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무슨 일이길래…….”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안드레아가 황급히 카리나를 현관으로 이끌었다.
“티파티는 언제 시작하죠?”
“두 시간쯤 남았습니다.”
“아직 넉넉하네요.”
안드레아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카리나를 잠시 쳐다보았다.
“한 시간쯤 뒤면 손님들이 도착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공녀님께서 접대하셔야 하니, 한 시간 남은 거나 마찬가지죠.”
“아스트리드 님께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요?”
“…….”
안드레아는 말없이 발걸음만 재촉하더니, 어렵게 입을 떼었다.
“아스트리드 님께서 많이 불안해하십니다.”
“당연히 불안하시겠죠. 아스트리드 님께서 처음으로 주최하는 티파티 아닌가요?”
“선대 공작 부부께서 돌아가신 후 처음입니다. 공작저에서 파티라는 게 열린 건.”
“……!”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이제야 아스트리드가 다소 무리하다시피 티파티를 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도자기가 중요한 게 아니었어.’
귀족가의 파티는 단순히 먹고 즐기는 자리가 아닌, 사교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일종의 스킬이었다.
그래서 사교 활동이란 일절 하지 않은 렝케 경조차 투덜거리며 고위 귀족의 파티에 참석하곤 했다.
아스트리드가 어려서 파티를 열 수가 없다면, 클로드라도 파티를 주최했어야 했다.
하지만 클로드는 밀려오는 일을 처리하는 데만 급급했을 터이니 당연히 파티를 열 여유가 없었을 테고.
“비록 미혼 영애들만 모이는 약식이라고 하나, 이번 티파티가 실패하면 공작가의 체면이 손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상당히 호기로우시던데요.”
“공녀님께서는 보기보다 여린 분입니다. 그리고…….”
안드레아는 잠시 뜸을 들였다.
“부인을 많이 의지하고 계십니다. 아마, 부인이 생각하고 계시는 수준보다 훨씬 더.”
“…….”
카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스트리드는 그 신분을 떠나 사랑스러운 아이였지만, 자신에게는 이미 롤랜드와 멜리사가 있었다.
안드레아가 기대하고 있는 듯한 아스트리드의 유모 역할을 떠맡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아스트리드가 직면한 듯한 문제를 못 본 체하겠다는 건 아니었다.
카리나는 도움을 요청하는 열두 살짜리 소녀를 외면할 만큼 매정하지는 않았으니까.
잠시 후, 그들은 티파티가 열리는 정원에 가까운 응접실에 도착했다.
안드레아에 따르면 곧 손님들이 도착할 응접실이었다.
‘……!’
연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아스트리드는 한 떨기 붓꽃처럼 아름다웠다.
물론, 카리나가 놀란 이유는 전혀 다른 데 있었다.
아스트리드의 얼굴은 희게 질렸고, 이마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녀는 무릎 위에 두 손을 주먹 쥔 채 올려놓고는 불안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블로에 부인!”
카리나를 발견한 아스트리드가 반가워하며 그녀를 불렀다.
“아스트리드 님.”
카리나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아스트리드를 불렀다.
동시에 그녀는 아스트리드를 흥분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서서히 다가갔다.
“무슨 일이신가요?”
아스트리드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앙다물렸다.
“나…….”
아스트리드는 숨을 들이켜며 드레스 자락을 꽉 붙들었다.
값비싼 옷감이 구깃구깃해졌지만 방 안의 누구도 그 사실에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아스트리드의 상태에 정신을 집중할 뿐이었다.
아스트리드의 작은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못해. 못할 것 같아……. 내가 다 망쳐 버리면 어떻게 해?”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예상했어야 했는데.’
이 티파티의 가장 큰 걸림돌은 아스트리드가 아무런 경험이 없다는 점이 아니었다.
아스트리드의 완벽해지고자 하는 성정은 그녀 자신이 완벽한 공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불안감에서 기인했다.
그 불안감은 평소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때때로 순식간에 부풀어 올라 아스트리드를 집어삼켰다.
바로 지금처럼.
“나, 다 알아. 아직도 나를 까마귀라고 흉보는 가문들이 있다는 거. 거르고 걸렀는데…… 그래도 그중에 있으면 어떻게 해?”
안드레아가 황급히 대답했다.
“공녀님, 제 목숨을 걸고 약속드릴게요. 그런 가문은 없을 겁니다. 다들 제가 수소문해서…….”
“욕하라고 하세요.”
카리나는 안드레아의 구구절절한 설득을 단호하게 끊어버렸다.
“……?”
아스트리드와 안드레아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부인, 그게 무슨 말이야?”
“아스트리드 님이 아무리 노력하셔도 다 걸러내지는 못할 거예요. 당연히 오늘 티파티가 끝나고 나서, 까마귀 공녀가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흉볼 영애도 있을 거고요.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요?”
“하, 하지만…….”
“남들이 뒤에서 뭐라고 말하든 간에, 아스트리드 님이 이 토르스의 공녀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아요.”
“하지만 난, 각하의 친여동생이 아니…….”
“그래서요?”
“진짜 여동생이 아니잖아, 나는.”
아스트리드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아시다시피 제 아이들도 제가 낳은 애들이 아니에요. 전 부인의 자식들이죠. 그래서 롤랜드와 멜리사가, 제 진짜 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하시나요? 아스트리드 님은?”
“…….”
카리나는 힘주어 말을 이었다.
