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카리나는 항상 입던 상복을 벗고, 체스가 준 평범한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이안 베온헴이 거의 매일 저녁 들리는 술집에 갈 예정인데, 상복을 입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카리나는 아이들을 불렀다.
“좀 나갔다 올게. 잘 있을 수 있지, 그렇지?”
“엄마, 어디 가요?”
롤랜드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그냥, 일이 좀 있어서.”
“오늘 밤에는 오는 거죠?”
“그럼.”
카리나는 아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힘주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내가 너희들을 놔두고 멀리 갈 리가 없잖아. 그러니 에두아르 씨 말 잘 들어야 한다?”
“네…….”
롤랜드는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멜리사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진짜, 가요?”
“이런, 멜리사.”
카리나는 멜리사를 안아주었다.
“잠시야. 평소에도 잠시는 나갔다 오곤 했잖아?”
“밤에는 늘 함께 있었잖아요.”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올게. 그렇다고 나 기다린다고 안 자면 안 된다?”
“치이…….”
멜리사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모습에 가슴이 아렸지만 그렇다고 항상 아이들을 끼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카리나는 에두아르를 향해 돌아섰다.
“잠시 시내에 나갔다 올게요. 아이들 좀 잘 부탁드려요.”
“그거야 어려울 것 없죠. 그런데 혼자 가시는 겁니까?”
“아뇨. 체스와 함께 가요.”
“체스요?”
에두아르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 마법사 말하는 겁니까?”
“네.”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두아르는 조금 기가 막힌다는 듯 카리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부인께서는 참 마음이 넓으시군요.”
“칭찬 감사합니다만, 이번엔 체스가 제 부탁을 들어주는 거라서요.”
“어디로 가는지는 알려 주시지 않을 겁니까?”
“말했잖아요. 시내라고. 금방 돌아올게요.”
카리나는 가볍게 둘러댔지만, 에두아르는 영 그녀의 말을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밤이 늦어도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당장 각하께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이런, 정말 일찍 돌아올게요.”
카리나는 서둘러 별채를 나섰다.
어느덧 체스와 약속한 시각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약속 장소에 나가 보니 체스가 부루퉁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늦었네?”
“에두아르 씨가 좀체 안 놔줘서…… 괜찮아, 해결했어.”
“뭐, 부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서두르자.”
잠시 후.
그들은 술집 거리에 발을 들였다.
해 질 녘이 되자 가게들이 모두 불을 켜 놓아,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거리를 지배했다.
체스는 망설임 없이 가장 큰 술집으로 걸어갔다.
‘……윽.’
카리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술집을 한가득 메우고 있었다.
체스는 구석 테이블로 카리나를 안내했다.
“여기 앉아. 제일 눈에 안 띄는 자리거든.”
“고마워.”
체스는 점원에게 가장 싼 술 두 잔을 주문했다.
카리나는 담배 냄새에 콜록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이안 베온헴이 누구인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장 좋은 중심부 자리에는 머리에 기름을 발라 뒤로 넘긴 젊은 남성을 중심으로 기묘한 기류가 형성되어 있었다.
다들 긴장을 풀고 즐겁게 먹고 마시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안 베온헴이 한마디라도 하면 괴이하게 느껴질 성도로 왁자지껄하게 반응하며 자신의 성의를 보이려고 했다.
“봤지?”
체스가 씁쓸하게 말했다.
“원한다면 매일 저녁 여기에 데리고 와 줄 수 있어.”
“…….”
카리나는 체스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술을 들이마시는 이안 베온헴을 주시했다.
기대했던 글자들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계속 보다 보면 무언가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망했다.”
체스가 가볍게 욕을 내뱉었다.
‘……?’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체스가 그녀의 앞에 술 한 잔을 끌어다 놓았다.
“대충 마시는 척해.”
카리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술잔을 쥐고 홀짝거렸다. 꿀술의 달큰한 향이 위로 올라왔다.
“고개 숙여.”
체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카리나는 그 말에 그대로 따랐다.
체스가 저렇게 행동할 땐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짐작되는 바가 있기도 했고.
“이거 누구신가.”
낯선 목소리가 그들을 향해 들려왔을 때, 카리나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귀하신 분이 어찌 이 누추한 자리에 왕림하셨담.”
이안 베온헴이 대놓고 체스를 비꼬자마자, 그의 친구가 말을 거들었다.
“이 거렁뱅이가 귀한 분이라니…… 농담이 지나치네, 이안.”
