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말도 안 돼요.”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재능이 있다면, 렝케 경이 가만히 놔두었을 리가 없었다.
“혼란스러운 것도 이해해.”
클로드가 천천히 설명했다.
카리나는 억지로 웃기 시작했다.
“제가 마법사의 자질을 가진 건 맞아요. 하지만, 마법 한번 제대로 쓸 수가 없는 체질인데 어떻게…….”
“나는 부인이 마법사가 될 수 있다고 한 적이 없어. 단지, 백 년에 한 명쯤 가지고 태어나는 재능을 가졌다고만 했지.”
카리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게 마법사로서의 재능이잖아요. 마법사가 될 수 없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무언가 착각하고 있군.”
클로드가 검을 카리나를 향해 건네주었다.
검이 카리나에 공명하듯 진동했다.
“부인은 마력을 조절할 수 없으니 당연히 마법을 쓸 순 없지. 써서도 안 되고. 하지만 선천적인 마력은 순수한 재능이야.”
“…….”
“블로에 부인, 보석의 원석을 본 적 있나?”
“아뇨.”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겐 그저 돌멩이로 보일 뿐이야. 하지만 부모님은 내게 원석을 알아보는 방법을 가르치셨지.”
클로드의 눈이 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카리나는 멍하니 그의 눈이야말로 보석 같다고 생각했다.
“그대는 놓치고 싶지 않은 원석이야, 블로에 부인. 내게 그대를 발굴할 기회를 주겠나?”
이번이 세 번째였다.
토르스의 공작이, 그녀에게 가신이 되어 달라고 청한 것은.
“…….”
카리나는 자신에게로 정중하게 내민 클로드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손을 잡게 되면…… 나는 분명 강해지겠지.’
클로드 데비아탄 토르스는 그럴 만한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람이니까.
이제 카리나는 클로드에 대해서 예전만큼 잘 모르지는 않았다.
처음 두 번은 두려움과 선입견 때문에 거절했으나, 이번 청을 거절하려면 마땅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클로드 데비아탄은 친절하고 너그러우며 인성과 실력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분명 좋은 군주이며 주군일 것이다.
만약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카리나는 클로드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어쩌면, 기뻐하면서.
하지만 카리나는 자신이 남부에 터전을 잡고 살 경우 닥쳐올 미래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신이 될지, 아니면 자유로운 마법사로 살지, 그것도 아니면 마탑으로 갈지는 롤랜드와 멜리사가 직접 결정할 문제였다.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하지만 클로드와 롤랜드는 전생에 읽은 소설 속에서 좋은 인연이 전혀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클로드가 롤랜드의 재능을 탐내 그에게 집착했기 때문이었고.
카리나의 재능을 본 클로드의 반응을 생각하면, 롤랜드의 완전한 재능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보일 반응이 두렵기까지 했다.
운명론을 믿는 건 아니었지만, 카리나는 아이들과 관련해서는 조금의 위험도 감수할 수 없었다.
카리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각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카리나는 머릿속에서 엉키기 시작하는 말들을 간신히 추려내었다.
클로드의 새파란 눈이 그녀를 주시했다.
“저는…… 토르스에 완전히 정착할 생각이 없습니다.”
“알고 있어.”
클로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들 아이들을 에드무어에서 키우고 싶어 하지. 이해한다. 아무래도 기회가 많으니.”
카리나는 깨달았다.
그는 이미 그녀의 거절과, 그 이유마저 짐작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렇지 않고는 저렇게 침착해 보일 리가 없었다.
“……5년.”
카리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5년 동안만 각하의 가신이 되겠다고 하면, 허락해 주실 건가요?”
“……!”
클로드의 눈이 커졌다.
카리나는 긴장하며 그의 답을 기다렸다.
5년.
앞으로 5년 동안 공작저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임금을 받는다면 그동안 어디론가 이주할 만한 돈은 충분히 모을 수 있었다.
그때면 롤랜드는 13살, 멜리사는 12살이 된다.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하기에 충분한 나이였다.
