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배후는 베가 왕국입니다.”
툭.
만년필이 책상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클로드는 고개를 들고 충직한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지, 치체스터 경?”
“접선을 담당하던 첩자를 잡아냈습니다. 배후는 베가 왕국입니다.”
치체스터 경은 담담하게 방금 한 말을 되풀이했다.
클로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은 베가의 방식이 아니야. 붙잡히면 그렇게 자백하도록 교육받은 게 아닌가?”
치체스터 경이 클로드에게 보고서를 건넸다.
“이미 베가에서 확인을 끝냈습니다. 여동생이 베가 왕궁에서 시녀로 일하더군요. 각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평민이 왕실의 시녀라는 건,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겁니다.”
“…….”
빠르게 보고서를 훑어내린 클로드가 한숨을 토해냈다.
“블로에 부인이 나를 더더욱 원망하겠군.”
“각하의 책임은 아닙니다.”
“내 책임이 맞아.”
클로드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와일더도 부인이 마땅히 들어야 할 경고를 해주지 않았지.”
“블로에 부인이 그렇게 말하덥니까?”
클로드는 창밖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아니.”
치체스터 경의 목소리가 엄한 기색을 띠었다.
“각하, 제게 거짓말은 안 통합니다.”
클로드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알겠어, 알겠어. 블로에 부인이 날 그렇게 원망하더군. 하지만 맞는 말이지 않나.”
치체스터 경은 굉장히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클로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잘됐어. 베가의 마법사는 몇 되지 않으니, 후보군을 찾아내기도 쉽겠군.”
“베가에서 제국의 마법사를 회유했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히 마정석을 활용한 공격은 제국 마법사의 방식이지.”
토르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베가 왕국은 마법사들을 음험한 족속이라 여겨 꺼렸다.
그도 그럴 것이, 선대 베가 왕들 중 왕실 마법사를 가까이하다가 그만 마법에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된 경우가 더러 있었던 것이다.
지금 베가 왕국의 왕은, 즉위하자마자 왕실의 모든 마법사들을 쫓아내고 배척했다.
당연히 이는 국력의 손실로 이어졌고, 베가 왕은 그러한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대륙 최정예 암살자들을 키워냈다.
이미 그 암살자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픈 상황이었는데, 마법사까지 이용하기 시작했다면 황실에 보고를 올려야 할 만큼 큰 안건이었다.
“배후가 베가라는 걸 아는 자는 몇이나 되지?”
“저, 심문관, 베가 현지 조사를 담당하던 정보원입니다.”
“이름은?”
클로드는 둘의 이름을 듣자마자 곧바로 생김새는 물론 성격까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에게 남은 고문관과 정보원을 모두 합쳐 보았자 다섯 명이 채 되지 않았으니까.
“모두의 입을 단속해. 그 둘에게 이번 사건은 이미 끝난 것으로 한다. 이후 처리는 모두 내가 맡겠어.”
“각하, 황실에 바로 보고를 올리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치체스터 경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무리 인력이 부족하다고는 하나 공작이 직접 움직인다는 건 단 한 가지만을 의미했다.
조용히 해결할 것.
“해결하고 말씀드리겠다.”
“그래도 황실의 도움을 얻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 도움의 대가로, 폐하의 진노를 얻게 되겠지. 그리고 이번엔 또 뭘 요구하실지…….”
“어차피 더 가져갈 인재도, 자원도 없습니다.”
치체스터 경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알려서 잃을 건 없다고 봅니다.”
“모르지. 이제는 직할령이라도 요구하실지도.”
“설마……!”
“그밖에 더 있나?”
클로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내게 남은 게 땅밖에 더 있나. 인재는 모두 남에게 빼앗기고, 귀중한 자원은 모조리 폐하께 가져다 바쳤는데.”
물론 남부는 이빨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비옥한 토양 덕에 토르스에서 나는 작물들은 제국에서 제일가는 품질이었기에 금고의 재물이 동나는 날은 없었다.
하지만 세상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사람의 충성처럼.
토르스에게는 불행히도 황실의 진노 역시 돈으로 해결이 안 되는 문제 중 하나였다.
“마지막 남은 마정석 광산의 채굴권도 작년에 가져가셨지.”
클로드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무려 백여 년 전에 일어난 남부의 원죄는, 아직 잊히려면 한참 멀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독자적인 공국을 세우려 한 반역자였다.
당연히 삼대가 멸족해야 마땅했으나 당대의 황제는 다섯 살에 불과했던 막내아들을 살려주었다.
막내아들이 장성하여 선선대 토르스 공작이 된 이후, 남부와 황실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러나 클로드는 실상이 그렇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내가 죽어 반역자의 핏줄이 완전히 끊겨야 만족하시겠지.’
치체스터가 생각에 잠긴 클로드에게 현재 상황을 일깨웠다.
“하지만 각하, 베가 왕국은 만만한 자들이 아닙니다.”
“베가까지 들어갈 생각은 없어. 제국 마법사를 회유했다면, 그자는 아직 이 근방에 있겠지.”
클로드는 확신에 찬 어조로 덧붙였다.
