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
안드레아는 어찌나 놀랐는지, 팔을 늘어뜨리다 테이블을 쳐 손이 크림과 잼 범벅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손을 정신없이 닦는 사이, 아스트리드가 중얼거렸다.
“정말 힘들어. 뭘 제대로 먹을 수도 없고…….”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공녀님처럼 늘 예법을 지켜야 한다면,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그래도 나는 예법을 지켜야 해.”
카리나는 진심으로 의아해졌다.
클로드는 토르스의 공작임에도 그다지 예법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공작부터 예법을 지키지 않는데, 그의 여동생인 공녀가 지켜야 하는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뭐, 여기가 황실 연회라면 지켜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냥 편하게 드시면 안 돼요?”
아스트리드는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카리나처럼 세차게 내젓는 게 아닌, 아주 살짝 흔드는 우아한 고갯짓이었다.
“……편하게? 나는 편하게 먹을 수 없어. 편하게 먹으면 안 돼.”
“왜죠?”
“그건…….”
아스트리드는 ‘왜’라는 간단한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못 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안드레아가 기가 막힌다는 듯 소리쳤다.
“뭘 그리 당연한 걸 묻습니까. 이 토르스의 공녀이시니까요!”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당장 공녀님이 예법을 지키지 않고 편하게 차 좀 마신다고 해서 흉을 볼 사람은 여기서 시녀님밖에 없어 보이는걸요.”
“…….”
안드레아는 말문이 막힌 듯한 얼굴이었다.
사실, 카리나는 그렇다면 토르스의 공작은 왜 예법을 지키지 않느냐고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그 말을 공작의 여동생 앞에서 꺼내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은 있었다.
“완벽한 예법은 당연히 자랑스러우실 만해요. 하지만 그 예법을 온종일 지키느라 괴로우시다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침묵이 흘렀다.
안드레아는 여전히 멍하니 카리나를 바라보았고, 아스트리드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마침내 그녀의 입이 열렸다.
“……나, 괴로운 거였구나.”
“아까부터 불편해 보이셨어요.”
카리나는 부드럽게 일깨워 주었다.
자신이 입에서 사르르 녹는 복숭아 절임과 생딸기 타르트, 스콘 하나를 먹어 치우는 동안 아스트리드는 손가락만 한 카스텔라를 반입 베어 물었을 뿐이었다.
배가 부르다거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카리나는 아스트리드가 자신만큼이나 달콤한 음식을 좋아한다고 확신했다.
아스트리드는 카리나가 다과를 하나씩 집어갈 때마다 무척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으니까.
“공녀님, 무시하십시오. 일개 평민의 말을 들어선 안 됩니다.”
카리나는 코웃음을 쳤다.
“일개 평민이나 공녀님이나, 피곤하고 힘든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감히 공녀님을 너 같은 천것과 비교를……”
아스트리드가 안드레아를 올려다보았다.
“안드레아, 블로에 부인을 모욕하지 마.”
“공녀님.”
“잠깐 자리를 비켜 주겠어?”
안드레아는 마른침을 꼴딱 삼키며 카리나와 아스트리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공녀님께서 원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원해.”
안드레아는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아스트리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작고 가냘픈 손 사이로 물기가 비쳤다.
카리나는 그녀에게 자신의 거칠고 장식 없는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마음껏 우셔요.”
아스트리드는 카리나의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힘들다는 거, 어떻게 알았어?”
“제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다 알았을 거예요, 공녀님. 다만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죠. 그 또한 예법에 어긋날 테니까.”
아스트리드는 고개를 들었다.
소녀의 하얀 뺨과 코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물기 어린 목소리가 자그마한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스트리드라고 불러.”
“뭐라고요?”
카리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못 들었어? 아스트리드라고 부르라고.”
“……공녀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 왜 안 돼? 내가 허락했잖아.”
“그게…….”
예법에 맞지 않으니까요.
카리나는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조금 전 예법을 늘 지킬 필요는 없다고 해 놓고, 예법을 근거로 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 알겠어요……. 아스트리드 님.”
아스트리드는 자신의 이름 뒤에 붙은 존칭에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마저도 떼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안드레아가 손으로 크게 내리친 탓에 크림과 잼으로 엉망이 된 테이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렇게 차를 마실 순 없겠네. 기껏 와준 티타임이 엉망으로 끝나서 미안해.”
카리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망친 건 저죠. 공녀…… 아스트리드 님께서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어요.”
“블로에 부인이 망친 건 아무것도 없어. 오히려, 고마워. 정말로.”