하지만 이 조건을 클로드가 받아들이냐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카리나가 내건 조건은 앞으로 5년 동안 온갖 지원과 교육을 받은 다음, 쌩하니 떠나버리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클로드의 대답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조건, 받아들이지.”
카리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황급히 약속했다.
“그때까지 각하께 충성을…….”
“충성은 필요 없어.”
클로드가 카리나의 말을 잘랐다.
“그대는 그저 내게 고용된 사람으로서 할 도리만 다하면 돼. 그보다 더한 걸 요구할 생각은 없다.”
“정말인가요?”
“그래.”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가 이렇게나 쉽게 받아들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왜…….”
“왜 바로 수락했냐고?”
클로드가 카리나를 직시했다.
“부인만 한 인재를 5년 동안 내 가신으로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득이니까.”
카리나는 굳이 반박하지야 않았지만, 클로드의 말을 믿지는 않았다.
‘아마, 내가 계속 머무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클로드는 틀렸다.
카리나는 아무리 좋은 대우를 받아도 5년 뒤엔 반드시 아이들을 데리고 떠날 것이다.
다가올 미래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럼 계약서를 써 주세요.”
“계약서?”
클로드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부인은 내가 그렇게나 미덥지 않나 보군.”
“각하께서는 얼마든지 강제할 만한 힘을 가지고 계시니까요. 제게는 저를 지킬 수단이 필요해요.”
“사람의 마음은 강제할 수 없어.”
클로드가 다소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강제했더라면, 지금 내게 남은 사람이 이렇게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부인이 원한다면 계약서는 몇 개든 써 줄 수 있다.”
카리나가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저…….”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카리나와 클로드는 화들짝 놀라 아래를 바라보았다.
체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저기요…… 저 죽을 것 같은데요……. 둘 다 절 잊어버린 거 같아서…….”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말했는지, 체스는 그 말을 끝으로 의식을 잃었다.
클로드가 한숨을 내쉬면서 체스를 어깨에 들쳐 멨다.
“이 바보부터 의사에게 넘겨주어야겠군.”
다음날.
카리나 블로에는 공작가의 정식 가신이 되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와일더는 카리나가 공작가의 가신이 됨으로써 소중한 직원을 잃었음에도 별달리 기분이 상했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
“축하하네. 드디어 애송이가 원하는 대로 되었군.”
“화를 내지 않으실 건가요?”
“나? 왜 내가 화를 내겠나?”
와일더가 웃음을 터뜨렸다.
“부인에게 잘된 일이니 축하해야지. 어차피 부인이 내 가게에서 하던 일도 대부분 공작가와 관련된 일이었어.”
반박할 수가 없었다.
와일더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부인은 원래 이곳을 떠날 생각이지 않았는가. 조금 더 앞당겨진 것뿐이야. 그리고…….”
와일더가 카리나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어제 일은.”
카리나가 얼굴을 찡그렸다.
“절 미끼로 삼으려 한 거요? 아니면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해서 실패한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당연히 후자지. 그럼 전자라고 생각했나?”
와일더는 비아냥거리듯 말했지만 카리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미안한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멍청한 계획이었어. 전체적으로.”
침묵이 흘렀다.
카리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와일더는 분명 카리나가 토르스에 자리를 잡게 해준 고마운 사람이었고, 카리나는 그를 좋아했다.
그렇다고 그의 잘못된 판단을 괜찮다고 보듬어 주고 싶지는 않았다.
“네. 멍청한 계획이었어요.”
카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와일더 씨가 제게 해 주신 것들이 사라지지는 않아요. 와일더 씨가 없었다면…… 저흰 지금쯤, 어디 골목에서 굶어 죽었을지도 모르죠.”
“나는 유능한 직원을 채용하고, 마땅한 대우를 해 주었을 뿐이야.”
와일더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러니 부인이 내게서 뭐 거창한 걸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말게.”
그는 카리나가 무언가를 더 말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한번 축하한다, 부인. 그리고 한가지 당부하자면…….”
와일더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5년은 꼭 채워줘. 클로드 데비아탄의 가신들이 금세 그만두는 이유가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