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정말인가요?”
카리나는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분명, 체스는 자신의 형이 인신매매 업자에게 넘어가기 전 취미로 만들던 것들이라고 했다.
만약 노엘 버케인의 실력이 아스트리드의 말대로 뛰어나다면 인신매매 업자들은 그의 재능을 착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스트리드는 자신의 안목을 확신하는 듯했다.
“정말 아름답잖아. 유명한 장인들보단 좀 과감한 솜씨긴 한데, 그게 또 매력이야.”
아스트리드는 찻잔을 집어 들고는 햇살에 비춰보았다.
민트색 바탕에 그려진 분홍색 살구꽃이 영롱하게 빛났다.
“그 형의 이름이 뭔데? 왜 아직까지 내가 몰랐지?”
“노엘 버케인인데, 취미로 만들던 거래요. 그래서 아스트리드 님이 모르실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이게 취미로 만든 도자기라고?”
아스트리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럴 리 없어. 이건 제대로 배운 사람의 솜씨야.”
“마음에 드시면 다른 도자기들도 있는지 체스에게 물어볼까요?”
아스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됐어, 내가 노엘 버케인을 직접 찾아가 볼게.”
“……!”
카리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스트리드는 카리나의 아이들만큼이나 체스를 싫어했다.
그런데 그의 형인 노엘 버케인을 직접 찾아가 보기까지 하겠다니.
이 찻잔 세트가 예쁘긴 하지만, 그 정도 가치가 있다고는 믿기 힘들었다.
“블로에 부인은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를 못하는구나.”
“네.”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자기는 도자기일 뿐이다.
만약 아스트리드가 노엘 버케인의 도자기가 마음에 들었다면 돈을 주고 작업물을 사 오면 된다.
하지만 노엘 버케인을 직접 만난다면 얘기가 많이 달라진다.
아스트리드는 토르스의 공녀.
그녀가 노엘을 직접 만난다는 건, 단순히 구매 이상의 무언가를 시사했다.
잠시 망설이던 아스트리드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돌아가신 선대 공작 각하께서는 예술에 조예가 깊으셨어. 아무것도 몰랐던 내게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 주셨지. 도자기도 그중 하나였어.”
카리나는 그제야 아스트리드가 왜 그렇게까지 도자기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스트리드에게 도자기는, 더 나아가 예술은 죽은 양부가 남긴 지적 유산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 꿈은 내 손으로 장인을 발굴하는 거였어. 이게 옛날 작품이라고 하니까 지금 실력은 도리어 퇴화했을 수도 있겠지만…… 한번 만나보고 싶어.”
“바로 체스에게 연락하겠어요.”
카리나의 단호한 말에, 아스트리드가 방긋 웃었다.
“블로에 부인, 이거 알아? 나 부인이 진짜 좋아. 진짜로.”
“그것참 놀랍네요. 왜냐하면 저도 공녀님이 진짜 좋거든요.”
“진짜?”
“그럼요.”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까르르 웃었다.
그때, 에두아르가 레모네이드 4잔을 가지고 들어왔다.
“다들 잘 드시는 것 같아서, 전부 새로 만들어 왔습니다!”
롤랜드와 멜리사는 얼마나 기뻤는지, 거의 에두아르를 껴안을 기세로 달려가고는 행복하게 레모네이드를 쭉쭉 빨아먹었다.
아스트리드 역시 레모네이드를 우아하게 홀짝였다.
입가에 은은히 번지는 미소를 보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카리나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체스에게 전달할 편지를 썼다.
잠시 후, 카리나는 종을 울려 사용인을 불렀다.
“체스 버케인 씨의 거처로…….”
잠깐.
카리나는 말을 멈추었다.
체스가 가신이 되고 나서 옮긴 거처에서, 형과 함께 산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굳이 체스에게 먼저 물을 필요도 없지.’
“노엘 버케인 씨에게 편한 시간을 말씀해 주시면 거처로 찾아가겠다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하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별채를 나섰다.
그가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꼭 뵙고 싶었다고, 바로 와 달라고 하시던데요?”
“……!”
아스트리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잠시 후.
그들은 체스와 노엘의 거처에 도착했다.
노엘 버케인은 현관까지 나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카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노엘 버케인의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은 체스와 꼭 닮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피골이 상접한 몸과 간혹 덜덜 떨리는 다리는 그가 겪은 일들이 얼마나 고되고 가혹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이런 꼴로 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요.”
카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귀하신 분들이니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하고 싶은데…… 안도 꼴이 말이 아니라서.”
노엘이 쓰게 말했다.
카리나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노엘의 몸에선 시시각각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집안의 물건들을 쓰러트리길 일쑤일 것이다.
그 추측을 증명하듯, 노엘의 옷에는 온갖 얼룩들이 묻어 있었다.
‘잠깐, 저건…….’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노엘의 손은 온통 잉크투성이였다.
‘아직 작업을 하고 있는 거야!’
도자기를 만들려면 가마가 필요하다. 상주하는 장인이 없는 공작저에 있을 리가 없으니, 아마 도안만 그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동생은 아침 일찍 숙소를 나갔습니다.”
“실은, 제가 아니라…… 공녀님이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공녀님이요……?”
노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스트리드가 노엘 버케인만큼이나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블로에 부인에게 선물로 보낸 도자기를 봤어. 취미로 만들었다기엔 굉장한 솜씨던데, 대체 누구에게 배운 거지?”
“독학했습니다.”
아스트리드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독학? 하지만 가마를 쓰려면 공방의 도제로 들어가야…….”
