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입양합니다 (36)화 (36/145)

<36화>

“공녀님을 뵙습니다.”

카리나는 황급히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아스트리드는 그녀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옆의 시녀, 안드레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각하께서 이번에 데려온 게 저것들이야?”

“예. 맞습니다.”

“너무…… 더럽잖아.”

“공녀님, 다 들립니다.”

안드레아의 우아한 만류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스트리드는 카리나를 향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테라이스 양과 똑 닮은 걸음걸이였다.

잘 정제되었는데도 앳된 티를 숨길 수 없는 목소리가 도톰한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이렇게 불결한 몰골로 어딜 갈 생각이었지?”

카리나는 잠시 망설였다.

자신의 대답이 아스트리드 공녀의 화를 돋우기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공작 각하의 명에 따라, 아이들을 가정교사에게로 데려다주던 참이었습니다.”

“가정교사?”

아스트리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겨우 열두 살밖에 안 된 소녀의 심각한 척하는 표정을 보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물론, 카리나는 분별력 있는 어른이었으므로 참았지만.

“각하께선 테라이스 양 말곤 그 어떤 가정교사도 들이지 않으셔. 누구한테 배우러 가는 거지?”

“테라이스 양입니다.”

“뭐……?”

“각하의 명입니다.”

카리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말도 안 돼. 각하께서…….”

“각하의 명이 아니었다면, 감히 어떻게 테라이스 양께 교육을 받을 수 있었겠나요?”

“…….”

할 말이 없어진 아스트리드는 우아하게 부채를 접어 들어 아이들을 가리켰다.

“이 애들, 너무 꼬질꼬질해! 빨리 내 눈앞에서 치워서 씻기고 새 옷을 입혀서 데려와!”

카리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지경이었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자주 씻었기에 항상 뽀송뽀송했다.

그러니 아이들의 몸에 대한 말은 아니었다.

‘문제는 옷이야.’

아이들은 렝케 경의 저택에서 급하게 도망칠 때 옷을 거의 가져오지 못했다.

특히 저택에서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멜리사는 더했다.

당연히 카리나는 아이들에게 새 옷을 사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남아 있던 돈과 월급은 롤랜드가 아팠을 때 모두 써 버렸기 때문에 아이들은 아직도 도망칠 때 가지고 나온 옷 몇 벌로 버티고 있었다.

당연히 처음에는 아무리 멀쩡한 옷이었더라도 이제는 해지고 남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공녀님, 제 아이들은 매일 씻습니다. 더럽게 보인다면 옷 때문이겠지요.”

아스트리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옷이 더럽다구? 그럼 깨끗한 옷을 입으면 되는 거 아니야?”

“외투를 제외한다면 옷이 세 벌뿐이라, 마음대로 되지가 않네요.”

“옷이 세 벌 뿐이라고……?”

아스트리드의 빨간 입술이 경악에 파르르 떨렸다.

“지금, 감히 내게 거짓을 고해서 동정을 사려고 한 거라면…….”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요?”

“…….”

“그리고, 깨끗한 옷이 있는데 아이들에게 입히지 않을 이유도 없죠?”

침묵이 흘렀다.

아스트리드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입술만 달싹거렸다.

카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공녀라고는 하나 이제 겨우 열두 살인 아이다.

말싸움에서 이겼다고 기분이 좋아질 리가 없다.

“……안드레아.”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아스트리드가 시녀에게 명령했다.

“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내 옛날 옷을 몇 벌 골라줘.”

솔직히, 카리나는 놀랐다.

아스트리드는 아무리 자신의 옛날 옷이라도 평민 아이들이 입는다는 생각만 해도 펄펄 뛸 듯한 성정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카리나보다 더 놀란 듯한 안드레아는 정말로 난감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공녀님, 아무리 그래도 이 아이들에게 공녀님의 옷들은 너무 과분합니다.”

“어차피 내가 입을 수도 없고, 버리기엔 아까워서 어릴 때 쓰던 옷방에 여전히 걸려 있는 것들 아니야? 몇 벌 준다고 큰일 안 나.”

“그리고 이 아이는 남자아이잖아요. 남자애한테 치마를 입힐 수는 없습니다.”

“바지도 있을 텐데?”

카리나는 안드레아와 아스트리드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두 분의 대화를 끊어 실례하지만, 아이들이 지금 수업을 받으러 가야 해서요.”

