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입양합니다 (41)화 (41/145)

<41화>

침묵이 흘렀다.

카리나는 입에서는 부드럽게 녹아내렸던 연어 스테이크가 속에서 얹히는 느낌까지 들었다.

하지만 공작 남매의 다툼에 함부로 끼어들 수도 없었다.

옛말에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과하거라.”

아스트리드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미, 미안해, 블로에 부인. 내가…… 그런 부탁을 해 놓고 말을 바꾸어서.”

“저야 전혀 상관없으니까, 마음 놓으세요.”

카리나는 뒤늦게 수습을 시도했지만 즐거워야 할 식사 시간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아스트리드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별채를 빠져나갔다.

클로드가 진심으로 미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스트리드의 행동에 대해선 내가 대신 사과하도록 하지.”

“각하께서 사과하실 건 아무것도 없어요. 공녀님께서 왜 그러셨는지도 알 것 같고요.”

카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그녀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스트리드가 왜 날카롭게 반응했는지 알 것 같아서 더더욱.

“공녀님은…… 각하를 정말로 불편해하시는 것 같아요.”

“부인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던가.”

클로드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아스트리드는 나를 오빠로 생각하지 않는 듯해.”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걸요.”

아무리 대귀족에, 나이 차이가 크게 난다고 해도 아스트리드는 지나치게 클로드를 겁내고 있었다.

“사실은, 아스트리드에게 이름 한 번 불려보는 게 소원이야. 우린 서로에게 유일하게 남은 가족이니까.”

“공녀님이 각하를 그렇게 어려워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

클로드는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입을 떼었다.

“그다지 비밀이랄 것도 없으니…… 부인이 알아도 달라질 건 없겠지. 아스트리드는 내 친동생이 아니야.”

“……!”

카리나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가능성이었다.

아스트리드는 클로드와 전혀 닮지 않았다. 하지만 닮지 않은 남매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아스트리드의 친부모는 원래 우리 가문의 가신이었어. 부부가 함께 임무를 수행했는데, 실패하고 같은 날 사망했지.”

클로드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때 나는 열다섯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일을 도와야 했어. 내가 유품을 수습하기 위해 그들의 집에 가 보니, 유모가 갓난아기 한 명을 어르고 있더군.”

“그럼…….”

“그래, 그 아기가 아스트리드야.”

클로드는 빠르게 설명했다.

이 화제를 최대한 빨리 끝내버리고 싶은 것처럼.

“그들은 유품을 정리할 친척마저 없었어. 아버지께서 거두지 않았더라면 아스트리드는 공립 고아원으로 갔겠지.”

카리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선대 공작 각하께선 공녀님을 입양하신 거군요. 고아원으로 보낼 수가 없어서.”

“그래.”

입양은 보통 두 가지 이유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서.

또 다른 하나는 사생아를 정식으로 입적하기 위해서.

그 어디에도 선대 공작 부부가 아스트리드를 입양한 것과 같은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생아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 아버지도 아스트리드처럼 검은 머리칼이었으니.”

“…….”

카리나는 그 간단한 설명으로, 아스트리드가 여태까지 받아왔을 압박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사생아에 대한 인식을 평생 겪어 왔으니까.

설령 친자로 입적된다 해도 그들에 대한 시선은 좋지 않았다.

부모가 지극정성을 쏟지 않은 이상 친자로 입적된 귀족의 사생아조차 아들은 방랑 기사가, 딸은 나이 많은 상인의 후처가 되는 게 대부분이었다.

뭐…… 카리나처럼 입적이 되지 않는 사생아라면, 평생을 사람들의 괄시 속에서 살아야 했고.

아스트리드는 사생아가 결코 아니었지만 사생아라는 억측 속에서 살아왔다.

당연히 자신이 가진 지위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클로드를 지나칠 정도로 겁내는 것도 그 때문이었고.

“아스트리드의 행동에 대해서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불쌍한 아이니 잘 대해 줘. 오빠로서 하는 부탁이다.”

카리나는 클로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못 들어줄 것도 없는 부탁이다. 아스트리드의 성정이 나쁘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더더욱.

하지만, 그녀가 클로드의 부탁을 받아 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각하께서 공녀님이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되실 생각은 없나요?”

클로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다행히 다소 무례하게 들릴 수 있는 카리나의 말에 언짢아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카리나의 말을 말 그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카리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제가 공녀님께 잘 대해 드린다 한들, 각하만 한 존재는 되지 못해요.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는 하나 공녀님의 가족은 각하뿐이잖아요.”

클로드의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 진짜 가족이라면 피가 섞였든, 섞이지 않든 그게 무슨 대수던가요.”

카리나는 렝케 경의 친딸이었으나 그를 결코 아버지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물론, 렝케 경 역시 그녀를 좋은 도구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카리나의 진짜 가족은 롤랜드와 멜리사였다.

그녀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러니 공녀님과 잘 지내시는 건, 공작 각하셔야 해요. 생판 남인 제가 아니라.”

“하지만…… 방법을 모르겠어.”

클로드는 두 팔을 어깨 아래로 늘어뜨렸다.

“아주 어릴 땐 나를 잘 따랐지.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엔…… 내 모습만 보이면 도망치곤 해.”

“외람되오나 선대께선…….”

“내가 성인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클로드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카리나의 머리가 바삐 돌아갔다.

