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늙은 시종장의 목소리가 쓰디쓴 기색을 띠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가신이라면, 모름지기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겠지요.”
그는 똑바로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인이라면 충분히 각하께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침묵이 흘렀다.
카리나는 한참을 생각한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제가 모르던 사실들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람 잘못 보셨어요.”
“예?”
이번엔 치체스터가 당황할 차례였다. 노인의 목소리가 노기마저 띠며 흔들렸다.
“부인은 이제 공작저의 가신입니다! 그 위치를 자각해야…….”
카리나는 치체스터의 말을 끊었다.
“저는 5년 동안만 각하를 위해 일하기로 계약까지 했어요. 엄밀히 말해선 가신이라고 할 수도 없겠죠.”
치체스터가 코웃음을 쳤다.
“그 5년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십니까? 부인은 5년은 일하겠다고 직접 자신의 손으로 서명했습니다. 그리고…….”
카리나는 와일더의 말을 떠올렸다.
“5년을 버틴 사람이 없군요.”
“바로 그겁니다.”
상황은 카리나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나빴다.
‘그러고 보니, 수행원 하나 없이 다녔지.’
카리나는 단순히 클로드가 혼자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괴짜 공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력이 많다면 클로드가 혼자 다닐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클로드가 아스트리드에게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한 것 역시…….
‘당연하네. 거의 모든 일을 직접 해야 하는데, 어떻게 여동생에게 신경을 쓰겠어?’
카리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어쩌면 남부에 남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자신은, 얼마나 순진했던가.
‘정말 떠나야겠네.’
토르스는 만성적인 인재난에 시달리고 있다.
대마법사가 될 재능을 타고난 롤랜드야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재능을 발현하기 시작한 멜리사까지.
과연 클로드 데비아탄 토르스가 그들을 순순히 보내 줄 만큼 물욕 없는 사람일까?
카리나는 전생에서 읽은 소설을 떠올렸다.
그 속의 클로드는, 결코 롤랜드를 포기하지 않았다.
치체스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만 가야 할 것 같군요. 행운을 빕니다, 블로에 부인.”
카리나는 그를 현관까지 배웅했다.
마침내 치체스터가 떠나자, 카리나는 한숨을 몰아쉬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 정확히 그 순간…….
벨이 또 울렸다.
‘또 할 말이 있으신가?’
카리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문을 열었다.
“안녕.”
체스 버케인이 무뚝뚝하게 인사를 내뱉었다.
카리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체스 버케인과 그녀의 관계는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찾아오다니.
카리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여기서 얘기할 만한 건 아니야.”
“……들어와.”
카리나는 체스를 들여보냈다.
응접실로 가면 치체스터가 머물렀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에, 카리나는 일부러 거실로 그를 안내했다.
아이들이 빤히 체스를 쳐다보았다.
“뭐야, 이 못생긴 꼬맹이들은?”
“…….”
롤랜드와 멜리사가 카리나의 뒤로 숨었다.
카리나는 체스를 노려보았다.
“내 애들인데?”
“……아.”
체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나는 또, 부인이 너무 젊어가지고 다른 사용인의 아이들인 줄. 미안. 다시 보니 참 귀엽네. 잠시 눈이 멀었나 봐.”
“됐고, 여기엔 왜 왔는데?”
체스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생각해 보니 말이야. 부인이 내 목숨줄을 쥐고 있잖아? 그래서 잘 지내보려고.”
“무슨 소리야?”
“원래 얼굴 아는 사람은 못 죽이는 법이거든. 그러니 너도 나랑 좀 친해지면 나를 죽이지는 않을 거 아니야?”
듣고 보니 카리나가 반쯤 잊고 있었던 마정석에 관한 이야기였다.
클로드가 그녀에게 준, 원한다면 언제든 체스의 몸을 폭발시킬 수 있는 마정석.
카리나는 기가 찼다.
이렇게 뻔뻔한 사람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렝케 경은 사악하고 무자비한 부류였다.
그와 달리, 체스에게선 별다른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솔직하게 자신의 의도를 털어놓는 것이 순수한 사람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카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환심을 살 필요는 없어. 네가 허튼짓만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을 테니까.”
“정말이야? 혹시, 심심해서 그 마정석을 꽈악 문질러본다거나…….”
“그럴 리가.”
카리나는 기가 막힌 티를 숨기지 않았다.
“알았어, 알았어. 하지만 부인과 잘 지내보겠다는 생각은 바뀌지 않았어. 부인은 좋은 사람이잖아.”
“좋은 사람이 아니라 호구로 본 거겠지.”
카리나는 다소 날카롭게 대답했다.
자신을 납치하려 한 주제에, 이렇게 잘 지내보겠다며 찾아오다니.
뻔뻔스럽다고밖에 할 수가 없었다.
체스는 딴청을 부리며 집을 둘러보았다.
“좋은 집이야. 내가 묵고 있는 곳과는 차원이 다르군.”
“어떤 곳에 있는데?”
“당연히 감옥이지.”
체스는 당연하다는 투였다.
