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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입양합니다 (53)화 (53/145)

<53화>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치체스터 경이 클로드의 책상 위에 결재가 필요한 서류를 한가득 올리며 말했다.

“당연하지. 드디어 블로에 부인을 내 가신으로 삼지 않았는가.”

“그래 봤자 5년짜리 아닙니까.”

클로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뭐, 대부분 5년도 채우지 못하고 내 곁을 떠났으니…… 내게 이득이 아니겠나.”

“각하…….”

치체스터 경이 안쓰러운 눈길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그 은혜도 모르는 것들에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니야, 치체스터 경. 이쯤 되니 내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치체스터 경의 얼굴에 다소 흥분한 기색이 떠올랐다.

“각하를 버리고 도망친 것들이 하나같이 나약하고 의리도 모르는 인간일 뿐입니다!”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아.”

클로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남부가 많이 부족한 탓이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나는 남부를 수도에서 인재들이 몰려올 만한 곳으로 만들 거다.”

말을 마친 클로드가 서류 더미에 손을 뻗을 때였다.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시종이 문을 열고 들어와 정중하게 보고했다.

“각하, 블로에 부인께서 사무실에 도착하셨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군.”

클로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실은 약속한 시간보다 15분이 일렀지만, 카리나가 기다리고 있다는데 시답잖은 서류들이나 보며 앉아있고 싶지 않았다.

“미안하다, 치체스터 경. 이것들은 저녁에 살펴봐야겠어.”

치체스터 경은 클로드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잘 다녀오십시오.”

한편, 카리나는 자신에게 새롭게 주어진 방을 호기심 어린 얼굴로 살펴보고 있었다.

그녀가 앞으로 사용하게 될 사무실은 클로드의 집무실 바로 옆이었다.

대대로 공작저의 가신들이 사용한 듯이 보이는 방은 그녀의 선임들이 남긴 흔적으로 가득했다.

카리나는 등 뒤에서 들려온 클로드의 목소리에 돌아섰다.

“블로에 부인.”

“공작 각하.”

클로드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일찍 왔군.”

“그럼요.”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이니까요. 열심히 해야죠.”

“사무실은 마음에 드나?”

“네. 무척이나요.”

카리나는 밝게 대답했다.

사실, 이 사무실은 렝케 경의 실험실보다도 컸다.

본디 가신의 보조들이 썼을 법한 작은 책상도 여럿 있어, 그녀 이전에 이 방을 썼을 사람들의 신분을 가늠하게 했다.

“하지만 딱히 쓸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각하께 도움이 되려면 제가 배워야 할 게 너무나 많으니까요.”

“지금 당장은 그렇겠지.”

클로드의 대답은 얼핏 동의하는 것처럼 들렸다.

“허나…… 일 년 뒤에는? 삼 년 뒤에는? 그때도 여전히 이 사무실을 계속 비워 둘 생각인가?”

“그럴 수도 있겠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클로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 빨리 배우고 이 사무실을 차지해. 5년 동안 이곳을 놀리는 건 낭비일 테니까.”

카리나는 말문이 막힌 채, 고개만 끄덕였다.

클로드가 자신에게 거는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 느껴졌다.

‘실망시키지 않겠어.’

잠시 뒤.

클로드는 그녀를 별채 근처의 공터로 데려갔다.

공작저의 뜰은 대부분 각종 꽃들로 뒤덮여 있었는데, 이곳만큼은 예외였다.

공작저의 안뜰이라기보단 흙으로 된 운동장에 가까워 보였다.

카리나는 조금 긴장하면서도 흥분한 얼굴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클로드는 그녀를 마법사로 만들어주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와일더의 말대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클로드는 그녀에게 빛나는 재능이 있으며, 그 재능을 갈고닦아 줄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카리나가 평생 동안 기다려 왔던 말이었다.

“무엇부터 시작하나요?”

“마력을 조절하는 것부터.”

“어떻게…….”

카리나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자신은 마법 하나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그런데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마력의 조절이라니.

걷지도 못하는데 뛰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클로드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체스 버케인과 한 것 기억나나?”

“네.”

“그것과 비슷해. 하지만, 이번엔 내가 부인의 역할을 맡지. 그리고 부인이…….”

카리나의 얼굴에 알겠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체스 버케인의 역할을 하는 거군요.”

“정확해.”

“알겠어요. 어떻게 하는 거죠?”

체스 버케인은 마정석이 내부에서 폭발해, 그 자신의 마력이 밖으로 밀려 나온 상황이었다.

카리나가 인위적으로 꾸며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클로드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푸르게 빛나는 마정석이었다.