아스트리드와 클로드의 나이 차는 열다섯.

클로드는 지금 스물일곱이었으니, 선대 공작 부부는 7년 전에 죽었다는 말이 된다.

“공녀님은 겨우 다섯 살이셨군요.”

“계산이 빠르군.”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잘못이 없다곤 할 수 없겠지. 몇 년간…… 일에 치여 어린 아스트리드를 거의 방치했으니까. 그 아이가 무슨 말을 듣는지도 모르고…….”

클로드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카리나는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다.

부모가 죽은 후, 젊은 나이에 즉위한 공작은 나이 차 많이 나는 여동생을 본체만체했다.

아스트리드가 사생아라는 가설에 힘을 더 실어 주기만 했을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공녀님은 제게도 쉽게 마음을 여셨죠. 그만큼 여리시다는 거예요.”

“……내게 아직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나.”

“그럼요.”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 조건이 한 가지 있어요.”

“뭐지?”

“공녀님에게 관심을 가져 주세요.”

클로드가 억울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나는 아스트리드를 충분히…….”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각하, 공녀님이 좋아하는 게 뭔지, 싫어하는 게 뭔지, 관심사가 뭔지…… 아시나요?”

“……아주 모르지는 않아.”

“공녀님께서 좋아하는 도자기 장인이 누구인지 아시나요?”

“…….”

클로드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공녀님은 그 장인의 잔을 저에게 자랑하셨어요. 잔이 예뻐서가 아니라, 각하께서 직접 수도에 사는 장인의 잔을 주문해 주셨다고요. 공녀님을 위해서.”

“……전혀 몰랐다.”

클로드는 기가 영 죽은 목소리였다.

카리나는 미소 지었다.

갈 길이 멀었지만, 아주 어려운 상황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전 각하께서 뭘 크게 잘못하셨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아요. 단지, 방법을 모르셨던 것뿐이죠.”

카리나는 진심을 다해 말을 이었다.

“하나만 기억해 주세요. 공녀님은 아직 어리고, 아이들은 작은 관심에도 기뻐한다는 걸.”

침묵이 흘렀다.

클로드는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는 눈빛으로 카리나를 응시했다.

“……고맙다.”

“고맙다면, 각하의 역할을 제게로 미루지 마세요.”

카리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에겐 이미 두 아이가 있었다.

한 명을 더 맡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것도 멀쩡히 가족이 있는 아이를.

“……그렇군. 내가 내 역할을 부인에게 떠넘기려고 했어.”

“그걸 아시는 분이, 여기서 뭘 하고 계시는 거죠? 공녀님이 크게 상심하셨잖아요. 얼른 가 보세요.”

클로드는 황급히 별채를 나섰다.

카리나는 뒤를 돌자마자 동그랗게 뜬 두 쌍의 파란 눈동자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너희들, 전부 엿들었던 거니?”

“…….”

롤랜드와 멜리사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도르르 굴렸다.

카리나는 화난 체를 해 보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는 모양이었다.

롤랜드가 순진한 목소리로 묻는 걸 보면.

“엄마,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알아요?”

“당연하지.”

카리나는 웃음을 꾹 참으려다 실패하고 말았다.

“롤랜드는 달콤한 건 전부 좋아하잖아. 쿠키도 좋아하고, 크림도 좋아하고, 과일도 좋아하고…… 대신 오렌지는 싫어하지.”

롤랜드는 렝케 경과 함께한 식사 중 억지로 오렌지를 삼키다 목에 걸린 이후로는 좋아하지 않았다.

카리나도 아이가 싫어하는 과일을 굳이 먹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시장에서 과일을 고를 땐 오렌지를 제외하곤 했다.

멜리사는 롤랜드와 같은 질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간절한 얼굴로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멜리사도 달콤한 걸 좋아하지. 양파랑 마늘처럼 매콤한 것도 좋아하고…… 그치만 제일 좋아하는 건 과일잼.”

“맞아요.”

멜리사가 눈을 반짝 빛내더니, 카리나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나, 나. 엄마가 뭘 좋아하는지도 알아요.”

“뭘 좋아하는데?”

“엄마는 생선을 좋아해요.”

“으응?”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맞아요. 엄마는 생선을 먹을 때가 제일 신나 보여요.”

그러고 보니, 부드러운 생선 살을 육고기보다 더 선호하기는 했다.

고향과 달리 토르스의 시장에는 신선한 생선들이 넘쳐나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돌기도 했다.

“그러네. 맞췄어.”

멜리사는 꺄꺄 소리를 지르며 카리나에게로 안겨들었다.

포근한 온기가 카리나를 감쌌다.

카리나는 생각했다.

이 아이들만 있다면, 그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다고.

다음날 오후.

아스트리드가 상기된 얼굴로 카리나를 찾아왔다.

이번엔 안드레아도 함께였다.

“블로에 부인!”

“무슨 일이세요, 공녀님?”

카리나가 정중하게 묻자 아스트리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으, 아스트리드라고 불러 주면 안 돼? 어제처럼?”

“알겠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아스트리드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새초롬하게 대답했다.

“고맙다고 하려고.”

카리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스트리드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어제 그녀가 공작에게 질책을 듣게 만든 원흉이었다.

“뭐가요?”

아스트리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름대로 평정을 되찾으려는 시도로 보였는데, 그다지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늘, 각하께서 찾아오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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