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카리나는 웃고 말았다.
“와일더 아저씨를 싫어하면, 엄마가 좀 슬픈데.”
“왜요?”
“왜냐하면, 와일더 씨가 내게 많은 걸 가르쳐 주셨거든. 우리가 처음 토르스에 왔을 때, 가장 많은 도움을 주신 것도 와일더 씨야.”
분명, 와일더는 카리나에게 큰 실수를 했다.
그것도 두 번이나.
하지만 카리나는 와일더를 원망하지 않았다.
첫 번째 실수는 고의가 아닌 방심이었고, 두 번째 실수는 나름의 선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기 마련이다.
카리나는 아이들이 단 한 번의 실수로 사람을 미워하는 편협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지 않았다.
“……알았어요. 이제 안 미워요.”
멜리사는 영 내키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어쨌든 와일더를 다시 험담하지는 않았다.
“우린 안전할 거야. 그리고 나쁜 사람은 곧 잡힐 거고. 그럼 된 거 아니겠니?”
“좋아요!”
카리나는 아이들과 함께 아스트리드가 선물한 장난감으로 놀기 시작했다.
“엄마, 이것 좀 보세요.”
“엄마, 이것도요!”
아이들이 각자 자신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카리나에게 보여 주고 싶어 아우성을 쳤다.
“하나씩 볼게, 하나씩.”
카리나는 활짝 웃었다.
그동안 아이들이 두 팔을 벌려도 다 담지 못할 정도의 장난감을 안겨주고 싶었다.
항상 다른 우선순위에 밀려 사 주지 못했지만.
이렇게 선물 받은 장난감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아이들이 아니라 카리나 자신이 아스트리드로부터 선물을 받은 듯했다.
하지만 즐거운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엄마.”
갑자기, 명랑하게 잘 놀던 멜리사가 뻣뻣하게 굳은 목소리로 카리나를 불렀다.
“멜리사? 어디 아파? 다리에 쥐가 내렸니?”
카리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멜리사의 안색을 살폈다.
“엄마.”
그때였다.
롤랜드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카리나의 드레스 자락을 부여잡았다.
“우리, 나가야 해요.”
“나가면 안 돼.”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말이 바로 튀어나왔다.
와일더는 분명 그들이 별채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면 안 된다고 했다.
멜리사가 파랗게 질린 입술을 달싹였다.
“나쁜, 아주 나쁜 사람이 오고 있어요.”
“……!”
카리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멜리사의 손에 들린 장난감이 금속성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위험해!’
와일더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게 틀림없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마법사는 롤랜드가 만들어낸 복제 표식에 속지 않았다.
그 결과,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별채를 노려 마법사가 접근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리 와일더를 탓해 보았자 소용이 없었다.
카리나는 두 아이의 손을 힘껏 움켜쥐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밖으론 안 나가요?”
“안 나가.”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와일더가 한 말의 뉘앙스를 생각해 보면, 별채엔 무언가 보호 마법이 걸려 있는 듯했다.
‘안이 더 안전하다는 말은 맞을 거야.’
카리나는 아이들에게 빠른 목소리로 속삭였다.
“숨을 곳을 찾아보자. 아무도 못 찾을 만한 곳에 숨으면, 그자도 포기하고 나갈 거야.”
어차피 마법사 또한 평범한 인간이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투시력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카리나와 아이들은 2층으로 올라가 숨을 곳을 서둘러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2층엔 빈방이 많아, 숨을 구석을 찾기 어렵지는 않았다.
‘여기다.’
카리나는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찬 방에 아이들을 밀어넣었다.
“엄마, 엄마는요……?”
롤랜드가 겁먹은 얼굴로 물었다.
“엄마는 다른 방에 있을게.”
“같이…… 같이 있으면 안 돼요?”
멜리사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카리나를 올려다보았다.
“안 돼.”
카리나는 엄하게 말했다.
“우리 셋이 모여 있으면, 열이 많이 나서 금방 들킬 거야.”
다행히 롤랜드와 멜리사는 그 뻔한 거짓말을 믿어 주었다.
‘착한 녀석들.’
카리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이들이 숨은 방문을 닫았다.
당연히, 그녀는 다른 방에 숨을 생각이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카리나는 차분히 1층으로 내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어딘가 서늘하게 느껴지는 바람이 앞머리를 스쳤다.
그녀는 별채에 붙어 있는 창고로 후다닥 달려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마법을 한 번 쓰면 영원히 멈추지 않는다는 게 저주처럼 느껴졌어.’
하지만 지금은 축복이었다.
아이들을 지킬 수 있는 축복.
제아무리 그 마법사가 강하다고 한들, 끝없이 가해지는 공격 마법에 어떻게 버티겠는가?
카리나에게 필요한 건, 아주 약간의 공격 마법이었다.
클로드가 그녀를 위해 준비한 창고에서 충분히 구할 수 있을 법한.