“감옥?”
카리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놀랐어? 나는 속에 폭약을 잔뜩 심어둔 죄수일 뿐이잖아. 감옥에서 지내는 것도 당연하지.”
카리나는 체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붉은 눈엔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후회도.
카리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짓말이구나.”
“어떻게 알았어?”
체스는 정말로 놀란 목소리였다.
“각하께서는 그럴 분이 아니니까.”
클로드 데비아탄은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비록 체스의 실력이 성에 차지 않는다 한들 소중한 마법사였다.
더군다나 죄수 신분으로 묶여 있으니 남부를 떠날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인재를, 언제 건강이 악화될지도 모르는 감옥에 처박아 둔다?
카리나가 보아 온 클로드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부인은 그 인간을 정말로 신뢰하는구나.”
“각하는 사람을 다루는 법을 잘 아시니까.”
카리나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이 정도 말했으면 체스가 눈치껏 가 주길 바랐지만, 도리어 체스는 거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카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할 말 다 끝났으면 나가.”
“싫은데. 나는 부인과 친해지고 싶거든. 내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 주었잖아.”
“내가 왜 나를 납치하려 한 사람과 친해져야 하는데?”
롤랜드가 카리나의 치마를 잡아당겼다.
“엄마, 이 아저씨가 엄마 아프게 한 사람이에요?”
“아저씨라니.”
체스는 조금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겨우 스무 살이야!”
“스무 살이면 아저씨 아닌가요?”
“그냥 체스라고 불러라, 꼬맹아. 제발.”
롤랜드가 진지하게 항의했다.
“제 이름은 롤랜드예요!”
카리나가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
“체스 버케인,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말해. 지금 여기, 이 집에서 버티고 있는 이유가 뭐야?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카리나는 알았다.
분명 체스는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 탓에 별채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말을 하기가 싫은지 이리저리 말만 돌리며 상황을 회피하는 중이었다.
아이 둘을 키우다 보면 흔히 겪는 상황이었기에 잘 알 수 있었다.
체스 버케인이 그녀의 눈치를 슬며시 살폈다.
“눈치가 백 단인데.”
카리나는 웃지 않았다.
“지금 말할 거야, 말 안 할 거야?”
체스는 크게 숨을 들이켜더니, 눈알을 불안하게 굴렸다.
마침내 그의 입에서 진실이 흘러나왔다.
“……사과하려고 왔어.”
“사과?”
카리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체스 버케인이 사과를 할 정도로 염치가 있다니 놀라운 사실이었다.
“미안해. 사람이 할 만한 짓이 아니었어. 내가 죗값을 치르게 된 것도 당연해.”
“……용서해 줄 사람을 찾는 거라면 잘못 찾아왔어.”
카리나는 순순히 그를 용서해 줄 생각은 없었다.
특히, 체스 때문에 불안에 떤 아이들 때문이라면 더더욱.
체스는 손을 내저었다.
“용서를 받으려고 사과하는 건 아니야. 단지,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만약 내가 임무에 성공했다면……”
“입 다물어. 애들이 들으니까.”
“아.”
체스는 입을 꽉 다물었다.
카리나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제 겨우 스물.
비록 실력이 클로드의 성에는 차지 않은 듯했으나 그 실력이 어떠하든 마법사는 희귀한 인재다.
‘이자와 친해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롤랜드와 멜리사에겐 마법에 대해 알려줄 사람이 필요했다.
클로드는 두 아이의 나이가 마법을 배우기에 너무 어리다고 했지만, 이미 마법을 익혀버린 경우에도 원론만을 고집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카리나는 때때로 롤랜드와 멜리사가 단둘이서 몰래 마법을 쓰며 논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에게 빚을 지고 있는 데다 목숨줄마저 붙잡힌 체스는 좋은 선생 후보였다.
강력한 마법사가 아니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제 욕심에 아이들을 무리해서 가르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전에 카리나가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점이 있었다.
“질문이 있어.”
“뭔데?”
“왜 나를 납치하려고 했지?”
카리나는 그 이유를 알아야 했다.
체스의 성미는 나빠 보이지는 않았으나, 카리나를 납치하려 한 자였다.
그 이유에 따라 그를 당장 내쫓고 다시는 아이들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해야 할 수도 있었다.
“말했잖아? 돈 때문이라고.”
“돈이 왜 필요했는데? 마법사니까, 고용주를 구하는 건 쉽잖아.”
체스의 대답은 느리게 돌아왔다.
“……많이 필요했거든.”
“왜?”
“듣고 싶어? 별로 유쾌한 이야기가 아닌데.”
체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야겠어.”
체스는 한참을 망설였다.
이번엔 제법 오랜 시간을 기다린 다음에야 대답이 돌아왔다.
“……아비란 인간이 도박에 미쳐서 형을 업자한테 팔았어. 그래서 형을 구할 돈을 마련하려고 했지.”
체스는 무척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내 이름이 왜 체스인 줄 알아? 친애하는 아버지께서 내가 태어날 무렵, 내기 체스에 미치셨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