카리나는 잠시 망설이다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공녀님, 사려 깊은 생각은 감사하지만 새 옷을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왜?”

아스트리드는 진심으로 궁금한 얼굴이었다.

“내가 공작 각하처럼 뭘 선물할 때마다 충성이라도 요구할까 봐? 나는 그냥 주는 거야.”

“받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더러워 보이잖아!”

아스트리드는 진심으로 기가 막힌다는 듯 소리쳤다.

카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공녀님, 제 아이들은 뛰어노는 걸 좋아해요. 공녀님의 귀한 옷을 받았다간 일주일 만에 망가져 버리겠지요. 이런 장식들도 다 뜯어져 버릴 거고…….”

카리나는 아스트리드의 드레스에 달린 영롱한 비즈 장식과 섬세한 레이스를 가리켰다.

“당연히 공녀님께 받은 옷을 망가뜨릴 순 없으니 항상 조심조심 다녀야 할 텐데, 전 아이들에게 그런 족쇄는 채우고 싶지 않아서요.”

아스트리드의 대답은 조금 느리게 돌아왔다.

그녀는 자신의 화려한 드레스를 내려다보더니, 아이들의 옷을 보고는, 또다시 자신의 옷을 보는 걸 반복한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충분히 잘 알겠어.”

아스트리드의 첫 한마디를 듣던 순간부터 적개심을 숨기지 못하던 멜리사의 눈빛이 그제야 누그러졌다.

카리나는 말없이 멜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신은 전혀 화가 나지 않았지만, 이제 겨우 일고여덟 살 된 아이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을 것이다.

그 분노를 아스트리드를 노려보는 정도로 해소했다는 걸 칭찬해 주어야 할 듯했다.

“그럼, 이제 저희는 가 보아도 될까요?”

“……그래.”

카리나는 두 아이의 손을 재빨리 잡아끌었다.

잠시 후.

롤랜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공녀님은 나쁜 사람이에요.”

“맞아요, 진짜 나빠요.”

멜리사도 골이 당당히 난 목소리였다. 카리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공녀님에 대해 그렇게 말하면 안 돼.”

“그래도…….”

“공녀님은 너희들에 대해 잘 모르는 것뿐이란다. 너희들이 공녀님에 대해 잘 모르는 것처럼.”

카리나는 무지가 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진정한 죄는 알고 있음에도 행동이 달라지지 않을 때 짓게 된다.

카리나가 멜리사와 롤랜드의 미래를 알고 있으면서도, 도망치지 못하고 비겁하게도 렝케 경의 저택에 남아 있었던 게 바로 죄였다.

“공녀님이 나쁜 사람이었다면, 진작 나를 매질했을걸?”

“……그런 건 삼촌이나 하는 거예요.”

“삼촌 같은 사람이 삼촌만 있는 건 아니야.”

카리나는 렝케 경의 손님들을 기억했다.

그들은 렝케 경처럼 잔혹하지는 않았지만, 사용인들을 자신들과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적어도 아스트리드 공녀는 카리나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보이지 않았던가.

마침내 그들은 본관의 현관에 도착했다.

테라이스 양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리나는 황급히 현관의 거대한 괘종시계를 확인했다.

‘약속 시간은 아직 15분이나 남았는데……?’

테라이스 양이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입을 열었다.

“혹시나 길을 찾지 못하셨을까 봐 걱정되어서, 미리 나와 보았습니다.”

“정말 사려 깊으세요.”

테라이스 양이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블로에 부인이야말로 일찍 도착하셔서 제가 기다리는 시간을 없애주셨군요. 혹시 교육에 있어 제가 알아야 하는 사항이 있습니까?”

“음…….”

카리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기실 그녀는 아이들의 학업 성취도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종종 롤랜드나 멜리사가 자랑을 해 오긴 했으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 없는 그녀가 기억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내용이었다.

“아이들에게 물어보시는 게 제일 정확할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카리나가 아이들과 테라이스 양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배웅했다가 돌아설 때였다.

회랑의 꺾어지는 벽면 뒤로 새까만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바닥에 삐죽 튀어나온 저 화려한 드레스 자락의 주인은…….

“공녀님?”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으나, 까만 머리칼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공녀님, 제게 볼일이 있으신 건가요?”

아스트리드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햇살을 받은 검은 머리칼이 반짝였다.

“……너.”

아스트리드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 티타임에 오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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