.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것 같기도 해서였다.
‘늦봄에, 달콤한 디저트들과 함께 티파티라…….’
당연히 벌들이 꼬일 수밖에.
아스트리드는 카리나의 조언에 따라 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촘촘한 그물망을 여기저기 쳐 놓았다.
하지만 몸집이 유독 작은 벌이 있거나 그물망에 난 구멍이 있는 모양이었다.
“공녀님, 괜찮으세요?”
“부인도 피해, 벌이야!”
“어디 있는데요?”
카리나는 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두꺼운 책이라도 휘둘러서 쫓아버리면 된다.
“저, 저기……!”
카리나의 물음에 아스트리드가 손끝을 바들바들 떨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카리나의 시선이 티파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혼을 빼놓은 날벌레에 닿았다.
‘뭐야, 이거.’
헛웃음이 나왔다.
짝!
카리나는 손뼉 한 번으로 벌레를 처단한 다음, 손수건을 꺼내 손을 싹싹 닦아버렸다.
“벌을 손으로 잡았어!”
사방에서 탄성이 들려왔다.
카리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자신이 잡은 건 벌이 아닌, 꽃등에였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작은 꿀벌처럼 생겼지만, 몸통이 가늘고 길쭉하다는 점이 달랐다.
아스트리드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카리나에게 달려왔다.
“부인, 괜찮아? 그걸 손으로 잡다니 깜짝 놀랐어. 의사를 부를까?”
“괜찮아요. 사실, 이건…….”
카리나는 이건 벌이 아니라 꽃등에라고 설명하려고 했지만, 그들 주위로 몰려온 다른 귀족 영애들의 감탄에 말이 끊겨 버리고 말았다.
“벌을 손으로 잡으시다니! 너무 멋져요. 무예를 배우신 건가요?”
아스트리드보다는 카리나의 나이에 가까워 보이는 영애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역시 공녀님의 시녀는 달라요. 제 시녀는 하는 것도 없고…… 어쩜 저리 멋있을까요?”
“공녀님의 시녀만 아니어도 제 시녀로 삼고 싶을 정도예요. 아, 당연히 공녀님의 시녀쯤 되시니 보통 인물이 아니시겠지만…….”
카리나는 쏟아지는 칭찬에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설령 진짜 벌을 손으로 잡았다 하더라도 이렇게 칭찬을 받을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벌도 아니었지만.
카리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다들 과찬이시네요. 이건 벌이 아니어서…….”
“어떻게 벌이 아니라는 거죠? 저희 모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어쩜, 이렇게 겸손하실 수가.”
카리나를 질문의 도가니에서 구해 준 건 아스트리드였다.
“여러분, 블로에 부인은 제 시녀가 아니에요.”
“시녀가 아니라고요? 하지만 하녀가 공작저에서 상복을 입을 수는 없을 텐데…….”
“당연히 하녀도 아니죠. 블로에 부인은 공작가의 가신이에요.”
“……!”
귀족 영애들의 눈들이 일제히 휘둥그레졌다.
카리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슬쩍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중요한 다기가 깨지거나 엎질러지지는 않아, 티파티는 계속될 수 있을 듯했다.
‘그래도 바깥에서 계속하는 건 어렵겠지.’
카리나는 아스트리드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스트리드 님, 경황이 없으시겠지만……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라고 전할까요?”
“아니야, 내가 할게.”
아스트리드는 평정을 되찾은 듯, 다른 귀족 영애들에게 제안했다.
“여러분, 갈수록 벌이 더 꼬일 것 같으니 응접실에서 계속할까요? 다들 먼 길 오셨는데, 이렇게 끝나는 것도 아쉽잖아요.”
귀족 영애들은 모두 작게 손뼉을 치며 긍정을 표했다.
카리나는 서둘러 응접실로 돌아갔다. 클로드가 무엇을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다들 여기로 자리를 옮긴대요. 이제 어른들은 자리를 비켜 줄 시간이겠죠?”
클로드는 그녀와 함께 응접실을 천천히 떠났다.
“벌 잡는 모습, 잘 보았다.”
카리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건 벌도 아니었어요. 꽃등에라고, 모양만 비슷하게 생긴 날벌레예요. 다들 벌레에 대해선 잘 모르다 보니까…….”
“진짜 벌이었다면 어쩔 뻔했나.”
“그럼 방석이라도 휘둘러서 쫓아내야죠. 보니까 다들 제법 두툼한 방석을 깔고 앉았더라고요.”
“그러다가 쏘일 수도 있을 텐데…… 너무 위험해.”
카리나는 피식 웃었다.
이 남자는 자신을 온실 속의 화초로 보는 게 분명했다.
“저는 독사도 나뭇가지로 걷어봤어요. 그에 비하면 벌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죠.”
클로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독사든 벌이든, 나를 불러라.”
“어떻게 하시게요?”
“칼로 죽여 버리면 되니까.”
“……살벌하시네요.”
“부인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카리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아무리 빈말이라도 듣기 좋은 말이었다.
“제가 더 열심히 배워야겠어요.”
그들은 어느덧 복도를 한참 동안 걷고 있었다.
카리나는 클로드와 대화하는 게 생각보다 즐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다 보니, 공작저의 처음 보는 공간까지 와 버린 것이다.
“어…… 여기가 어디죠?”
클로드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아, 나도 모르게 내 집무실로 걷고 있었군. 부인은 이만 돌아가야겠어. 길을 찾지 못하겠다면 별채까지 데려다주겠다.”
“제 사무실로 가는 길이기도 한데…… 몰랐네요.”
카리나는 조금 씁쓸해졌다.
똑같은 가신인데, 체스는 저렇게 바쁜 반면 자신은 호화로운 사무실마저 비워 두고 있다.
클로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인, 내가 왜 부인에게는 아무런 임무도 내리지 않는지 궁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