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그럴게요.”
어차피 노엘의 말이 아니더라도 체스의 상황이 안정되고 나면 아이들의 교육을 부탁할 생각이었지만, 직접 들으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아스트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무슨 일 있어?”
“지금 나갈게요, 아스트리드 님!”
카리나는 황급히 달려 나갔다.
노엘 버케인은 그들을 현관까지 따라 나가며 배웅했다.
카리나는 그의 얼굴이 조금 전, 처음 보았을 때와 비교해 훨씬 밝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스트리드가 준 기회는 그렇게나 컸던 것이다.
“왜 늦었어?”
아스트리드가 카리나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중얼거렸다.
“어…….”
카리나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아스트리드가 섭섭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스트리드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됐어, 부인에게도 따로 인사를 하려던 거지? 다 알아.”
“이런, 들켰네요.”
“내가 그런 걸로 마음 상할 줄 아는 거야? 나도 다 컸다구. 당연히 부인의 공이 지대하니, 부인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겠지.”
아스트리드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보다, 나는 도자기가 너무 기대돼. 앞으로 또 얼마나 더 굉장한 것들을 만들어낼까?”
“공녀님께서 보시기엔, 노엘 버케인의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최고야.”
아스트리드가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참 신기한 일이지. 만약 누군가의 도제였다면, 이미 그 공방이 이름을 날리고 있을 거야. 하지만 취미로 도자기를 굽는 부잣집 도련님이라서, 아직 무명이었던 거고.”
아스트리드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덧붙였다.
“두고 봐. 딱 한 달만 있으면, 부인도 의심하지 못할 정도의 작품들을 내놓을 테니까.”
아스트리드의 예언은 정확했다.
노엘 버케인은 채 보름이 지나기도 전에 카리나처럼 아무런 조예가 없는 사람의 눈에도 굉장해 보이는 다기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체스 역시 가신 생활에 빠르게 적응해, 초기와는 달리 카리나를 찾아와 노닥일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형이 저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어. 다 부인 덕이야.”
“부담스러우니까, 아스트리드 님 덕이라고 하지?”
“부인이 공녀님과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면, 형이 그런 기회를 얻지도 못했겠지?”
“그거야 그렇긴 한데…… 너무 끼워 맞추기 아니야?”
“아, 들켰나?”
체스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화제를 바꾸었다.
“부인의 부탁 말이야, 생각해 보았는데…….”
카리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체스에게 조심스럽게 아이들의 교육을 부탁한 지 어느덧 일주일.
그동안 체스는 개인적으로 꽤나 고심한 듯했다.
“내가 많이 부족할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겠어?”
“괜찮아.”
카리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롤랜드와 멜리사는 몰래몰래 마법을 쓰고 있어. 그것보단 누구라도 잡아 주는 게 나아.”
“알았어. 최선을 다해 볼게.”
체스의 임무는 불규칙적이었기 때문에, 카리나는 아이들의 일정을 체스의 일정에 맞추기로 했다.
체스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짬이 날 거야. 부인의 아이들이 얼마나 빨리 배우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정도만 해도 자기 마법을 자제할 정도의 실력은 갖추니까…….”
카리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고 보니, 체스는 한 번도 롤랜드나 멜리사가 마법을 쓰는 모습을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인, 왜 웃어?”
카리나는 손을 내저었지만, 목소리엔 아직도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체스가 툴툴거렸다.
“깜박했어. 부인도 엄마였지.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귀엽다고…….”
“내기해도 좋아. 그 고슴도치 새끼들이 얼마나 귀여운지 알면, 깜짝 놀랄걸?”
체스가 무어라 대답하려는 순간, 벨이 울렸다.
아스트리드였다.
카리나는 조금 당황했다.
최근 아스트리드는 노엘 버케인의 공방에 신경을 쏟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아스트리드 님, 어서 오세요.”
아아스트리드는 인사조차 생략하고 카리나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봐봐.”
카리나는 상자를 열어보았다.
겉면에서 돌고래가 뛰어놀고, 아몬드꽃이 아름답게 피어난 찻잔과 찻주전자가 눈에 들어왔다.
카리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자신이 선물로 받은 다기만 해도 충분히 아름다웠는데, 노엘 버케인의 새로운 작품은 그보다 훨씬 뛰어나게 느껴졌다.
“완벽하지?”
아스트리드가 카리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노엘 버케인은 남부의 자랑이 될 거야. 그리고 남부는 예전처럼 예술가들의 고장이 될 거고…….”
아스트리드는 카리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노엘 버케인을 제국에서 제일가는 장인으로 만들 거야.”
“어, 어떻게요?”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한 카리나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제국에서 제일가는 장인이라니?
