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쾅!
시야에 붉은 불꽃이 튀는 걸 보니, 마법사가 문을 향해 폭발 마법을 쓴 모양이었다.
클로드가 대놓고 비웃었다.
“한낱 불꽃 따위로 그 문을 파괴할 생각이었나?”
“…….”
마법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클로드를 향해 무작정 달려들었다.
‘……!’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온갖 상상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쳐서,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처럼 머리가 아찔했다.
하지만 여기서 정신을 잃는다는 사실 자체가 민폐였기에, 카리나는 최선을 다해 버텼다.
‘괜찮을 거야. 무려, 공작 각하잖아. 몇 번이나 실력을 봐 왔어. 절대, 절대로 패배하지 않을 거야.’
카리나는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싸움은 단 몇 초 만에 격렬해져 카리나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섬광과 불꽃뿐이었다.
처음에는 문에 가까웠던 마법사와 클로드는, 점점 카리나가 있는 캐비닛 쪽으로 가까워졌다.
그 덕에 카리나는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
열 자루가 넘는 칼들이 공중을 날았다. 마법사는 손을 치켜들어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방패를 생성했다.
하지만 클로드의 칼들은 순식간에 마법사의 방패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마법사는 낭패한 듯한 신음을 내며 몸을 뒹굴어 칼날을 피했다.
‘제발, 제발…….’
카리나는 속으로 클로드의 승리를 열심히 기원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끊임없이 마정석을 칼로 변환시키는 클로드는 편안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언제 또 전세가 뒤바뀔지 모른다.
하지만 카리나는 단 몇 분 만에 깨달았다.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하구나. 이 사람은…….’
클로드의 능력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제법 기세등등하던 마법사도 얼마 지나지 않아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면서 움직였다. 반대로 클로드는 여유만만해 보였다.
고양이가 다 잡아놓은 쥐를 갖고 노는 것처럼, 마법사를 가지고 노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클로드가 대검을 가볍게 휘두르며 나지막하게 일렀다.
마법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그 공격을 받아쳤으나,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몸의 균형을 잃고 말았다.
클로드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그는 마법사의 허점을 파고들어 일격을 가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클로드의 판단이 틀렸다.
카리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다.
‘마법사는 줄곧 기회를 노리고 있었어!’
마법사의 움직임보다 반 박자 빠른 소름이 카리나의 등줄기를 내달렸다. 그녀는 크게 확장된 동공으로 두 사람의 움직임을 쫓았다.
카리나의 예상대로, 마법사는 클로드가 가장 가까워졌을 때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마법사 자신을 자폭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다.
“크헉……!”
예상치 못한 공격을 그대로 뒤집어쓴 클로드의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법 폭발에서 마법사는 자체적인 면역이 되어 있으므로, 부상을 입은 건 클로드뿐이었다.
“…….”
비틀거리며 일어난 클로드가 신음 하나 흘리지 않고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클로드는 겉으로는 전혀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카리나는 마법 폭발을 그대로 뒤집어써 본 경험자로서 알았다.
지금, 클로드가 겪고 있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리라는 걸.
초인적인 정신력이 아니라면 일어서는 것조차 불가능했으리라는 걸.
여유가 조금만 더 있는 상황이라면 당장 바닥에 나뒹굴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뜨거운 눈물이 소리 없이 카리나의 뺨을 적셨다.
클로드에 대한 동정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 자신에 대한 분노의 눈물에 가까웠다.
‘또…… 아무것도 못 하다니.’
카리나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저번처럼 마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죽음, 혹은 구원만을 기다리는 상황은 아니다.
오히려 카리나의 신체는 창고 안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카리나는 무력했다.
오직 클로드의 승리를 기도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또 이렇게만 있을 거야?’
마음 아주 밑바닥에서, 무시하기에는 너무 뾰족뾰족한 목소리가 자라나 카리나의 가슴을 가득 메웠다.
‘지금 공작에게 필요한 건 회복할 시간뿐이야. 그 시간만 벌어 줘도 이 모든 게 끝날 텐데, 그것마저도 못 하겠다고?’
카리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
자신은 몸을 사려야 했다.
아이들을 위해서.
만약, 카리나가 누구를 위할 필요가 전혀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카리나는 이럴 때 두 손을 모두 놓고 혼자 안전을 만끽하는 성격이 결코 아니었으니까.
