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잠시 후.
술집 밖으로 나온 카리나는 신선한 공기를 만끽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곳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살 것만 같았다.
그들이 마차를 잡기 위해 공용 마차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는 거리로 걸어갈 때였다.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로에 부인.”
카리나는 그저 가만히 발을 멈춰 섰을 뿐이었지만, 체스는 기겁하며 숨을 들이켰다.
클로드가 어스름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냉랭한 시선이, 심기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카리나가 놀란 건 그 사실에서가 아니었다.
클로드 데비아탄은 그녀가 여태까지 본 그 어떤 모습보다도 흐트러져 있었다.
외투도 입지 않은 데다, 심지어 셔츠의 단추도 미처 다 채우지도 못해 목 부근이 풀려 있는 상태였다.
가만 보니 머리도 반쯤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여기서 뭘 하는 건가?”
바싹 긴장하는 체스와 달리, 카리나는 전혀 떨지 않았다.
“조사 중이었어요.”
카리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클로드에게 숨겨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정보와 증거를 수집했으니 사실 그대로 털어놓을 일만 남았다.
“조사?”
클로드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안 베온헴에 대해?”
“네.”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도박장에 잠입을 해서는 안 되니까요. 그래서 이안 베온헴을 직접 찾아갔어요.”
“…….”
클로드의 시선이 카리나에게 그대로 꽂혔다.
카리나는 그 시선을 회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냈다.
“뭔가 알아낸 건?”
카리나는 축축한 손수건을 들어 올렸다.
“이안 베온헴이 제게 건넨 술에 무언가를 탄 것 같았어요.”
클로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는 부인이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면서 함정 수사를 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잘못 본 모양이군.”
“오, 당연히 알아낸 것도 많죠.”
카리나는 경쾌하게 대답했다.
옆에서 체스의 의아해하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베온헴 도박장과 연계된 사채업자와 인신매매 업자…… 모두 베온헴 집안 출신들이에요.”
“부인, 그걸 어떻게…….”
카리나는 눈치 없게 끼어드는 체스의 발을 꽉 밟아 주었다.
다행히 체스는 신음을 속으로 삼키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고, 더는 아무런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뵙고 보고를 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마주치게 되었다니 행운이네요.”
“나도 함께 돌아가도록 하지.”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클로드는 분명 어딘가를 황급히 가는 모양새였다.
“급한 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저희는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카리나는 조심스레 권유했다.
둘만으로도 충분히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었고, 클로드가 번거로워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
클로드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부인은 내가 왜 이 꼴로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정말 모르는 건가?”
“……네?”
카리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제가…… 어떻게 알지요?”
여전히 어리둥절한 상태의 그녀와는 반대로, 체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신음 소리를 냈다.
클로드가 코웃음을 쳤다.
“드디어 체스 버케인이 자기 위치를 내가 항상 알 수 있다는 점을 알아차린 모양이군.”
“……아악!”
체스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대체 내가 왜 그랬지?”
카리나가 얼굴을 찡그렸다.
“나한테 그 마법을 썼던 사람이 할 소리야?”
“…….”
체스는 할 말이 없어졌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클로드가 설명했다.
“당연히 체스 버케인이 어디 있는지야 계속 알고 있었지. 수상한 거리로 가더라도 혼자인 줄 알고,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다.”
클로드가 지그시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가신을 그리로 데리고 간 건…….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제가 체스에게 부탁했어요. 데려고 가 달라고.”
“부인은 내가 그리 못 미더운 건가? 잠시도 조사를 기다려주지 못할 만큼?”
“네. 각하께서 저를 못 미더워하시는 것처럼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가신 중에선 이안 베온헴을 조사할 만한 사람도 없잖아요.”
카리나는 답답한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각하, 저는 각하의 가신입니다. 저 역시 각하와 같은 목표를 공유하고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닌가요?”
“…….”
“물론 각하께서 도박장에는 잠입하지 말라고 명하셨으니, 그 명에는 따랐어요. 미리…… 보고를 하지 못한 점은 죄송합니다.”
카리나의 말소리는 뒤로 갈수록 작아졌다.
자신이 무려 공작에게 대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탓이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래, 부인의 말이 틀리진 않다.”
“……!”
카리나의 초록색 눈에 안도감이 서렸다.
“하지만, 다음부턴 미리 보고부터 하도록. 그대가 내 가신이라는 건, 내게 보고할 의무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알겠습니다.”
카리나는 자신이 미리 보고했다면 클로드가 허락을 해 주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공손하게 대답했다.
