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클로드 데비아탄이 베온헴 저택에 도착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저택 인근의 담벼락에 말을 멈춘 다음 단숨에 뛰어내렸다.
“그렇게 숨어서 따라올 것 없다.”
체스가 머쓱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차피 네 위치는 항상 알 수 있는데, 왜 나를 미행하는 척하는 거지?”
체스가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각하께서 저를 대놓고 공격하실 경우를 대비해서 거리를 두고 따라온 건데요?”
클로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버르장머리없는 마법사는 자신을 무슨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쯤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딱히 해명을 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기에, 클로드는 말머리를 돌렸다.
“블로에 부인은?”
체스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굳이 따라오고 싶지 않다던데요.”
“…….”
클로드는 말없이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 복잡한 감정이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분명, 카리나 블로에가 그를 따라오지 않은 건 현명한 판단이었다.
카리나는 타오르는 불처럼 숨길 수 없는 무모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체스를 따라왔더라면 그녀를 신경 쓰느라 제대로 일에 집중하지 못했을 것이다.
클로드는 그녀가 용수철처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어 나갈 때마다 감탄하곤 했지만, 동시에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니 뭐니 해도 카리나 블로에는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자신의 소중한 가신이었으니까.
하지만, 왜…….
‘이렇게 섭섭한 거지?’
클로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자신은 카리나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듯했다.
이렇게 도움이 되지 않는 자리까지 나와 주기를 기대하다니, 주군으로서도 좋은 자세가 아니었다.
클로드는 자기반성을 하면서 저택의 담벼락을 반쯤 둘러 걸은 다음, 한 지점에 멈춰서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의 의도를 알아챈 체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불법 침입 아닌가요?”
“내게 불법이 어딨나?”
클로드는 태연하게 말하며 담을 순식간에 기어오르더니, 가뿐히 뛰어넘었다.
‘역시, 여긴 사람이 없군.’
담을 둘러 걸으면서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지점을 찾았다.
클로드가 뛰어내린 지점은 예상대로 아무도 오지 않을 듯한 텅 빈 공간이었다.
곧이어 체스가 가볍게 담을 뛰어넘었다.
“대문으로 간다 해도 각하껜 바로 문을 열 텐데……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대비할 시간을 주게 되겠지. 보기보다 멍청하군.”
클로드는 체스의 불만을 단 한 마디로 일축했다.
“베온헴 집안의 가주는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
“알고 있군. 안내해라.”
체스는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앞장섰다.
‘역시.’
클로드는 체스 버케인과 그 가족들에 대해서 조사를 꾸준히 해 왔다.
체스 버케인의 아버지는 상당한 자산가였으나, 도박에 중독되어 버린 탓에 그 많던 부를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막대한 빚까지 지게 되었다.
그 빚 때문에 체스 역시 베온헴 저택에 종종 끌려왔다고 한다.
그러니 구조 역시 제법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들키지 않고 들어가는 걸 원하시죠?”
“잘 아는군.”
체스는 사용인이 주로 사용하는 출입구로 클로드를 안내했다.
사용인들은 그들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사용인 출입구는 베온헴 일가에 들락날락하는 수상쩍은 손님들이 사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들은 순식간에 가주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도록.”
클로드는 체스에게 당부한 다음, 굳은 얼굴로 힘주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
반쯤 졸고 있던 베온헴의 가주, 해밀턴 베온헴이 의자에서 솟구치듯 일어섰다.
해밀턴 베온헴은 마치 거대한 설치류를 연상케 하는 풍채 좋은 남자였는데, 클로드를 발견하자마자 비굴한 눈빛의 눈동자를 연신 굴렸다.
“공작 각하!”
“해밀턴 베온헴, 오랜만이군.”
“소, 소인의 이름을 기억해주시다니 그저 감읍할 뿐입니다. 한데 여긴 무슨 일로…….”
“네 아들과 관련된 일이다.”
클로드가 냉정하게 말했다.
“제…… 아들 녀석 말입니까?”
해밀턴의 눈이 튀어나올 듯했다.
“그래, 이안 베온헴. 지금 집에 있나?”
“그것이…… 고놈이 참 저희 집안의 골칫덩어리라,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겠습죠.”
“그래?”
클로드는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그렇다면 내 직권으로 처벌해야 할 텐데, 정말 괜찮겠나?”