“롤랜드와 멜리사는 제 진짜 자식이에요. 아스트리드 님도 공작 각하의 진짜 여동생이고요.”
아스트리드가 물기 어린 눈으로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미안하기는요.”
카리나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자, 여기 손수건 있으니 눈물 닦고 코 푸시고……. 곧 손님들이 도착하잖아요. 아스트리드 님의 티파티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아스트리드 님이 맡으셔야죠.”
카리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자신은 적당히 사라져 줄 때였다.
“블로에 부인, 어디 가?”
“다른 영애님들이 도착하시기 전에 나가려고요.”
“…….”
아스트리드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카리나는 허리를 굽혀 아스트리드의 어깨를 토닥여 주다가,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이깟 티파티, 망해도 돼요. 그러니까 너무 부담감은 가지지 마세요. 아시겠죠?”
“…….”
만약 아스트리드의 상황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카리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가장 중요한 건 아스트리드의 어깨에서 저 막대한 부담감을 덜어주는 것이었다.
효과는 있는 듯했다.
아스트리드의 잔뜩 긴장한 어깨가 서서히 힘이 풀리기 시작했으니까.
카리나가 안심하고 자리를 떠나려 할 때였다.
“……카리나.”
아스트리드가 간절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티파티에 같이 있어 주면 안 돼?”
“…….”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아주 잠깐 침묵이 흐른 이후, 아스트리드가 황급히 사과했다.
“미안해. 이런 거, 카리나가 싫어하는 거 알고 있는데……. 그냥, 그냥…….”
“아스트리드 님.”
카리나가 아스트리드의 말을 끊었다.
“제가 티파티에 참여할 순 없어요. 그 순간, 아스트리드 님께서 이 티파티를 여신 이유가 모두 퇴색되고 말 테니까요.”
하나하나가 맞는 말이었기에, 아스트리드의 입술이 꼭 맞다물렸다.
“그렇다고 제가 아스트리드 님의 시녀나 하녀로 가장하여 옆에 서 있는 것도 우스울 거고요.”
“그런 건 생각하지도 않았어!”
아스트리드가 다소 흥분하며 소리쳤다.
카리나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요. 저도 공녀님이 그럴 분이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어요.”
“……역시, 방법이 없네.”
카리나는 아스트리드의 손을 잡았다. 롤랜드나 멜리사의 손보다는 훨씬 컸지만, 성인의 손보다는 확연히 작고 연약했다.
“제가 아스트리드 님의 바로 곁에 있어야 안심이 되는 건 아니시죠?”
“무슨…… 얘기야?”
“티파티는 바로 이 옆, 안뜰에서 열린다면서요.”
“맞아.”
“그럼 여기 창문으로 다 보이겠네요?”
“……!”
아스트리드의 눈이 커졌다.
“제가 여기 이 창문으로 보고 있을게요.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은…… 제가 바로 달려갈게요. 이제 좀 안심이 되시나요?”
사실, 카리나는 자신이 달려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봤다.
티파티에서 일이 일어나 봤자 얼마나 일어나겠는가.
단순히 아스트리드를 안심시키기 위한 방책이었다.
사람은 절대 쓰일 리 없는 안전장치에 위안을 얻는 법이었으니까.
“……응.”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도 효과가 있는 듯했다.
아스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 부인. 흉한 꼴을 보였어. 그래도…… 진짜 고마워. 덕분에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아스트리드 님은 잘 해내실 거예요. 그리고 기억나시죠? 제가 아까 한 말.”
카리나는 조금 전 안드레아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인, 망해도 괜찮다는 말을 암시했다.
아스트리드가 푸스스 웃었다.
“물론이지.”
한 시간쯤 후, 카리나는 다시 응접실로 돌아갔다.
이미 아스트리드와 귀족 영애들은 모두 안뜰로 나가 티파티를 시작했다는 점을 확인하고 나서였다.
카리나는 응접실의 편안한 소파에 너부러졌다.
‘피곤해…….’
하루에 하는 일이 얼마 없는데도 왜 이렇게 피곤한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마력 훈련이 생각보다 기력을 많이 잡아먹는 것 같아.’
확실히 어쩌다 클로드가 바빠서, 훈련을 하지 못하는 날이면 힘이 남아돌았다.
그녀는 소파에 편안한 자세로 드러누워 창문 밖을 응시했다.
아스트리드가 조금 긴장한 듯한 얼굴로 귀족 영애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아스트리드가 초대한 영애들은 모두 제시간에 도착했으니, 응접실을 청소하러 온 하녀인 듯했다.
카리나는 하녀가 제법 놀랐을 테니, 안심시켜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부인?”
카리나의 눈에 들어온 건, 그녀 못지않게 놀란 클로드 데비아탄이었다. 카리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떠듬떠듬 물었다.
“여…… 여기는 왜 오신 건가요?”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군. 부인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스트리드 님이 걱정되어서요.”
실은 그 반대였지만, 카리나는 일부러 자신이 아스트리드가 걱정되어서 오지랖을 부린 척했다.
클로드의 시선에 극도로 긴장하는 아스트리드를 위한 작은 배려였다.
“…….”
클로드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카리나는 의아해하며 그를 살피다가, 그답지 않게 붉어진 귀를 보고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조금 놀라움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각하께서도 저와 비슷한 이유로 오신 거군요.”
“…….”
다시 침묵.
카리나는 쿡쿡거리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맞네요, 그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