돌아가는 길엔 침묵만이 흘렀다.
클로드가 대놓고 심기 불편한 티를 내기도 했기도 했지만, 정작 클로드와 체스 사이에서 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카리나가 이안 베온헴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던 게 컸다.
마침내 공작저에 도착한 카리나가 별채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이 카리나에게 달려들었다.
카리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얘들아, 진정해. 금방 돌아온다고 했지?”
“늦었잖아요!”
“늦었기는. 저녁 먹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엄청, 엄청 늦은 거 맞는데…….”
멜리사가 칭얼거렸다.
카리나는 멜리사를 꽉 끌어안으며 에두아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딘가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마세요. 각하께서 제게 화내지는 않으셨으니까. 설령 화내셨다고 해도, 에두아르 씨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요.”
“……각하께서 부인에게 알려주셨나 보군요. 제가 말씀드렸다고.”
“아뇨.”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체스와 함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에두아르 씨뿐이었으니까요. 그리 어려운 추리도 아니었어요.”
“……이거 참, 들켰군요.”
에두아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숨기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 제가 먼저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각하께서 찾아오셔서 하도 닦달을 하는 통에…… 별일은 없으셨죠?”
“별일은 없었어요.”
카리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하지만 각하께선 화가 좀 나신 것 같았어요. 역시 보고를 하지 않아서겠죠?”
“그건 아닐 겁니다.”
에두아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보다…… 부인께서 체스 버케인과 함께 다녔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요.”
“체스와요?”
카리나의 목소리가 놀라움에 겨워 높아졌다.
‘아직도 체스를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봐.’
무리도 아니었다.
당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리나에게 표식을 입히고 공작저에 침입한 사람이 아닌가.
‘어쩔 수 없어.’
카리나는 체스를 위해 할 만큼 했다. 그가 클로드의 신임을 얻어내는 건, 그 자신이 노력해야 할 문제지 카리나가 나설 문제는 아니었다.
‘일단은 이안 베온헴을 무너뜨리는 데 집중해야 해.’
생각에 잠긴 카리나의 오른손을 멜리사가 잡아당겼다.
“엄마, 엄마.”
“응?”
카리나가 허리를 숙이자, 멜리사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저, 오늘 양치도 하고 세수도 했어요. 그러니까 이야기해 줘요.”
“그럴게.”
카리나는 싱긋이 웃었다.
“저도 들을래요!”
“당연히 롤랜드도 들어야지.”
롤랜드의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 * *
다음 날 저녁.
클로드가 체스와 카리나를 집무실로 불렀다.
손수건에서 짜낸 액체엔 정말로 강력한 수면제가 들어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 탓이었다.
체스가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내가 마실 것까지 기대하지는 않았을 거야. 부인이 마시면 내가 부인을 내버리고 가지 못할 테니까…… 손을 쓰려고 했겠지.”
“…….”
피가 식었다.
카리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고, 이안 베온헴의 목적이 단순히 그들을 골리려는 정도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차라리 목적이 돈이라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안 베온헴은 아무런 이득이 없이 카리나와 체스를 해치려고 했다.
‘롤랜드가 이런 자에게 농락당할 뻔했다니…….’
미리 이안 베온헴을 해치울 수 있게 된 건 정말로 행운이었다.
클로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울러, 부인이 말한 베온헴 일가의 혐의점에 대해서도 내 나름대로 조사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찾을 수가 없더군.”
“당연히 서류로는 찾기 어렵죠. 하지만 집을 수색하면 당연히 증거들이 나올 거예요. 당장 인신매매만 하더라도…….”
“아무리 영주라 하더라도 영지민의 집을 멋대로 수색할 수는 없다.”
클로드가 냉정하게 카리나의 말을 끊었다.
“네, 그자들의 집을 털지 않는 다음에야 증거는 없어요. 그래서…… 제 말을 전혀 믿지 않으시는 거군요.”
의연하게 굴려고 했음에도 마지막 말은 긴장과 허탈감, 그리고 그 싹을 틔우기 시작한 절망감으로 살짝 떨렸다.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못 믿겠다. 부인이라면 믿을 수 있겠나? 하나…….”
클로드는 카리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가신에게 수면제를 먹이려 한 놈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지.”
그는 종을 울려 시종을 불렀다.
“당장 말을 준비해라.”
눈치 빠른 시종은 방 안의 분위기를 살피고는 되물었다.
“세 마리를 대기시켜 놓을까요?”
“아니, 한 마리만.”
클로드의 새파란 눈이 매섭게 빛났다.
“나 혼자면 충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