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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입양합니다 (56)화 (56/145)

<56화>

카리나는 얼어붙은 채 입만 뻐끔거렸다.

체스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무게감 때문에, 어설픈 위로나 수긍의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그렇게 불쌍하게 볼 것 없어. 그나마 그때까지만 해도 포커에 미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야?”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체스가 한 마디 덧붙였다.

“이름이 포커나 카드인 것보다야 체스인 게 훨씬 낫지.”

“…….”

“여하튼, 그 인간이 나도 내다 팔려고 했지만 실패했어.”

체스는 씩 웃었다.

“그날, 내가 마법사로 각성했거든.”

* * *

다음 날.

카리나는 좀체 훈련에 집중하지 못했다.

아무리 몸에 힘을 주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이질적인 마력에 저항하게 되었다.

당연히 마정석 역시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허억, 허억…….”

카리나는 숨을 몰아 내쉬며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클로드가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쉬는 게 좋겠군.”

“더 할 수 있어요.”

클로드가 냉정하게 말했다.

“부인의 훈련에 소요되는 마정석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야. 하루에 하나 이상을 쓸 수는 없어.”

“제가 하나를 날린 거네요.”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치체스터로부터 영지 상황을 들은 이상, 황실로부터 무상으로 공급받는다는 마정석마저 아쉬웠다.

“신경 쓸 것 없다. 부인의 성장을 위한 투자니까.”

카리나는 물끄러미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클로드는 평소보다 더욱 창백해 보였고, 눈 밑에는 짙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그의 움직임이나 반응 역시 평상시보다 미세하게 둔탁했다.

그리고 아무런 자극이 없는데도 가끔 눈살을 찌푸리기까지.

‘피곤한 거야.’

카리나는 영지의 운영에 대해 잘 몰랐다.

하지만 치체스터가 과장한 게 아니라면, 클로드는 한가하게 자신과 노닥일 수 있는 공작이 아니었다.

마정석이야 그렇다 쳐도 매일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주는 것 자체가 큰 투자면서, 호의이기도 했다.

“어제, 시종장님이 찾아오셨어요.”

“…….”

클로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치체스터 경이 쓸데없는 짓을 했군.”

“왜 쓸데없는 짓이죠? 저는 각하의 가신이에요. 알 건 알아야죠.”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야.”

클로드가 쓰게 대답했다.

“부인이 알아 봤자 부담감을 안겨 주는 것밖에 더 되겠나?”

카리나는 자신은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오히려 그 반대라고 얘기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클로드가 빠르게 말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나도 다르게 생각했지. 그래서 솔직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구했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카리나는 의아하게 물었다.

“나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과중한 업무와 부담감에 질린 가신들이 모두 내 곁을 떠날 때까지는 말이지.”

“…….”

클로드가 카리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두 번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게 얼마 전 일인가요?”

카리나는 조금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건 알았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한…… 5년 정도 전이군.”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때는 클로드의 즉위 초.

아직 가신들이 많이 남아 있었던 시절이다.

큰 부담감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그럼 각하께서 크게 잘못하신 건 없지 않나요? 부담을 얹어 주지 않았을 때도 다 떠났으니까요.”

“그건 아직까진 토르스가 부족한 탓이지. 결국엔 내 잘못이긴 매한가지다.”

“토르스가 부족해서라고요?”

깜짝 놀란 나머지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토르스는 카리나의 고향보다 훨씬 풍족하고 부유했다.

당장 공립학교만 보아도, 결코 돈이 부족한 영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클로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 한때 내 가신들이었던 이들은 평범한 가문으로 거취를 옮긴 게 아니야. 그 가문들과 경쟁하려면 지금 토르스로는 많이 부족하지. 돈이라면 그들도 많으니까.”

카리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공작가의 가신이 된다는 건 영광과 지위, 돈을 의미했다.

그런데 클로드의 곁에 남은 가신이 은퇴한 와일더와 5년짜리 계약인 자신을 제외하면 두 명뿐이라니?

단순히 위치가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서가 아닌, 특정한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클로드는 근본적인 이유를 눈치채지 못하거나, 혹은 잘 알면서도 카리나에게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느 쪽이든 클로드에게서 정확한 대답을 얻어낼 수 없을 터이기에 카리나는 말머리를 돌렸다.

“체스 버케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클로드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돌아왔다.

“그건 왜 묻지?”