“어떻게 거렁뱅이라고 부를 수가 있나? 이분의 아버지 되시는 버케인 씨께서 이런 술집 세 개는 세워 주셨는데!”
“이런, 내가 귀빈을 잘못 알아보았군. 실례하였습니다, 도련님.”
체스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카리나는 살짝 시선을 올려, 체스를 마주 보았다.
‘참아.’
카리나는 입술만 달싹거렸다.
여기서 흥분했다가는 일을 크게 그르칠 수도 있었다.
‘이래서…… 원한이 있으면 임무에서 배제하겠다고 한 거구나.’
다행히 체스는 평정을 가장하는 데 성공했다.
적어도 이안 베온헴이, 카리나를 입에 올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 친구가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처음인데……. 어디 한번 볼까.”
카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얼굴을 숨기려 한다면 의심만 사게 될 것이다.
곧바로, 그녀는 이안 베온헴과 눈이 마주쳤다.
욕심으로 번들번들한 눈이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이안 베온헴이 알겠다는 얼굴로 히벌쭉 웃었다.
“여봐라! 모두에게 술을 한 잔씩 다 돌려. 버케인 도련님이 이런 누추한 자리에 정인까지 데리고 오셨는데, 내가 한탕 쏴야지.”
이안 베온헴은 카리나가 쥐고 있던 술잔을 반강제로 뺏었다.
“이런 여물로도 안 줄 것 같은 누린내 나는 술 말고.”
이안 베온헴이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체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카리나에게 몸을 기울였다.
“부인, 여기에 계속 있어야겠어?”
“…….”
카리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귀가 왱왱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현기증이 기저에서부터 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리나는 기뻤다.
‘다시 그 글자들을 볼 수 있어!’
아니나 다를까, 반가운 글자들이 그녀의 시야에 시뻘겋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롤랜드는 반쯤 절망에 차 고개를 수그렸다.
“아…….”
고통스러운 신음이 입에서 절로 흘러나왔다.
이안 베온헴.
그가 은인이라고 여기며 의지했던 자는, 그를 이용할 생각밖에 없는 사기꾼이었다.
어디 그뿐만이던가?
베온헴 일가의 일부는 사채업에 몸을 담고 있었고, 또 일부는 인신매매업에 종사했다.
각종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고한 희생양들이 사채를 쓰게 만들어, 결국엔 그들이 인신매매로 넘어가게 만드는 시스템을 혈연이라는 이름으로 구축한 것이다.
이 사실을 이안 베온헴이 완벽하게 숨기며 제국의 사교계에 데뷔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베온헴 일가 중 더러운 일을 맡은 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다른 성을 쓰고, 베온헴과 일체의 관련도 없다는 거짓 서류를 만들었다.
하지만 롤랜드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이미 베온헴 일가는 겨우 재능이 좀 뛰어날 뿐인 평민 마법사가 어떻게 손을 써 보기에는 너무나 거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력하구나, 나는.’
롤랜드는 눈을 감았다.
익숙한 절망감과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다는 데서 기인한 죄책감이 그를 덮쳤다.
그가 마땅히 감내해야 할 감정들이었다.」
“부인, 부인……!”
카리나는 체스의 다급한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괜, 괜찮아…….”
카리나는 딱딱하게 굳은 혀를 움직였다.
체스는 거의 울 듯한 목소리였다.
“다행이야. 나는 부인이 이대로 못 깨어나는 줄 알았어. 혹시, 저 자식이…….”
“아니야.”
카리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아무도 그녀의 실신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내가 부인의 상태를 안간힘을 쓰고 숨겼어. 여긴 하이에나뿐이니까.”
“……고마워.”
카리나는 물끄러미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못 보던 술잔이 두 잔 올려져 있었다.
이안 베온헴의 명령에 따라 그들에게 전달이 된 듯했다.
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목이 말라도 먹지 마. 보나 마나 무슨 수를 썼을 테니까.”
“그래?”
카리나는 태연하게 말하며 손수건을 품에서 꺼내, 술잔에 푹 담가 버렸다.
“이 손수건을 가져가서 짜보면 알겠지. 무슨 수를 썼는지. 그리고…….”
카리나의 눈이 반짝였다.
“기억해? 나는 토르스 공작의 가신이야.”
“……!”
체스의 눈이 커지더니, 알겠다는 기색을 띠며 가늘어졌다.
공작의 가신을 해치려 한 건 즉결재판에 회부할 수도 있는 중죄였다.
카리나는 축축한 손수건을 품에 넣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서자. 여기에 더 있을 이유가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