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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입양합니다 (62)화 (62/145)

<62화>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이안 베온헴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끝났군요. 각하의 능력에 그저 감복할 뿐입니다.”

“어떻게, 그걸…….”

해밀턴이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클로드는 두 사람의 연기에 속지 않았다.

‘아니, 아비 쪽은 연기가 아닐지도 모르지. 하나 아들은…….’

확실히 이안 베온헴은 아직 희망을 품고 있었다.

‘블로에 부인이 알아낸 정보에 허점이 있어.’

분명 블로에 부인의 정보는 정확했고, 해밀턴 베온헴에게는 큰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동시엔 이안 베온헴에게는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클로드는 빠르게 해결책을 찾았다.

“내 가신을 해치려 한 데다, 가주도 아닌 그 아들과 말을 나눌 필요는 없겠지. 체스, 이자를 구속해라.”

“네!”

체스는 무척이나 즐거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는 잠시 정신을 집중해 이안 베온헴을 마법으로 칭칭 묶어 버렸다.

입도 틀어막아 버린 건 덤이었다.

해밀턴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애원했다.

“각하, 제 아들이 한 짓에 대해선 입이 몇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제발, 이렇게 사죄드립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목숨만?”

클로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네는 아들이 평생을 이렇게 구속당해도 숨만 붙어 있다면 상관이 없다는 건가?”

“아, 아닙니다! 하지만…….”

해밀턴은 연신 굽실거렸다.

“제 아들놈이 잘못했는데, 어찌 감히 보신을 바라겠습니까. 단지 각하의 자비를 청할 뿐입니다.”

“자비라.”

클로드가 코웃음을 쳤다.

“참으로 내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군, 베온헴. 만약 내게 원하는 게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성의를 보여주어야 할 테다.”

“각, 각하께서 원하시는 게 있다면 당연히 그 무엇이든 내놓겠습니다!”

“…….”

클로드는 잠시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이안 베온헴이 불안한 눈길로 클로드를 바라보며 신음했다.

하지만 이제 체스에 의해 돌돌 감긴 반미라 상태가 된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방안에 아무도 없었다.

“베온헴 일가 전원의 명단 정도면 충분하겠는데.”

“명…… 명단 말입니까?”

해밀턴 베온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되물었다.

“정말 그것만 있으면 됩니까?”

“그래. 이미 죽은 사람과, 다른 가문과 결혼한 딸, 그리고 개명한 사람을 모조리 포함한 명단.”

그제야 해밀턴 베온헴은 클로드가 왜 명단을 요구했는지 깨달은 듯,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럼, 이 명단에 있는 이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흠…….”

클로드가 턱을 매만졌다.

“내가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겠지. 내 생각엔, 자네처럼 덕이 높고 일가를 생각하는 가주라면 이들 모두의 목숨과 자유의 보장을 원할 것 같은데.”

“예, 그렇습니다!”

해밀턴은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명단을 넘겨준다면 그들 모두의 목숨은 물론, 자유까지도 보장해 주지.”

“……!”

해밀턴이 감격에 겨워 시뻘게진 눈으로 책상을 황급히 뒤집기 시작했다. 그는 책상에 달린 비밀 장치를 여러 개 제거하고, 비밀 금고의 자물쇠를 푼 다음 시꺼먼 표지의 책을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안이 반항하며 몸을 뒤틀었다.

“우…… 우읍……!”

그는 무어라 크게 소리치려 했지만 마법으로 꽉 틀어막힌 입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신음 소리뿐이었다.

클로드는 만족스러워하며 해밀턴에게서 명부를 건네받았다.

“고맙다, 해밀턴 베온헴. 약속대로 네 아들을 포함한 전 일가의 목숨과 자유는 보장해 주겠다.”

해밀턴 베온헴은 눈물을 질질 흘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각하, 감사합니다…….”

클로드는 일이 모두 끝났음에도 체스에게 이안 베온헴을 풀어주라고 명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를 구속한 마법이 하루는 더 지속되리라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그들은 해밀턴이 일러준 인신매매 피해자들이 잡혀 있는 장소로 출발했다.

체스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클로드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군.”

만약 평소의 클로드였더라면 체스의 속내가 어찌하든 그냥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리나 블로에의 말에 의하면 체스 버케인은 그의 유용한 말이 될 수도 있는 존재였고, 그는 그녀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각하께서야 저런 자들이 잘 먹고 잘살아도 상관없으시겠지만, 저처럼 비천하고 멍청한 놈이야 다르니까요.”

클로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최소한, 멍청한 건 맞는 듯하군.’

하지만 그는 체스 버케인을 탓하는 대신, 그의 계획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었다.

그는 두꺼운 책을 흔들었다.

