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입양합니다 (37)화 (37/145)

<37화>

“티타임이요……?”

카리나는 어안이 벙벙해 아스트리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스트리드는 손가락 마디가 새하얘질 정도로 치맛자락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래, 내 티타임.”

아스트리드가 또박또박 말했다.

카리나는 황급히 머리를 굴렸다.

‘시녀는 어디로 갔지?’

안드레아라는 시녀는 분명히 상식인처럼 보였다.

공녀가 출신이 불분명한 평민 과부를 티타임에 초대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성격도 아닌 듯했고.

“하지만 공녀님, 저는…….”

“초대장을 안 보내서 그래? 정식 초대가 아니니까?”

카리나는 그건 아니라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아스트리드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블로에 부인은 별채에 사니까 상관없잖아. 그러니까…….”

아스트리드가 마른침을 삼켰다. 새하얗다 못해 투명한 목울대가 긴장에 떨렸다.

“와줘.”

아스트리드는 정말로 간절한 얼굴이었다.

‘…….’

카리나는 아스트리드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토르스의 공녀, 공작과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여동생, 훌륭한 학생이나 낯을 많이 가리고, 오만하고 상대를 배려할지 모르지만 결코 나쁜 성정은 아닌…….

‘외로운 거구나. 이 아이는.’

카리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요. 하지만 아이들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만이에요.”

“뭐라고?”

아스트리드는 당황한 듯했다.

“티타임을 어떻게 지금……!”

“지금 차를 마시면 안 되나요?”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식사도 아니고, 겨우 차 한잔 마시는 데 시간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공녀님께서 생각하셨던 시간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 오늘 이 시간 말고는 짬이 안 날 것 같아요. 만약 다른 시간을 원하신다면 실례하오나 거절을…….”

“그, 그래. 지금 해!”

아스트리드가 황급히 소리치더니, 본인이 낸 소리에 지레 놀라 입을 막았다.

카리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왜 웃어?”

카리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공녀님이 귀여워서요.”

“나는 귀엽지 않아.”

아스트리드는 흥, 하고 뒤로 돌아서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야말로 자신이 귀엽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기에 카리나는 다시 한번 웃고 말았다.

이번에는 아스트리드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또 웃었지?”

“들켰네요.”

“…….”

아스트리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리나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작은 소녀의 숨길 수 없는 미소를 볼 수 있었다.

카리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그런데 공녀님, 시녀님은 어디에 계시나요?”

“안드레아? 안드레아가 보고 싶어?”

아스트리드는 불꽃이 튀듯 반응했다. 카리나는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냥 궁금해서요.”

“……따돌렸어.”

“뭐라고요?”

“쫑알쫑알, 쫑알쫑알. 잔소리만 하길래 도망쳤어.”

“아까 제 아이들에게 너무하셨다는 잔소리를 들으신 거예요?”

아스트리드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어떻게 알았지?”

“그걸 모른다면 바보죠.”

카리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저도 시녀님이 옳다고 생각해요.”

대답은 아스트리드의 보통 말투보다 한 박자 느리게 돌아왔다.

“……미안해.”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사과를 할 줄이야.’

카리나가 대답이 없자 아스트리드는 한결 불안해진 표정으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미안해서, 티타임에 초대한 거야. 사과하려고. 당연히 안드레아는 그 생각 역시 좋아하지 않았지. 항상 내 생각에 반대하니까.”

“괜히 물어봤네요. 공녀님께서 제게 멋지게 사과하실 기회를 드렸어야 했는데. 당연히, 티타임에서.”

“……상관없어. 그런 건.”

아스트리드는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멜리사와 똑같아, 카리나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어쨌든 미안해. 내가…… 생각이 없었어. 그런 말을 들으면 당연히 기분이 나쁠 텐데.”

“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어요.”

카리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하지만 제 아이들은 기분이 나빴죠. 그러니 사과를 하실 거면, 제 아이들에게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

아스트리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왜 아이들에게 사과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듯했다.

카리나는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스트리드 데비아탄 토르스는 평생을 공녀로 군림한 소녀다.

가까운 시녀의 말을 듣고 순간 뜨끔해서 자신에게는 사과할 수 있어도, 어린아이들에게는 사과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마침내 아스트리드가 입을 열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그 애들에게 못되게 굴었어. 그러니 사과도 그 아이들에게 해야지.”

카리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수업이 끝나면, 찾아가서 사과하겠어. 어차피 테라이스 양도 만나야 하니까.”

아스트리드는 부끄러웠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그래도 티타임엔…… 올 거지?”

“그럼요.”