당장 노엘 버케인의 도자기가 남부에서만이라도 팔리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토르스에게 큰 상단이 있는 것도 아니니 판로가 많은 것도 아니다.
아스트리드는 뭘 그런 걸 묻냐는 듯한 목소리로 단언했다.
“당연히, 이 다기들을 사용한 티파티를 열어야지!”
“……네?”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티파티는 약식이라곤 하나 정식으로 귀족 가에 초대장을 보내는 파티였다.
아직 어린 아스트리드가 열기에는 다소 까다로울 것이다.
카리나는 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려다가 생각을 접었다.
아스트리드는 한 번 마음 먹은 건 꼭 해내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직속 시녀인 안드레아의 말도 듣지 않은데, 자신의 말은 오죽할까.
‘뭐, 어차피 또래 귀족 영애들을 부르는 정도일 텐데 별일 없겠지.’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카리나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티파티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아스트리드가 그간 받아온 광범위한 교육엔 사교계에서의 처신도 포함되어 있는 듯했다.
아스트리드는 항상 테라이스 양과 함께 준비하곤 했으니까.
그 탓에 테라이스 양이 롤랜드와 멜리사의 교육을 좀 미루어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안 그래도 체스에게서 마법 교육을 받을 시간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부인, 부인의 아이들은 천재야.”
첫 수업을 마친 체스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카리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뭐랬어.”
“이러다가 애들한테 내가 따라잡힐까 봐 겁이 날 정도인데…… 특히, 롤랜드가 대단해. 정말로.”
체스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마력의 운용은 나보다 더 잘하는 것 같아. 아니, 이미 더 잘해. 내가 보기엔 타고났어.”
카리나는 체스의 칭찬을 잠자코 듣기만 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있잖아,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뭔데?”
“각하께는…… 비밀로 해줘. 애들이 어떤지. 만에 하나 물으시면 대충 둘러대 줘. 평범하다고.”
체스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왜?”
카리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당연히 진실은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가 아이들을 공작의 인재욕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각하는 물론 좋은 분이시지. 하지만, 나는 롤랜드와 멜리사만큼은 자신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삶 말이야.”
“…….”
체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카리나는 황급히 말을 이었다.
“물론 우리 생활에 불만이 있다는 건 아니고…… 그냥, 애들에겐 선택의 자유를 주고 싶어. 지금은 너무 어리잖아. 뭐가 될지 결정하기에는.”
“……부인은 좋은 보호자구나.”
마침내, 체스의 대답이 들려왔다.
카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체스가 희미하게 웃었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부인의 애들이 설령 대마법사라 한들 각하께 알리지 않을 테니까.”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저…… 내게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는 부모님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을 뿐이야.”
“…….”
이번엔 카리나의 말문이 막힐 차례였다. 그녀 또한 체스처럼 자신을 생각해 주지 않은 부모 밑에서 자라났으니까.
체스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볼게. 오후 네 시에 또 임무가 있어서.”
그가 나가기가 무섭게, 아이들이 카리나를 향해 달려왔다.
보아하니 체스가 가고 나서 둘이서 마법을 쓰며 노느라 늦게 창고에서 나온 듯했다.
“엄마, 이거 봐요!”
“이것두 봐줘요!”
아이들은 카리나에게 오늘 체스에게서 배운 듯한 마법을 보여주었다.
‘어……?’
카리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체스가 첫 수업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친 건,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종류의 마법이었다.
“얘들아, 그건…….”
롤랜드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방어 마법이에요!”
렝케 경은 아이들에게 방어 마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방어 마법을 가르친다면, 그의 공격에서 몸을 보호할 수단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생에 읽은 소설 속에서는 롤랜드가 상당히 성장할 때까지도 방어 마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롤랜드는 상당 시간을 고생해야 했다.
‘점점 바뀌어 가고 있는 거야. 롤랜드의 미래가.’
하지만 카리나는 여기에서 만족할 수가 없었다.
‘롤랜드와 멜리사는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거야.’
그걸 위해서라면, 카리나는 그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 * *
시간은 흐르고 흘러 마침내 티파티가 열리기로 한 날이 되었다.
하지만 카리나에게는 다른 날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날일 뿐이었다.
그녀는 평소대로 아이들을 챙기고, 클로드와 훈련하고, 수업에서 돌아온 아이들과 놀아 주었다.
귀족 영애들의 티파티는 그녀가 알 바가 아니었다.
적어도 아스트리드의 시녀, 안드레아가 숨을 헐떡이며 별채로 뛰어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무, 무슨 일이세요?”
안드레아가 평소와 다르게 흐트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녀님께서…… 부인을 모시고 와 달라고 하셨습니다.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