“이 명부에 있는 자들은, 오늘부로 토르스에서 영원히 추방이다.”

“……!”

체스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환희에 차 흔들렸다.

“그리고 죄의 무게가 중한 자들은 이마에 낙인을 찍어야지. 사람을 사고팔려고 한 죄인은 어딜 가나 환영받을 수 없게 해야 하니까.”

“하지만, 목숨과 자유를 보장하신다고…… 아.”

체스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

“자유롭지. 토르스 밖으로 나가기만 한다면 말이다. 토르스 바깥에서야 무슨 짓을 하고 살든 내가 알 바 아니다.”

클로드는 잠시 뜸을 들인 후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과연 이마에 낙인이 찍힌 상태로도 여기서와 같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지는 궁금하긴 하다만…….”

“제가 멍청했군요. 멍청이였어요.”

체스가 자조하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엔 기쁨의 기색이 깃들어 있었다.

“부당 이득으로 쌓아 올린 재산 환수는 너무나 당연해서 언급하지도 않았다. 마침 치체스터 경이 정비가 필요하다며 귀찮게 굴던 항구가 있는데, 돈이 생겨서 다행이군.”

“…….”

다시금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불만 가득한 침묵이 아닌, 기쁨과 환희에 찬 침묵이었다.

어느덧 그들은 인신매매 피해자들이 감금된 수용소에 도착했다.

체스는 한달음에 수용소로 달려가다, 그만 경비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쥐새끼지?”

“…….”

체스는 대답 대신 눈을 부라리며, 경비의 몸을 으스러뜨리기 위해 마력을 한 손에 모았다.

“그만.”

조금 늦게 도착한 클로드가 서늘하게 입을 열었다.

모든 신경을 체스에게 집중하느라 클로드를 쳐다보지도 못한 경비가 큰소리로 외쳤다.

“네놈은 뭐냐? 신분을 밝혀라!”

“클로드 데비아탄 토르스.”

“……!”

경비가 힘없이 손을 늘어뜨렸다.

그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눈으로 클로드를 바라보더니, 이내 정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벌벌 떨기 시작했다.

“각, 각하…….”

“안내해라. 내 영지민들이 다 어디에 갇혀 있는 거지?”

경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들을 순순히 안내했다.

무려 공작의 명령이니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경비는 쇠사슬로 칭칭 묶인 창고 앞에 발을 멈춰 섰다.

“풀어라.”

“저, 제겐…… 열쇠가 없습니다.”

“그래?”

클로드는 체스를 향해 손짓했다.

자물쇠를 날려 버리라는 뜻이었다.

다음 순간.

굉음과 함께 문 전체가 폭발했다.

“자물쇠만 날려 버리라고 했을…….”

클로드의 핀잔은 체스의 귀에 닿지 않았다.

그는 한달음에 창고 안으로 들어가, 정신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외치며 찾았다.

“노엘! 어딨어? 나야, 체스!”

클로드는 천천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제대로 씻지 못한 자들에게서 느껴지는 체취가 훅 풍겨왔다.

그는 시야에 담기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주시했다.

온종일 고된 육체노동에 시달렸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그를 향해 멍한 시선을 보내오는 자들은 불법적인 약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

클로드가 영지의 운영과 황실에서 보내오는 마정석의 관리에 급급하던 동안, 그를 믿고 따랐을 영지민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추락해 있었다.

‘그동안 뭘 해 온 거냐, 클로드 데비아탄.’

클로드는 자조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체스가 큰소리로 외친 건.

“노엘……!”

클로드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이동했다.

체스가 눈물 반, 웃음 반인 얼굴로 그와 비슷하게 생긴, 하지만 훨씬 마르고 유약하게 생긴 남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클로드는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형을 찾은 모양이군.”

“…….”

체스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클로드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 서린 감정에, 순간 클로드의 말문이 턱 하니 막혔다.

다음 순간.

체스 버케인은 더러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공작 각하, 저는 보잘것없으며 불충한 죄인에 불과하니 가신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체스는 거의 울먹이는 투였으나,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엔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기회를 주신다면 진심을 다해 각하께 진 빚을 갚겠습니다.”

“…….”

클로드는 가만히 체스 버케인을 내려다보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갓 성년식을 치른 듯한 이 앳된 청년을 죽이려고 했다.

체스 버케인이 악인이라고 확신하면서.

하지만, 오늘 그는 느끼고 말았다.

버케인 형제의 비극은 그의 무력함이 불러일으킨 나비효과라는 것을.

클로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어나라, 체스 버케인.”

“…….”

“앞으로 바빠질 거다. 가신으로서 할 일은 차고 넘치니.”

클로드의 담담한 대답에 체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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