아스트리드의 입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여태까지 아무도, 아무도 나한테 힘드냐고 물어보지 않았어.”
카리나는 아스트리드에게 힘들다고 먼저 말하지 그랬냐고 타박하지 않았다.
아스트리드는 예법을 완벽하게 지키기를 원하는 주변의 기대 속에서 자랐을 것이다.
“내일 또 와 줄 거지?”
아스트리드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울림에 어딘가 어릴 적 자신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했다.
‘이 아이는 그냥, 외로운 거야. 어릴 적 나처럼.’
카리나는 잠시 고민했다.
만약 자신이 아스트리드의 요청에 응한다면, 매일같이 그녀의 곁을 따라다녀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없어.’
카리나는 공작저의 별채에 머무는 이 시간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클로드가 그녀에게는 좋은 연구실을, 아이들에겐 최고의 가정교사를 마련해 준 지금이 기회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간절해 보이는 열두 살짜리 소녀를 매정하게 내치고 싶지도 않았다.
“아스트리드 님, 제 아이들에게 사과한다고 하셨죠?”
“……으응.”
“그럼, 내일은 별채로 오시겠어요?”
“……!”
아스트리드가 깜짝 놀란 나머지 입을 막더니, 슬그머니 손을 뗐다.
“그래도 돼?”
“그럼요. 괜찮으시다면 점심을 같이 들어요.”
“갈, 갈래……!”
아스트리드의 눈이 별 가득한 밤하늘처럼 빛났다.
* * *
그날 저녁.
카리나는 에두아르에게 아스트리드와의 점심 약속을 알려주었다.
에두아르는 기뻐하며 성대한 상차림을 약속했지만, 롤랜드와 멜리사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엄마, 공녀님을 정말 만나야 해요?”
롤랜드가 간절하게 물었다.
“공녀님은 너희에게 사과하려고 오시는 거야.”
“……그래도 싫어요. 우리보고 또 지저분하다고 하면 어떻게 해요?”
“너희는 지저분하지 않아.”
카리나는 힘을 주어 말했다.
“그리고 공녀님은…… 그냥 못되게 군 거야. 그래서 사과하러 오는 거고.”
“못되게 굴었으니, 못된 사람 아니에요?”
카리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이들에게 아스트리드 공녀는 그저 많은 것에 무지한 꼬마라고 구구절절 설명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롤랜드와 멜리사는 그 설명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아스트리드는 나이가 훨씬 많고 신분 또한 드높은 공녀였으니까.
“공녀님은 확실히 너희에게 잘못하셨어. 그리고 너희를 모욕했으니, 나 또한 모욕하신 거지.”
“그러니까 나쁜 사람이에요.”
멜리사가 의기양양하게 끼어들었다.
“그래도 잘못을 깨닫고 사과한다는 건,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거야.”
“…….”
“일단 내일 사과를 들어보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녀님을 바로 돌려보내도 좋아.”
“……정말이에요?”
“그럼.”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텐, 항상 너희들이 우선이란다.”
“……공녀님이 엄마를 자기 엄마로 삼으려 할지도 몰라요.”
카리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멜리사! 그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야.”
“왜요? 공녀님한테도 엄마가 없잖아요.”
이번에는 롤랜드까지.
카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하튼,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 안심하렴.”
다음날 점심.
아이들은 카리나의 등 뒤에 숨다시피 하며 아스트리드를 맞이했다.
아스트리드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인사하더니, 아이들을 향해 부드럽게 다가갔다.
떨리는 목소리가 현관에 울렸다.
“정말 미안해. 그…… 내가…… 못됐지? 그치?”
“…….”
멜리사는 더더욱 카리나의 등 뒤로 숨을 뿐이었지만, 롤랜드는 맞받아쳐 줄 만한 용기가 있었다.
“네. 정말 많이요.”
아스트리드는 주먹을 꼭 쥐고 간절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생각해도…… 진짜 못되게 굴었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카리나는 모든 대답을 아이들에게 맡기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가만히 세 아이를 지켜보았다.
“……정말이에요?”
롤랜드의 물음에, 아스트리드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짜로, 정말.”
“그 말, 어떻게 믿어요?”
아스트리드가 무언가 대답하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카리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누가 우리를 찾아온 거지?’
어쩌면 공작의 말을 전하기 위한 시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카리나는 황급히 현관문을 열었다.
“……!”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클로드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은빛 머리칼 위에서 아몬드 꽃잎 한 장이 살랑였다.
“오랜만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