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입양합니다 (63)화 (63/145)

<63화>

롤랜드와 멜리사가 각자 소리를 내지르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엄마, 여기예요! 여기!”

“여기!”

카리나는 정신없이 헝클어진 머리칼을 하나로 묶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공터를 가로질러 그녀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봐주려면 못 봐줄 것도 없지만…….’

카리나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러면 재미가 없지.’

그녀는 아이들을 향해 있는 힘껏 뛰어갔다.

“엄마아!”

멜리사가 먼저 카리나의 손에 들어왔다.

카리나는 멜리사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항복할 테냐?”

“안 해요! 안 해!”

“이래도?”

카리나는 멜리사의 양쪽 겨드랑이에 간지럼을 태웠다.

“으햐햐햐!”

멜리사의 꺄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잔디밭에 울려 퍼졌다.

그때, 카리나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스쳤다.

“블로에 부인?”

카리나는 멜리사를 놓아주고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체스가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쓰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보다 더 어리게 노는데, 의외야.”

뜨끔해진 카리나는 체스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내가 내 아이들과 같이 놀겠다는데, 불만 있어?”

“아니, 전혀. 보기 좋아.”

체스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카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 자신은 체스 버케인에게 아무리 놀림을 받더라도 그를 결코 미워할 수 없을 것이다.

불과 며칠 전, 형을 구해내고 공작저로 돌아온 체스는 그녀를 끌어안고 인사부터 했다.

그 뒤에는 굉장히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클로드가 서 있었다.

카리나는 기쁨의 눈물로 온통 엉망이 된 체스의 얼굴에서 일이 모두 잘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후 일어난 일은 그녀의 상상을 초월했다.

베온헴 일가는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토르스 밖으로 쫓겨났으며, 인신매매에 관여한 자들은 모두 이마에 낙인이 찍혔다.

그들은 제국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평생 길바닥을 떠돌아다녀야 할 것이다.

“근데, 이 상자는 뭐야?”

“역시 주인이 제 물건을 알아보는구만.”

체스가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그는 상자를 반강제로 카리나에게 넘겨주었다.

‘……?’

제법 무게감이 느껴지는 상자였다.

“이게 뭔데?”

“형이 전해 달랬어. 예전에 취미로 만든 것 중에 하나래.”

“형이?”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체스의 형, 노엘 버케인에 대해선 이름만 전해 들었을 뿐이다.

“왜 각하가 아니고 내게?”

“부인의 역할이 컸잖아.”

체스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부인이 아니었으면, 난 진작 죽은 목숨이었지. 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베온헴 집안을 무너뜨릴 정보를 쥐여다 준 것도 사실상 부인이고.”

“그건…… 그렇네.”

카리나는 굳이 겸손하게 굴지 않았다. 체스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체스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그럼 난 이만.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무슨 일?”

체스가 기다렸다는 듯 투덜거렸다.

“당연히 각하께서 시키는 이런저런 일들이지. 요새 바빠 죽겠다니까.”

“…….”

카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은 체스 버케인보다 일찍 가신이 되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여전히 그녀에게 훈련만 시킬 뿐, 여타 다른 임무는 내려주지 않았다.

클로드가 원래 정말로 가신으로 삼고 싶어 했던 쪽은 자신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퍽 이상한 상황이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카리나는 굳이 골치 아픈 일에 대해선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만약 자신이 체스처럼 바빠진다면, 아이들과 지금처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없을 것이다.

체스와 간단한 인사말을 나누고 헤어진 카리나는 아이들과 함께 상자를 열어보았다.

“……!”

“우와……!”

“예쁘다…….”

카리나와 아이들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흘러나왔다.

상자 안에는 형태 자체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찻잔 세트가 들어 있었다.

카리나와 아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바로 무늬였다.

비록 금박, 은박처럼 값나가는 재료는 전혀 쓰지 않았지만, 은은하게 빛나는 파스텔색 채색만으로도 화사하게 느껴졌다.

“얼른 들여다 놓아야겠다. 깨지면 안 되니까.”

롤랜드가 칭얼거렸다.

“저, 목말라요.”

“에두아르 씨가 얼음을 준비해 두셨을 거야.”

카리나가 숨을 헥헥거리는 아이들과 함께 황급히 별채 안으로 들어섰다.

에두아르는 그들을 위해 얼음보다 더 반가운 걸 준비해 놓았다.

바로 얼음을 섞은 음료수 세 잔이었다.

“이거, 뭐예요?”

“일단 마셔 보렴.”

롤랜드가 목이 많이 타는 모양인지 음료수를 가장 먼저 벌컥 들이켰다.

“……!”

롤랜드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순식간에 음료수를 모두 마셔버렸다.

