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
말문이 턱 막혔다.
카리나는 울컥하고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덩어리를 억지로 삼켰다.
자칫했다간 짐승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올 것 같았기에.
롤랜드뿐만이 아니었다.
“저도 할래요. 저도 할 수 있어요.”
롤랜드보다 조금 짧은 다리로 열심히 달려온 멜리사가 자그마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와일더,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설명해 주겠어?”
아스트리드가 와일더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수정 같은 눈동자가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카리나는 생각했다.
아스트리드와 클로드는 피가 섞이지 않을지언정 서로 많이 닮은 남매라고.
와일더가 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공녀님.”
“입 다물어, 와일더.”
아스트리드가 쏘아붙였다.
“엿들은 건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각하께서도 반대하는 일을 강요하다니…… 블로에 부인에게 뭐 하는 짓이지?”
“…….”
와일더는 입을 꾹 다물며 시선을 회피했다.
“당장 각하께 보고를 올려야겠어.”
아스트리드는 당당하게 등을 돌렸다.
하지만 카리나는 소녀의 어깨가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무서운 거구나.’
아스트리드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클로드에게 보고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카리나를 위해서.
“잠깐만요, 아스트리드 님.”
카리나는 부드럽게 아스트리드를 불렀다.
“멜리사, 롤랜드. 너희도 내 말 좀 들어보렴.”
아스트리드와 멜리사, 그리고 롤랜드는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너희…… 어디까지 엿들었지?”
“……처음부터요.”
카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냐, 차라리 잘 됐어.’
처음부터 들었다는 건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 알겠구나. 나는 너희들을 위험에 빠트릴 생각이 없어.”
“그럼 엄마가 미끼가 되어야 하잖아요!”
롤랜드가 눈물을 글썽였다.
카리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언제 미끼가 되겠다고 했니?”
“그건 아니지만…….”
카리나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잘 들어. 나는 미끼가 되지 않을 거야.”
“블로에 부인!”
와일더가 그녀를 소리쳐 불렀으나 카리나는 무시했다.
“와일더 씨가 지금 내 입을 다물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미끼 역할 또한 억지로 맡길 수 없어.”
카리나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공평하게 롤랜드 한 번, 멜리사 한 번.
“그러니까 안심하렴, 둘 다. 그리고 아스트리드 님도요.”
“…….”
아스트리드는 대답 대신 카리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와일더가 비아냥거리며 물었다.
“그럼 보호만 받으면서 살겠다는 건가? 평생 동안?”
“아뇨.”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 피를 호문쿨루스에 섞으면 표식을 복제할 수 있다고 하셨죠.”
“그렇지. 보아하니 부인의 아이들은 이미 호문쿨루스를 움직여 본 경험이 있는 듯한데…….”
“아이들을 이용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카리나는 단호하게 와일더의 말을 끊었다.
“그런데, 표식을 복제할 방법이 호문쿨루스밖에 없나요?”
“아……!”
와일더가 대답하기도 전에, 롤랜드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니어도 돼요! 호문쿨루스 말고, 다른 것도 많아요!”
카리나는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웃었지만, 속은 편치 않았다.
“예를 들면?”
“호문쿨루스를 만들기 위해선 그 원형이 되는 마력 덩어리가 필요하거든요. 그걸 계속 발전시켜야 호문쿨루스가 되는 건데…… 발전만 시키지 않으면, 위험하지 않아요!”
롤랜드는 신이 났는지 열심히 조잘거렸다.
항상 마법을 꺼리기만 했던 롤랜드가, 이렇게 즐거워하며 마법을 설명하는 건 처음이었다.
카리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와일더를 향해 말했다.
“그렇다네요. 와일더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생각해 볼 만한 방법이야. 하지만 호문쿨루스의 원형을 만드는 것도 쉽지는 않을 거다, 꼬맹아.”
카리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위험한가요?”
“위험하지는 않지.”
와일더가 천천히 말했다.
카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와일더는 자신에게 표식을 남긴 마법사만 잡을 수 있다면 그 어떤 방법도 가리지 않을 듯했다.
아이에게 위험한 마법도, 위험하지 않다고 바꿔 말하는 건 이 남자에게 손쉬운 일이리라.
와일더가 롤랜드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말해 보거라, 꼬맹아. 호문쿨루스를 만들어 본 적이 있니?”
롤랜드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멜리사도 저도, 만들어진 호문쿨루스를 이용하기만 해 봤어요. 만든 적은 없고요.”
“그래? 그럼 호문쿨루스의 원형도 만든 적이 없겠군.”
“아니에요. 만든 적, 있어요.”
“정말이냐?”
와일더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였다.
“네.”
롤랜드는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딱, 한 번이지만…….”
“한 번이면 충분하지. 한 번 만들어 보거라.”