카리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걸…… 제 몸에 박아 넣어야 하는 건가요?”

“아니, 전혀.”

클로드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냥 쥐고 있어. 그럼 저절로 마정석이 폭발할 거야. 그때 저항하지 않으면 돼.”

“저항하지 말라고요?”

깜짝 놀란 카리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는 내게 맡겨라.”

카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지만, 카리나는 눈앞의 이 남자를 믿었다.

‘내게 해가 될 일을 시킬 리 없어.’

자신은 클로드 데비아탄이 소중히 여기는 원석이다.

그가 하는 일들은 아무리 어리둥절하게 느껴질지라도 결국 카리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카리나는 클로드로부터 마정석을 건네받았다.

‘…….’

뜨거운 기운이 전해져 왔다.

카리나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손에 있는 이 마정석이, 작은 집 하나 정도는 날려 버릴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걸.

카리나는 마정석을 멀리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며 눈을 꼭 감았다.

클로드의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가 하더니, 거대한 빛이 시야에 번쩍였다.

“눈을 떠.”

카리나는 클로드의 말에 천천히 복종했다.

‘……!’

그녀의 시야에 금색 찬란한 빛이 차올라 있었다.

체스 버케인을 구했던 그날처럼.

“지금 느낌이 어떻지?”

“어…….”

카리나는 잠시 망설였다.

여태까지 마력을 발산했을 때는 급박한 상황에 휘말려 자기 자신의 상태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옆에 자신을 단단하게 지탱해주는 클로드 데비아탄이 있었으며, 마정석의 폭발 역시 그녀의 능력을 위한 것이었다.

카리나는 천천히 심호흡하며 말을 골랐다.

최대한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표현해서, 클로드가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힘이 느껴져요.”

카리나는 그 이상의 말을 보태지 않았다.

순수한 힘이 전신에서 치솟고 있었다. 분명 마력이 체내에서 밖으로 나가고 있음에도 힘이 줄어드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클로드가 싱긋이 웃었다.

“그래. 그대로 둬. 흘러가는 대로. 저항하려 하지 말고.”

카리나는 클로드의 말과 비슷한 글귀를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금방 떨쳐 버리고 클로드의 말에 집중했다.

저항하지 않는 것 자체가 제법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카리나의 몸은 마력에 저항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고, 뿜어져 나오는 마력은 그녀에게 기묘한 느낌을 안겨 주었다.

힘이 넘치면서도…….

감히 그 힘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듯한.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마력의 분출이 끝났다.

카리나는 클로드가 그 사실을 알려주기도 전에 이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긴장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바닥에 수북이 깔린 무언가에 놀라 반쯤 뒤로 넘어질 뻔했다.

대여섯 개의 금색 마정석들이 바닥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설마, 마정석일 리가 없어.’

하지만 클로드는 냉정하게 판단을 내려주었다.

“마정석이야.”

카리나의 입이 절로 벌려졌으나,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력을 닮은 듯 금빛을 뿜어내고 있는 마정석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굳이 클로드에게 근거를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

와일더의 조수로 보낸 시간들이 헛되지는 않았으니까.

카리나는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검이랑 똑같아.’

눈앞의 마정석은 그녀의 마력에서 뽑아낸 검과 정확히 똑같은 파장을 지니고 있었다.

클로드가 반은 경탄하는 듯이, 또 반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게 내가 말한 부인의 가장 큰 재능이다.”

“……제가, 마정석을…….”

카리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와일더의 가게에서, 그리고 클로드에게서 워낙 많이 보아 익숙해졌다 뿐이지 본디 마정석은 동급의 보석보다 구하기 어려웠다.

마정석이 생산되는 광산은 극히 드물었고, 간혹 마수에게서 얻을 순 있었으나 그 역시 희박한 확률이었기 때문이었다.

클로드가 허리를 굽히더니, 금색 마정석을 하나 집어 카리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카리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름다워요.”

“그래야지. 부인이 만들었으니.”

그 한 마디에 담긴 어딘가 심상치 않은 기색에, 카리나는 클로드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햇살 섞인 봄바람이 클로드의 은발을 한차례 헝클었다.

하지만 은발 밑, 깊은 바다를 닮은 눈만큼은 카리나에게서 시선을 뗄 줄을 몰랐다.

카리나를 불쌍한 과부로도, 수상한 외지인으로 보지 않는 온전히 그녀 하나만을 보는 눈길이었다.

카리나는 결심했다.

앞으로 5년.

때가 닥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지 몰라도, 약속한 5년만큼은 이 남자를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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