아스트리드의 얼굴이 햇살이 쏟아진 것처럼 확 밝아졌다.

“어차피 두 시간 동안 할 일도 없으니까요.”

“좋아.”

아스트리드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잠시 후.

그들은 카리나가 처음 보는 정원에 도착했다.

‘정원이 여러 개 있구나.’

여태까지 카리나가 공작저에서 보아 온 정원이 웅장하고 광활했다면, 아스트리드가 그녀를 데리고 온 정원은 화사했다.

“멋지지?”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정경은, 그야말로 멋지다는 말 말고는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쏟아질 듯한 흰 꽃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덩치 큰 장정 둘이 팔을 한데 감아야 겨우 감쌀 수 있을 듯한 거대한 나무 세 그루가 흰 꽃으로 덮여 살랑거렸다.

카리나는 자신의 머리 떨어지는 말랑말랑한 꽃잎을 잡았다.

크게 솟은 나무에 탐스럽게 핀 흰 꽃들이 나부끼는 모습에, 고향의 벚나무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가지가 훨씬 울퉁불퉁해 보인다는 점이 달랐다.

“아몬드꽃을 처음 봐?”

“네.”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몬드나무를 처음 봐요.”

북부에서 아몬드는 인기 있는 먹을거리가 아니었다.

“좋아. 실내에서 티타임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몬드꽃이 필 때면 꼭 밖에서 해.”

“티타임을 자주 가지시나요?”

카리나는 호기심이 생겨 물어보았다. 차야 혼자서 얼마든지 마실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만나 교류하면서 차를 마실 때, 비로소 티타임이 되는 것이다.

“…….”

아스트리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몬드나무 가지가 드리워진 테이블에 올려진 종을 울렸다.

“공녀님!”

안드레아가 황당한 얼굴로 달려왔다. 그녀는 이미 새하얀 의자에 앉은 카리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가, 아스트리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공녀님, 이게 무슨…….”

“블로에 부인을 내 티타임에 초대했어.”

“하지만 지금은 겨우 열 시에요, 공녀님. 티타임은 오후 두 시는 되어야…….”

그제야 카리나는 자신이 지금 당장 차를 마시러 가자고 말했을 때, 아스트리드가 당황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공작저의 티타임은 시간까지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블로에 부인이 지금밖에 시간이 안 된대. 내가 맞추어 주는 게 맞아.”

안드레아는 하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은 얼굴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하녀를 여럿 불러, 공녀의 티타임에 걸맞은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곧 카리나의 앞에는 건드리기도 아까울 정도로 섬세한 테이블보가 깔렸다.

카리나는 뛰어노는 토끼와 다람쥐가 그려진 아름다운 찻잔과 각종 다과를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어?”

아스트리드가 불쑥 물어왔다.

“네. 정말 귀엽네요.”

“내가 좋아하는 장인이 만든 거야. 에드무어에 사는데, 각하께서 나를 위해 주문해 주셨어.”

대답하기 난감하던 차에 하녀가 차를 따라 주었다.

카리나는 차에 설탕을 한 스푼 넣고 찻잔을 티스푼으로 휘휘 저었다.

반면 아스트리드는 티스푼을 살살 움직여 설탕과 우유를 섞더니, 우아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어때?”

“맛있네요.”

사실, 카리나는 차야 다 똑같은 차 맛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리나는 무화과 잼과 클로티드 크림을 한가득 바른 스콘을 베어 물며 대답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스트리드는 계속해서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그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차를 마셨다.

값비싼 차에, 황홀하게 녹아내리는 다과를 먹고 있음에도 무척 불편해 보이는 모양새였다.

카리나는 난감해하며 머리를 굴렸다. 이쯤 되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아스트리드는 자신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 하고 있었다.

카리나는 망설이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공녀님, 힘들지 않으세요?”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던 안드레아가 숨을 들이켰다.

“감히 공녀님께 무슨……!”

“제가 뭘 잘못 물었나요?”

카리나는 태연하게 되물었다.

당연히 자신의 말은 아스트리드가 학수고대하던 칭찬은 아니었다.

심지어 노력을 칭찬하지도 않았다.

단지, 아스트리드가 예법을 지키기 위해 겪고 있을 고생에 공감했을 뿐이었다.

안드레아가 카리나를 노려보았다.

“공녀님, 이 사람은 제가 알아서 처리…….”

“안드레아, 조용히 해.”

아스트리드가 안드레아를 제지하더니 카리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아스트리드의 자수정 같은 보라색 눈에, 투명한 눈물이 한 방울 맺혀 있었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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