‘진작 이 더러운 캐비닛을 뛰쳐나가서 공격 마법을 뭐라도 하나 쏘아댔을 거야.’
하지만 카리나에게는 롤랜드와 멜리사가 있었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클로드는 분명 좋은 공작이었다.
카리나가 지금 이곳에서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한 번 자신의 눈에 들어온 카리나의 아이들을 매정하게 내칠 성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롤랜드와 멜리사는 공작가의 가신이 되어 평생토록 충성을 바쳐야 할 것이다.
‘아이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살아갈 수 없겠지.’
전생에 읽은 소설 속 내용은 이제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카리나는 성인이 된 롤랜드가 울부짖듯 토해낸 대사 하나만큼은 기억할 수 있었다.
[난, 대체 뭘 위해 살아왔지?]
롤랜드가 그 대사를 하게 된 상황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지만, 얼추 짐작은 가능했다.
전생에 읽은 소설 속에서, 롤랜드는 평생 동안 남을 위해 살았다.
어릴 때는 렝케 경을 위해서, 더 자라서는 제국을 위해서, 더 자라서는 전 세상을 위해서…….
하지만 롤랜드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 세상 어디에도 그를 진정으로 위해 주는 이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한 번도 그 아이는 행복해진 적이 없었어. 주인공이고, 모든 힘을 다 가졌는데도…….’
카리나는 롤랜드와 멜리사의 버팀목이 되고 싶었다.
모든 걸 다 잃어도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어서,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녀가 생애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 진정한 가족이 되어 주고 싶었다…….
따라서 카리나는, 살아야 했다.
하지만 점점 악화되는 상황은 카리나가 안전한 고치에 틀어박히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쾅!
클로드가 몇 미터를 날아와 캐비닛에 부딪쳤다.
카리나는 이를 악물었다.
예상대로 클로드가 밀리고 있었다.
만약 단순히 통증 때문이라면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마법사가 마음 놓고 날뛸 수 있는 공간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이 창고 때문이야.’
본디 마법사의 연구를 위해 설계된 창고는 당연히 마법사에게 친화적인 환경이었다.
그게, 전투라 할지라도.
클로드가 캐비닛에 등을 기대더니,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 사이, 마법사는 그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클로드는 카리나를 보호하려는 생각인지 황급히 캐비닛에서 물러섰지만, 오히려 악수가 되고 말았다.
마법사는 캐비닛 바로 옆자리를 차지하고 그를 공격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으니까.
카리나는 열심히 그를 곁눈질했다.
만약 자신에게 그를 기회가 있다면, 지금 이 순간뿐이리라.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줘야 해!’
이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클로드가 죽으면, 카리나 역시 죽게 될 것이다.
카리나 혼자 죽는다면 아이들은 클로드의 가신이 되어서라도 살아갈 수 있지만 둘 모두 죽는다면?
‘희망이 없어.’
마침내 결정을 마친 카리나의 금빛 섞인 녹색 눈이 화르르 타올랐다.
끼이익.
낡은 캐비닛의 철제문이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마법사가 화들짝 놀란 듯 숨을 들이켜며 뒤를 돌아보았다.
카리나는 캐비닛 바닥에 나뒹굴던 검을 꽉 움켜쥐고는 마법사의 옆구리를 있는 힘껏 찔렀다.
“끄아아악!”
마법사의 입에서 거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클로드에게 필요한,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다.
다섯 자루의 검이 마법사의 머리 바로 위와 팔다리 바로 옆마다 하나씩 박혀 오각형을 이루었다.
마법사는 꼼짝달싹도 못 한 채, 숨만 겨우 내쉬었다.
부상을 입기 전 여유 있는 모습과는 달리, 땀범벅이 된 클로드가 마법사의 두건을 거칠게 벗겨버렸다.
‘……!’
카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까만 머리칼 밑으로 검붉은 눈이 형형이 빛나는 마법사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카리나가 놀란 건 흔치 않은 붉은 눈동자 때문이 아니었다.
마법사는 이제 겨우 성인이 된 듯한 젊은 청년이었다.
‘나보다는 무조건 어리겠어.’
많아야 스물 정도일까.
살인을 스스럼없이 시도할 정도라, 나이 많은 능구렁이의 모습을 예상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항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다치기만 할 테니까.”
마법사는 클로드를 한 차례 길게 쏘아보았다.
거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죽으면 죽었지, 네놈에게 비굴하게 빌지는 않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