“여기서요?”
와일더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카리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걱정할 것 없어. 호문쿨루스의 원형은 그냥 마력 덩어리일 뿐이니까. 잘못된다 하더라도 그냥 실패할 뿐이다. 부인이 겪었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롤랜드가 카리나를 향해 눈을 빛냈다.
“엄마, 와일더 아저씨의 말이 맞아요. 이 정도야 전혀 어렵지 않아요!”
“……해 보렴.”
카리나는 롤랜드를 말리지 않았다.
단순히 둘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었다.
카리나의 지식으로도 와일더와 롤랜드의 말이 옳다고 충분히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마력 덩어리만 만든다면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다만 표식을 옮겨올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마력 덩어리여야 하기에, 상당히 까다로울 뿐이다.
롤랜드는 잠시 눈을 감고 집중했다. 아이의 머리카락이 중력을 거스르며 허공에 붕 떴다.
마력의 흐름은 훈련받은 자가 아니면 눈치챌 수 없다.
하지만, 지나치게 강한 마력은 가시적인 확인이 가능했다.
바로 지금처럼.
“부인, 이건…….”
“쉿.”
카리나는 쟁반 만한 눈으로 감탄사를 터뜨리려는 와일더의 입을 다물게 했다.
마법에 집중하는 롤랜드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롤랜드는 어깨너비만큼 벌린 두 손 사이로, 천천히 마력 덩어리를 만들었다.
그 모습은 숨을 내쉬는 것처럼 편해서, 순간 아주 기본적인 마법을 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간단해 보이던 마력 덩어리는 복잡한 패턴이 표면에서 반짝이는 구체로 바뀌었다.
“천재군, 부인의 아들은.”
와일더가 신음했다.
“많고 많은 신동을 봐왔지만…… 저런 아이는 처음이다.”
그의 눈은 여태까지 카리나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탐욕과 흥분에 휩싸여 빛나고 있었다.
“…….”
카리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와일더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 롤랜드는 천재였다.
그녀의 어쭙잖은 재능과는 차원이 다른.
하지만 롤랜드의 재능은 저주나 다름없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카리나가 막으려고 열심히 기를 써온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역시…….’
와일더는 동요하는 카리나를 본체만체하고는 마력 덩어리를 롤랜드에게서 조심스럽게 옮겨 받았다.
“여기에 부인의 피를 넣어야 하는데…….”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항상 가지고 다니는 바늘을 꺼내 손가락을 찔렀다.
붉은 피가 비치자 아이들은 자신이 찔린 것처럼 비명을 질렀다.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파.”
카리나는 아이들을 안심시키며 피 몇 방울을 구체에 떨구었다.
‘……!’
구체가 붉은색으로 바뀌며 심장 박동에 맞추어 진동하기 시작했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방금, 표식이 새로이 생성되었다.
어디선가 그녀를 노리고 있을 교활한 마법사를 교란할 표식이.
“서둘러야겠군.”
와일더는 구체를 소중히 감싸더니, 계단을 서둘러 내려갔다. 카리나는 그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제가 해야 할 다른 일은 없나요?”
“없어. 단, 그자가 붙잡힐 때까지 절대 이 별채를 떠나지 말도록.”
와일더는 거듭 말을 되풀이하며 신신당부했다.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가면 안 돼. 부인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야.”
“공녀님, 저희도 가야 합니다.”
아스트리아는 카리나의 아이들과 좀 더 놀고 싶은 눈치였지만, 안드레아의 손에 이끌려 돌아가야 했다.
‘에두아르 씨에게도 알려야 할까?’
자신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별채에서 나가지 말아야 한다면, 에두아르 역시 별채에만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카리나는 다급해 보이는 와일더에게 조언을 구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으나, 금방 해결되었다.
“아, 에두아르도 여기에 있었지.”
와일더가 돌아가기 직전, 별안간 에두아르를 소리쳐 불렀으니까.
“에두아르!”
조금 전까지 야채를 손질하고 있었던 듯, 앞치마에 당근 껍질이 대롱대롱 매달린 에두아르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지?”
와일더는 그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 자네가 필요해. 애당초 자네를 여기 둔 것도 만에 하나 그자가 침입할 경우를 대비해서였으니.”
“알겠다.”
에두아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와일더와 함께 별채를 떠났다.
와일더는 떠나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카리나에게 신신당부했다.
“부인과 아이들에게는 이 집이 가장 안전해. 그러니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밖으로 나오지 말게.”
에두아르와 와일더가 떠나자마자 롤랜드와 멜리사가 새파래진 안색으로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와일더 아저씨랑 에두아르 아저씨…… 괜찮을까요?”
“그럼. 다들 전문가이신걸.”
그때, 멜리사가 토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는 에두아르 아저씨만 좋아요. 와일더 아저씨는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