“베가에서 마법사가 거리를 활보한다면 돌팔매질을 당할 테니까.”
치체스터 경이 의아하게 물었다.
“설마, 토르스에서 그 마법사를 잡을 생각입니까?”
“와일더가 좋은 미끼가 될 거야.”
치체스터 경이 한숨을 토해냈다.
“……와일더의 생각이군요.”
“물론이지.”
“그 영감은 이제 자기가 나이를 지긋이 먹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클로드는 싱긋이 미소 지었다.
“경이 은퇴하는 날 자기도 내 뒤치다꺼리를 끝내겠다고 하던데.”
“그 분수도 모르는 놈……!”
치체스터 경이 이를 으득 갈았다.
“역시 예전에 목을 잘라 버려야 했습니다.”
그가 와일더에 대해 불평하는 건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클로드는 다시 보고서로 눈길을 돌렸다.
‘첩자는 남부와 남서부를 오갔다. 이 말은…….’
그는 보고서를 탁, 하고 덮었다.
남서부는 수도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걸 제외하면 첩자가 흥미를 가질 거리는 아무것도 없는, 재미없는 동네였다.
“마법사는 수도에 있겠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치체스터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로 갈 수는 없겠고.”
“가시더라도 그 복잡하고 숨기 쉬운 곳에서 범인을 잡아내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역시 와일더를 이용해야겠군. 걱정하지 말게. 자네 친우의 목숨을 허무하게 날리지는 않을 테니까.”
“각하, 누가 누구의 친우라고……!”
클로드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적이 출근하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확인하지 못할 정도로 꼼꼼하지 못한 자다. 덫에 걸리는 건 시간문제야. 그러면…….”
클로드의 말이 우뚝 끊겼다.
마법사를 잡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블로에 부인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군요.”
치체스터 경이 그가 할 말을 대신 끝내주었다.
“블로에 부인에게는 집이 없어.”
클로드가 딱딱하게 말했다.
“내가 보았다. 방랑 기사들조차 묵을 것 같지 않은 여관에서 아이 둘과 함께 지내고 있더군.”
“그 또한 그 여인의 삶입니다.”
클로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경이 옳아.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의 생활을 재단하겠나. 다만……. 아니다, 그만하도록 하지.”
클로드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못난 생각을 그대로 삼켰다.
하지만 치체스터 경은 어릴 때부터 모신 주인의 마음을 투명한 물처럼 꿰뚫어 보았다.
“그 마법사를 잡고 싶지 않으시군요. 이 일이 해결되면 블로에 부인이 떠날 테니까.”
“……좀 달라.”
“그럼, 마법사를 잡고 싶긴 하되 블로에 부인 또한 떠나지 않기를 바라신다고 정정하겠습니다.”
늙은 시종장의 입에 놀리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클로드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기실 그의 마음은 치체스터 경이 표현한 저 못난 내용 그대로였으므로.
“사실 이 늙은이는 각하께서 블로에 부인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을 보이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클로드는 얼굴을 찡그렸다.
“블로에 부인의 재능은…… 천부적이야. 그런 인재를 놓칠 수는 없지.”
“정 그러시다면 지금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무슨 뜻이지?”
“블로에 부인이 공작저에 머무르는 이때, 최선을 다해 설득하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군.”
“블로에 부인은 지금 각하의 은혜를 입고 있으니, 예전처럼 문전 박대하지는 못할 거고요.”
“잠깐, 부인이 나를 문전 박대한 적은 없어.”
치체스터 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습니까? 분명, 그 어느 경우에나 말씀을 꺼내자마자 거절당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할 말이 없군.”
클로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딜 가십니까?”
“자네의 말에 따르러.”
“블로에 부인한테요?”
“그럼 누구겠나.”
클로드는 보고서를 다시 치체스터 경에게 건네주었다.
“다 외웠으니, 경이 다 보관하게.”
“알겠습니다.”
클로드는 빠른 걸음으로 카리나가 묵는 별채를 향해 걸어갔다.
뒤에서 치체스터 경이 무어라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뻔해. 블로에 부인에게 무슨 그렇게까지 공을 들일 이유가 있냐고 잔소리하려는 거겠지.’
자그마한 별채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모양새였지만 그 안은 보물을 품고 있었다.
마치, 카리나처럼.
그는 현관문 앞에 서서 크게 한 번 심호흡했다.
‘뭐라고…… 말하지?’
생각해 보니 다짜고짜 들어서서 가신이 되어 달라고 또다시 말하는 건 뭔가 아닌 듯했다.
클로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부인을 만나지 못한지 꽤 오래되었지.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부터 물어보아야겠어.’
처음엔 안위를 물어보다가, 그다음엔 다시 가신 제의를 한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잠시 후 문이 열렸다.
클로드는 조금 긴장한 채 첫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군.”
카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초롬한 입매에서 어리둥절한 듯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어…… 이틀만이네요.”
그러고 보니, 체감만 길었지 정말 이틀만이었다. 클로드는 자신의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카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뭐…… 긴 이틀이긴 했죠. 들어오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