“……!”
해밀턴이 두 손을 부여잡았다.
“무슨…… 무슨 일입니까!”
“이안 베온헴은 내 가신을 해치려고 했다. 증거는 이미 수집되어 경비대에 넘어간 상태지. 내가 직접 온 이유는, 자네가 경비대에 뇌물을 주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
해밀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기 시작했다.
“각하, 오, 오해가 있을 겁니다.”
“글쎄다. 내 가신이 피해자이자 증인인지라…….”
클로드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 가신을 해치려 한 건 그 어떤 방법으로도 용서받기 힘든 죄라는 걸 모르진 않겠지. 그런 죄인을 숨기려 하는 건 더더욱…….”
“제, 제 아들놈을 당장 부르겠습니다!”
해밀턴이 손을 덜덜 떨더니, 이내 하인을 불러 이안 베온헴을 불러오라고 명했다.
클로드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기실, 그의 추측에 따르면 이안 베온헴은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안 베온헴은 단 몇 분 만에 사무실에 나타났다.
아버지와는 달리 호감을 주는 듯한 외모였으나, 약삭빠른 듯한 인상은 지우지 못했다.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공작 각하.”
“그래.”
클로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체스 버케인.”
“……!”
그 이름을 들은 해밀턴과 이안 베온헴의 눈이 밖으로 튀어나오다 못해 허공에 걸렸다.
“들어와라.”
체스가 당당하게 사무실로 걸어들어왔다.
클로드는 이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듣자 하니 자네가 어제, 체스 버케인과 함께 있던 내 가신을 해치려 했다더군. 여기 있는 체스 버케인이 그 증인이다.”
“이안……!”
해밀턴이 이를 으득 아물었다.
“각하, 정말 사죄드립니다. 각하의 가신께도 사죄드립니다. 제 아들이 철이 없어서 골려 주려다 하다 보니…….”
“숙녀에게 수면제를 먹이려 든 게 철이 없어서 할 만한 짓인가?”
“…….”
해밀턴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이안, 뭐라도 말해 보거라!”
하지만 이안은 멍하니 허공만 응시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클로드는 참을성을 가지고 그를 기다려주었다.
마침내, 이안의 입에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가만히 있으세요, 아버지.”
“무슨…….”
“모르시겠어요? 각하의 가신이라는 분은, 그냥 핑계에 불과해요. 각하께선 다른 무언가를 원하시는 거죠. 그리고 그건 여기 있는 이…… 젊은 버케인과 관련이 있을 거고요.”
솔직히 말해서, 클로드는 정말로 놀랐다.
이안 베온헴은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통찰력을 갖추고 있었다.
해밀턴은 그제야 깨달은 듯 체스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체스, 네 형 때문에 이러는 것이냐? 당장이라도 돌려주겠다!”
체스는 해밀턴을 노려보았다.
“형의 상태가 어떤지, 알고나 하는 말입니까?”
“알지! 응, 알고만!”
“제가 마지막으로 형을 보았을 때, 형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습니다.”
“그, 그거야…… 중독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치료하면…….”
“중독?”
클로드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해밀턴의 말을 끊었다.
“그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
“듣자 하니, 분명 내 영지에선 용납되지 않은 듯한 일 같군. 가령, 금지된 약이라든가.”
“각, 각하……. 그것이…….”
“조용히 있으세요, 아버지.”
이안 베온헴이 눈을 부라리더니, 클로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의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무례로는 느껴지지 않는다만,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이안 베온헴이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현재 공작의 가신을 해치려 했다는 의혹을 제기받은 사람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은 태도였다.
“각하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저희 가문은 기꺼이 내어드리겠습니다.”
하.
클로드는 헛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이렇게 나오겠다면…… 나도 방법이 있지.’
그는 이제 겨우 스물을 몇 해 넘기지 않은 듯한 청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베온헴 일가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숨길 생각은 하지 마라.”
“허억……!”
옆에서 해밀턴이 놀라며 숨을 들이켰지만, 그 아들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하지만 클로드는 이안 베온헴의 손가락이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저희 일가가 대관절 무슨 짓을 하였다는 말입니까?”
“사기도박, 불법 사채, 인신매매……. 토르스를 좀먹는 이 모든 것들에 이름을 바꾼 자네 일족들이 주도적으로 관여하고 있지. 이래도 모른 척을 할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