카리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창고의 육중한 문을 열었다.
“헉……!”
카리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창고에는 이미 사람이 있었다.
‘마법사야!’
심장이 미친 것처럼 팔딱거리기 시작했다. 카리나는 등을 돌려 달아날 준비를 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카리나의 귓가를 스쳤다.
“가만히 있어.”
카리나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어둠 속에서 작은 도깨비불 하나가 떠올랐다.
푸른 불빛에, 새파란 눈이 비쳐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카리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공작, 각하……?”
안도감이 휘몰아쳤다.
‘살았어……!’
클로드였다.
마법사가 아니라……!
클로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일더가 분명히 별채 밖으론 나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클로드의 어조는 질책을 띠고 있었다.
“여기도 별채의 일부 아닌가요?”
“……그거야 그렇다만.”
클로드가 그녀에게로 성큼 걸어 다가왔다.
카리나는 위압감에 질려 뒤로 살짝 물러났으나 이내 클로드에게 팔을 붙들리고 말았다.
“각하?”
“이 안에 있어.”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일 새도 없이 창고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
창고는 그동안 봐 왔던, 마법사라면 누구나 꿈꿀 법한 아지트 같은 모양새가 아니었다.
오히려 각종 마법 재료들이 모두 사라져, 휑한 모습만 남아 있었다.
카리나는 이내 그 이유를 깨달았다.
‘마법사의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은 다 치워두었어.’
곧, 이곳은 클로드와 마법사 사이의 격전지가 될 것이다.
그래서 카리나는 클로드가 창고 구석의 캐비닛을 열었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들어가.”
카리나는 캐비닛 안으로 들어간 다음, 살짝 열린 문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그자가 정말로 여기로 올까요?”
“당연하지. 표식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공작저 안이고 하나는 밖이다. 뭐가 진짜라고 생각하겠나?”
카리나는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와 와일더는 괜한 계획을 꾸민 셈이었다.
‘아니야.’
좀 더 정확히는, 자진해서 미끼가 된 셈이었다.
공작저 밖으로 나간 표식이 미끼가 되는 게 아니라, 공작저에 남아 있는 표식이 미끼가 되었으니.
카리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밖에서 돌아다니는 표식이 가짜겠죠.”
“그래. 허나…….”
클로드는 별채와 붙어져 있는 벽을 바라보았다.
“별채에는 내가 직접 보호 결계를 쳐 두었다. 오직 공작저의 일원만 드나들 수 있도록.”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그럼 저희도 공작저의 일원이라는 건가요?”
“일단은, 부인과 아이들도 공작저의 손님이긴 하니까.”
“저는 정말로 괜히 나온 거네요. 안에 얌전히 있었으면 계속 안전했을 텐데…….”
클로드의 반응은 제법 복잡했다.
그는 카리나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잘못된 소리를 들은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곧 그는 그 이유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부인이 아예 틀린 선택을 한 건 아니야. 그자가…… 이 벽을 뚫으면, 부인과 아이들은 무방비로 노출되었을 테니까.”
클로드는 별채와 이어진 벽면을 가리켰다.
그는 조금 씁쓸하게 덧붙였다.
“나는 대장장이지, 결계사가 아니거든. 그래서 완벽한 결계는 만들지 못해. 지금 이 결계도 꼼수를 좀 부려서 만들어 둔 거다.”
카리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래서 여기로 오신 거군요. 저와 제 아이들을…… 지켜 주시려고.”
“엄밀히 말하자면, 틀렸다.”
클로드가 냉정하게 지적했다.
“공작저엔 베가의 세작이 있어. 그자가 이미 많은 정보를 털어 주었겠지. 당연히 별채의 유일한 급소도 알려주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자를 기다리고 계신 거네요?”
“그래.”
클로드는 이제 충분히 설명해 주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카리나를 캐비닛 안으로 밀어 넣었다.
카리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캐비닛은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해 기침이 절로 나왔다.
심지어 쓰다 만 잡동사니들이 바닥에 널려 있어, 하마터면 녹슨 검에 찔릴 뻔하기도 했다.
카리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날붙이들을 한구석에다가 몰았다.
자칫해서 베였다간 파상풍에라도 걸릴 것처럼 더러운 무기들이었다.
“괜찮은가?”
“괜찮아, 에취, 보이세요?”
“잠시만 참아라.”
클로드는 캐비닛 문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다행히 오래된 캐비닛은 틈이 크게 벌어져 있었기에, 카리나는 틈 사이로 창고 안을 바라볼 수 있었다.
클로드의 말대로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마법사.”
마법사의 기척이 미처 느껴지기도 전에 클로드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
시커먼 두건을 머리 깊숙이 눌러쓴 마법사는 당황한 모양인지 곧바로 등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다.
끼이익.
열려 있던 창고의 문이 클로드의 손짓과 동시에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