노엘이 쓰게 대답했다.
“제 입으로 말하기 좀 뭣 하지만, 예전엔 저희 집이 좀 살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런 호화로운 취미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야? 독학이라고?”
“네. 공녀님께서 마음에 드셨다니 기쁘네요. 보잘것없지만 다른 것들도 있으니, 가져가셔도…….”
“지금 들어가서 봐도 돼?”
노엘은 어린 공녀의 활기에 당황한 듯했다.
“그, 영 엉망이라…… 눈만 더럽히실 텐데요.”
“상관없어.”
“……들어오십시오.”
노엘은 내키지 않은 얼굴로 그들을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
카리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엘 버케인의 방에는 도자기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 도안이야.’
카리나와 아스트리드의 눈이 정신없이 돌아갔다.
노엘 버케인은 단순히 책상 위에 흰 도화지를 올려놓고 얌전히 그림을 그리는 부류가 아니었다.
책상과 침대는 물론이고 벽면과 천장까지 그가 직접 도안을 그려놓은 도화지들을 붙여놓아 어딜 보든 눈이 즐거웠다.
카리나는 도자기를 잘 알지 못했지만, 도안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아름답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겹치는 도안이 하나도 없이, 하나하나가 특색 있고 새로워 노엘 버케인의 재능이 심상치 않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카리나는 아스트리드의 눈이 정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엘 버케인은 정말로, 천재였다.
그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
“동생이 마음껏 그리라며 종이를 사다 주더군요. 제가 필요가 없다고 말했는데도…….”
“체스는 좋은 동생이네요.”
“그럼요. 하나뿐인 가족인걸요.”
두 형제의 아버지는 분명 살아 있었다.
하지만 렝케 경이 카리나에게 그랬듯, 그들에게도 가족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일 것이다.
열심히 도안을 구경하던 아스트리드가 물었다.
“다른 도자기들은 어디 있지?”
“예전에 만들던 것들은 다 상자 속에 따로따로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는 상자들이 빼곡히 놓여 있는 방구석으로 그들을 데려갔다.
“아……!”
아스트리드가 작게 감탄을 내질렀다. 카리나는 자신이 선물받은 도자기가 가장 예쁜 것 같다고는 생각했지만, 이 방의 도자기들 역시 하나하나가 영롱하게 아름다웠다.
“용케 뺏기지 않고 간직하고 계셨네요.”
체스에 따르면, 사채업자들은 집과 땅을 포함해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모두 가져갔다.
이렇게 아름다운 도자기들이라면 빼앗겨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체스가 다 보관하고 있었어요. 아마 다들 이것들이 가치 없는 쓰레기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노엘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왜 이게 가치가 전혀 없죠?”
“누군가의 도제로 들어간 적 한번 없이, 겨우 취미로 만들던 도자기를 누가 사겠습니까?”
“그래도 이렇게 예쁜데…….”
“버케인의 말이 맞아.”
아스트리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무도 이름 없는 도자기를 사려고 하지 않지. 나도 그랬고. 하지만…….”
아스트리드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마치, 과거의 어떤 일을 떠올리려는 것처럼.
“나는 이름값에 구애받지 않고 예술품을 보는 법을 배웠어.”
그녀는 노엘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노엘은 숨을 들이켰다.
작고 어린 공녀에게서, 폭발적인 위압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겠어. 이것 모두.”
“……!”
노엘의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했다.
“공녀님, 감히 공녀님께서 값을 치러 주실 만한 도자기가 아닙니다. 만약 마음에 드신다면 그냥 가져가십시오. 저희 형제는 공작가에 큰 은혜를 입…….”
“은혜를 입었다는 게, 물건의 값을 치르지 않고 가져가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
아스트리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 값을 받아.”
“…….”
노엘은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덜덜 떨며 가격을 말하려고 했다.
“그, 그렇다면 한 세트당…….”
“감히 내게 가격을 제시하려고?”
아스트리드는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다 살 건데, 세트당 가격을 따지는 것도 우습네. 모두 합해서 1만 키브린에 사 겠어.”
“……!”
놀란 건 노엘뿐만이 아니었다.
카리나 역시 기절할 듯이 놀랐다.
아스트리드가 당당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 돈으로 공방을 빌리고 도와줄 사람을 고용하는 조건이야.”
“분,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노엘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수그렸다.
“토르스엔 실력은 그저 그렇지만 제대로 된 가마를 둔 공방은 제법 있거든. 리스트를 보내줄 테니 직접 가 보고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그저…… 황송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스트리드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자기에 남부의 상징을 넣어.”
“예?”
“아몬드꽃과 돌고래가 남부의 상징이지. 그걸 주제로 한 도자기들을 만들어. 내가 다 살 테니까.”
“아……!”
노엘이 알겠다는 듯한 탄성을 내뱉었다.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했으리라고 믿어.”
“믿어 주십시오.”
아스트리드는 더는 노엘 버케인에게 볼 일이 없다는 듯 우아하게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카리나는 그녀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노엘 버케인이 그녀를 불렀다.
“블로에 부인.”
“네?”
노엘은 잠시 머뭇거렸다.
“……감사합니다.”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는걸요. 공녀님이 우연히 보시고 마음에 들어서 찾아오신 거예요.”
“그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노엘이 고개를 저었다.
“동생에게서 들었습니다. 각하께서 움직이신 건, 부인 덕분이라고요.”
“…….”
카리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실제로 움직인 건 클로드인 상황에서 감사 인사를 받는 것도 민망한 상황이었다.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부인께서도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꼭 저나 동생에게 말씀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