“필요하시잖아요, 인재.”

“그런 인간까지 써야 할 정도로 궁한 상황은 아니다.”

클로드가 차갑게 대답했다.

“궁한 상황 맞아요. 지금 각하의 가신을 다 끌어모은다 해도 네 명이잖아요.”

카리나는 조금 자조 어린 말로 엇붙였다.

“심지어 저는 제 앞가림도 하지 못해, 당장은 각하의 짐만 되고 있는 상황이죠. 하지만 체스는 달라요.”

카리나는 체스에게서 훈련의 진척도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체스는 여태까지 해본 적이 없는 정석 훈련에 처음에는 다소 헤맸지만, 지금은 능숙하게 클로드가 내는 과제들을 해냈다.

본인 입으로 쑥스러워하며 덧붙일 정도였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엔 좀 민망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마법사가 된 것 같아.’

‘그것참 다행이네.’

‘진작 이런 실력을 갖췄다면 부인을 납치하겠다는 황당한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클로드가 여전히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근래 실력이 봐줄 만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자는 어디까지나 쓸만한 병정 정도야.”

클로드는 더더욱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나무에 등을 기댔다.

“부인을 납치하기 위해 공작저로 침입하기까지 한 자를 토르스 공작가의 가신으로 삼을 수는…….”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시잖아요.”

카리나는 단호하게 클로드의 말을 끊었다.

“그래요. 체스가 저를 납치하려고 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건 돈 때문이었어요.”

클로드가 무어라 말하기 위해서 입을 열었지만, 카리나가 한 발 더 빨랐다.

“만약 누구든 돈을 준다고 했으면, 체스는 자기 자신의 팔이라도 잘라줬을 거라고요. 아무도 체스의 잘린 팔을 돈 주고 사려고 하지 않았을 뿐이죠.”

“그래서, 부인은 그자에게 말 못 할 사연이라도 있다는 건가?”

카리나는 클로드의 비꼬는 듯한 말에도 개의치 않았다.

“네.”

카리나는 천천히 체스의 사정에 대해 설명했다.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는 작자가 도박 빚 때문에 친아들을 인신매매 업자에게 넘겼다는 것, 형을 자유의 몸으로 만들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는 것, 아무도 미숙한 마법사를 고용해주지 않았다는 것까지.

클로드는 카리나의 말을 듣는 내내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설명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도와주라는 거군.”

“정확해요.”

클로드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 그자의 호감이야 살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상태로도 얼마든지 그자의 능력을 이용할 수 있어.”

카리나는 클로드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각하께는 충성을 바칠 가신이 필요해요. 저처럼, 5년 동안만 있겠다고 호언한 사람이 아니라.”

체스에게 그의 형은 유일한 가족이었다.

마치, 멜리사와 롤랜드가 카리나의 가족인 것처럼.

카리나는 두 아이를 불행한 운명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면 그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렝케 경의 분노와 추적을 감수하고 토르스까지 도망쳐 온 게 아닌가.

“만약 각하께서 그의 형을 노예노동으로부터 구하고 거처까지 주신다면, 체스는 각하께 평생토록 충성을 바칠 거예요.”

“……그가 그렇게 말하던가?”

“아뇨.”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체스는 형이 풀려날 경우를 실수로라도 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리나는 자신의 추측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만약, 롤랜드나 멜리사에게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녀 역시 그러할 테니까.

“체스는 제가 각하께 얘기할 거라는 사실조차 몰라요. 저 얘기도, 제가 물으니까 한 거고요.”

침묵이 흘렀다.

카리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클로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부인, 오늘 할 일이 있나?”

“아뇨?”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자신의 일과는 늘 같았다.

클로드와의 훈련과, 아이들과의 교감. 그보다 더 특색 있는 일이라곤 아스트리드의 방문 정도였다.

“체스 버케인을 부르겠다. 상황을 감안했을 때, 이 일은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것 같군.”

“……!”

카리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그녀는 클로드가 이렇게나 쉽게 수락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의 동요를 눈치챈 듯, 클로드가 천천히 설명했다.

“나는 부인의 부탁 때문에 움직이는 게 아니다. 부인을 해치려 한 체스 버케인을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지. 다만…….”

검 자루를 힘주어 쥔 클로드의 손에서 핏줄이 꿈틀거렸다.

“내 영지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면서도 묵과할 수는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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