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카리나는 어리둥절한 척하려 애썼다.
사실, 조금 어안이 벙벙하기는 했다.
‘행동력이 생각보다 빠르구나.’
열심히 클로드에게 설교하기는 했지만 그가 자신의 말에 바로 따라 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아스트리드를 알게 된 건 겨우 며칠 전일 뿐이다.
반면, 클로드와 아스트리드의 관계는 지난 칠 년 동안 꾸준히 악화되었다.
카리나는 말 몇 마디가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바보가 아니었다.
“에드무어로 곧 무역 행렬이 떠날 건데, 원하는 게 있는지 물으셨어.”
“가지고 싶은 게 있으셨나요?”
“딱히 없다고 했더니, 에드무어엔 내가 좋아하는 장인이 살지 않느냐고 하는 거야!”
아스트리드가 열기 띤 목소리로 열심히 말을 이었다.
“당연히 부인이 각하께 그렇게 말씀드린 거겠지. 그렇지?”
카리나는 대답하기 직전 잠시 망설였다.
“뭐……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제가 말씀드렸기 때문에 각하께서 그런 말을 하셨다면, 왜 제게 고마워하시는 거죠?”
아스트리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야, 그런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니까.”
숨이 턱 막혔다.
아스트리드의 목소리엔, 어딘가 옛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순수한 기색이 어려 있었기에.
카리나는 물끄러미 아스트리드를 바라보았다.
갓난아기 시절 공작에게 입양되어, 평생을 그녀가 상상도 하지 못할 부와 권력에 휩싸여 살아온 소녀.
하지만 아스트리드는 유일한 가족이 제삼자에게 등 떠밀려 보여준 작은 관심에도 기뻐했다.
카리나는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어릴 적…… 나잖아.’
어렸던 카리나도,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며 매달렸으니까.
하지만 어머니는 자신에게 끝끝내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래서 고맙다고 인사하러 왔어.”
“이런 걸로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어요, 아스트리드 님.”
“그래도 내가 고마운걸. 싫어?”
아스트리드가 간절한 목소리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면…… 불편해?”
“아뇨, 그럴 리가요.”
카리나는 소녀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애써 미소 지었다.
“그냥 이렇게 직접 찾아오실 일까진 아니라고 생각해서,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부인이 불편하다면 별채로 들어가지는 않을게.”
카리나가 불편하지 않다고 입을 열기도 전에, 아스트리드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안드레아, 선물을 보여 줘.”
“예, 공녀님.”
안드레아는 어딘가 불퉁한 얼굴로 몇 걸음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손에 제법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상자를 들고 있었다.
“열어 봐.”
아스트리드가 명령했다.
카리나는 조금 멈칫하다가, 자신을 향한 명령이라는 게 확실해진 다음에야 상자를 열었다.
“아…….”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상자는 아이들의 눈이 돌아가고도 남을 법한 각종 장난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가지고 놀던 것들이야.”
“빌려주시는 건가요? 감사합니다. 아이들이 잘 놀겠어요.”
“……빌려준다니.”
아스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그냥 주는 거야. 나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 놀기엔 너무 나이를 먹었으니까.”
카리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스트리드 님도 이제 겨우 열두 살…….”
“무엄하다. 감히 공녀님께 어리다고 말하다니.”
안드레아가 딱딱하게 카리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카리나는 콧방귀를 꼈다.
“토르스의 법은 제국법과 다른가요? 토르스에선 스무 살이 아닌 열두 살에 성년이 되나 보죠?”
“…….”
안드레아는 눈살을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리나는 안드레아에게서 상자를 건네받았다.
‘어이쿠.’
값비싼 장난감이 가득 든 상자는 제법 무거웠다.
그래도 아이들이 좋아하리라는 생각에, 얼굴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아스트리드 님, 잠깐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잔 드실래요?”
“……!”
아스트리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래도, 돼?”
“그럼요.”
잠시 후.
롤랜드와 멜리사는 환호성을 지르며 장난감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가지고 놀아도 돼요?”
“그래. 공녀님께서 허락해 주셨어.”
“감사합니다!”
롤랜드는 곧바로 아스트리드를 향해 인사했지만, 멜리사는 말없이 고개만 살짝 숙였다.
다행히 아스트리드는 그 사실에 언짢아하지는 않은 듯했다.
오히려…….
“멜리사, 이걸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
무언가 복잡해 보이는 마차 모형을 쥐고서 열심히 설명하는 게 아닌가.
멜리사는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아스트리드는 열기 띤 얼굴로 마차 모형 뒤의 태엽을 열심히 감더니, 바닥에 내려다 놓았다.
“아……!”
멜리사와 롤랜드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마차 모형이 진짜 말이 끄는 마차처럼 따그닥따그닥 소리를 내며 직진하기 시작했다.
“이런 거, 또 있어요?”
어느새 멜리사의 볼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당연하지.”
아스트리드는 의기양양하게 장난감을 작동해 보였다.
카리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하게 웃다가, 문득 안드레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안드레아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카리나가 계속 서 있느라 불편해 보이는 안드레아에게 의자라도 권하려 할 때였다.
초인종이 울렸다.
‘설마, 또……?’
카리나는 가빠지기 시작하는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면서 문을 열었다.
“……!”
카리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들과 함께 공작저로 다급히 대피한 이후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와일더가 서 있었다.
그는 햇살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카리나의 손을 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반송장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야.”
비꼬는 말투마저 반가워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뭐니 뭐니 해도 와일더는 카리나가 토르스에 자리를 잡게 해 준 일등공신이나 다름없었다.
“공작 각하 덕분에 아주 멀쩡하답니다. 와일더 씨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잘 지냈을 리가.”
와일더가 툴툴거렸다.
“그 빌어먹을 집에 반쯤 갇혀 지냈는데, 아주 답답해서 좀이 쑤실 지경이더군.”
“와일더 씨도 이젠 공작저에서 지내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
와일더는 안으로 발을 성큼 들였다.
“안녕하세요, 와일더 씨.”
“잘 지냈나, 와일더.”
아이들과 아스트리드가 와일드를 보고 인사했다.
와일더는 아스트리드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다들 활기차시군요. 이 늙은이는 젊은 분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와일더는 별채가 제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2층으로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카리나는 집 구조를 꿰뚫고 있는 그를 보며, 한때 그 역시 이 별채에 머물렀으리라고 생각했다.
“좋은 집이지.”
“네. 과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은 자세야. 돌아갈 때가 되면 아쉬워지거든.”
카리나는 아이들이 떠들며 노는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시죠?”
“단순히 안부를 묻기 위해서…… 라면 안 믿을 것 같군.”
“그럼요.”
카리나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아시잖아요. 저는 빙빙 둘러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와일더는 눈을 가늘게 뜨고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부인, 범인이 토르스에 있다.”
“……!”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그동안 그녀는 사건의 진전에 대해 단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그녀 자신이 거부한 탓이었으니 불만은 없었으나, 이렇게 듣게 되니 귀가 번쩍 뜨이는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자를 잡는 데 부인의 도움이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