롤랜드는 아쉬운 표정으로 얼음을 빨아먹었다.

“너무 맛있어요!”

“그렇지?”

카리나는 웃으면서 음료 한 모금을 홀짝였다.

‘……!’

신선한 레몬즙과 달달한 설탕이 입안에서 뒤섞여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자칫하면 텁텁할 수 있는 조합을, 톡 쏘는 탄산이 완성해 주었다.

“맛있어요…….”

카리나 역시 홀린 듯 음료수를 모두 마셔 버렸다.

멜리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때, 누군가가 활짝 열린 문간에 발을 들였다.

“블로에 부인!”

아스트리드였다.

카리나는 서둘러 아스트리드를 맞이하기 위해 현관으로 나갔다.

“어서 오세요, 공녀님. 근데 그건 뭔가요?”

아스트리드가 품에 무언가를 소중하게 껴안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카리나의 말에 대답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민망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에두아르가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공녀님을 위한 레모네이드도 만들어 오겠습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다음에야 아스트리드는 수줍게 품에 든 커다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 무거운 걸 왜 여기까지……?’

의문도 잠시, 아스트리드가 가방을 열심히 뒤적이며 입을 열었다.

“부인에게 줄 선물이 있어.”

카리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노엘에 이어 아스트리드까지 선물을 주다니, 아무래도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인 모양이었다.

“짜잔……!”

아스트리드가 카리나를 향해 무언가를 자랑스레 내밀었다.

카리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스트리드의 손에 들린 건 종이 한 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평범한 종이가 아니었다.

카리나가 입은 옷보다 더 재질이 좋아 보이는 종이에는, 색색의 물감으로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나랑, 아이들이야.’

의자에 우아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카리나와, 카리나를 껴안은 롤랜드와 멜리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보통이라면 실물보다 그림이 못할 텐데, 이 그림의 경우 특히 카리나가 실물보다 훨씬 예쁘게 그려져 절로 웃음이 나왔다.

웬만한 초상화 화가 못지않은 솜씨였으나, 당연히 카리나는 초상화 화가에게 자신과 아이들의 그림을 맡긴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 그림을 그렸을 만한 사람은…….

카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스트리드가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두 손을 꼭 모은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스트리드 님, 정말 고마워요. 누군가가 저희를 그려준 게 처음이라서……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정말? 마음에 들어?”

아스트리드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요. 얘들아, 이것 보렴. 아스트리드 님이 나랑 너희들을 그려 주셨어.”

그렇지 않아도 궁금한 모양이었는지 둘 주변을 기웃거리던 아이들은 당장 카리나에게로 달려왔다.

“와아!”

롤랜드가 환호성을 질렀다.

“진짜 같아요!”

“그렇지?”

멜리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자꾸만 종이를 매만지려 하는 걸 보니 마음에 든 게 틀림없었다.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놔둬야겠네요. 2층 어디에 안 쓰는 액자가 있던 것 같은데…….”

2층으로 올라가려던 카리나를 아스트리드가 붙들었다.

“저어, 부인.”

“네?”

“실은…… 액자도 가져왔어.”

아스트리드는 수줍게 액자를 꺼냈다. 고급 목재를 우아한 문양으로 가공한 액자는 척 보기에는 값비싸 보였다.

그제야 카리나는 아스트리드가 왜 이렇게 커다란 가방을 낑낑거리며 들고 왔는지 알게 되었다.

“처음부터 액자에 그림을 넣어 주셨어도 되었을 텐데요.”

아스트리드가 뾰로통한 얼굴로 입술을 내밀었다.

“부인의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잖아. 그럼 액자까지 가져왔으면…… 굉장히 부끄러웠을 거야.”

카리나는 미소지었다.

“이런 선물이 마음에 안 들 리가 없죠.”

“…….”

아스트리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새빨개진 귀가 그녀의 속마음을 알려 주었다.

“얼, 얼른 넣고 걸어 놓을게!”

아스트리드는 액자에 그림을 넣은 다음에, 거실에서 가장 큰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어? 이게 뭐야?”

카리나는 그제야 노엘의 선물을 상자째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스트리드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체스가 전달해 준 상자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내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부인이 주문한 거야? 어디서? 나도 주문할래! 아, 혹시 시내에서 산 거야? 혹은 선물?”

카리나는 아스트리드가 이렇게나 흥분한 걸 처음 보았다.

그녀는 조금 당황하며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

“선물로 받았어요. 체스 버케인의 형이 만든 거래요.”

“……말도 안 돼.”

“뭐가요?”

아스트리드는 아직도 모르겠냐는 투로 외쳤다.

“이 사람, 수도의 웬만한 도자기 장인들보다 훨씬 뛰어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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