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입양합니다 (35)화 (35/145)

<35화>

“아까 공작님과 엄마가 말하는 걸 들었어요. 엄마한테 표식이 있다고……. 나쁜 사람들이 엄마가 여기 있는 것도 다 아는 것 아니에요?”

“괜찮아. 공작저는 안전하니까. 에두아르 씨도 여기 계시고…….”

아득해지려는 정신줄을 붙잡고 롤랜드를 안심시키려는 카리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롤랜드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안 괜찮아요.”

“……롤랜드.”

롤랜드는 더는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표식은, 그 마법사가 죽어야 끝나요. 그 마법사는 지금쯤 대륙 반대편에 있을 수도 있는데, 무슨 수로……!”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롤랜드는 그녀조차도 자세히 알지 못하는 표식에 대해서 술술 말하고 있었다.

“롤랜드.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표식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어. 어쩌다 알게 된 거니?”

“……삼촌이 저한테만 읽게 만들었던 책에 있었어요.”

다시 한번 카리나는 렝케 경을 저주했다.

여태까지 마법사들의 악행을 숱하게 보아왔을 클로드마저 치를 떨던 마법이 바로 표식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오직 목표물로만 삼게 만드는 마법.

롤랜드는 겨우 여덟 살이었다.

그런 잔인한 마법의 존재 자체를 알아서도 안 될 나이.

그리고, 유일하게 믿고 따르는 어른이 그 마법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선 안 될 나이.

‘그리고 멜리사도…… 이제 알게 되었네.’

롤랜드가 본인이 아는 사실을 멜리사에게 숨길 리가 없으니, 어차피 멜리사 또한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구나.”

카리나는 천천히 말했다.

이미 롤랜드가 알아버린 이상, 그 마법이 얼마나 사악하고 알아선 안 될 것인지에 대해 말하는 건 역효과만 날 것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아프지도 않고, 실은 표식이 있다는 것도 공작 각하께서 알려주셔서 알았어.”

“진짜 안 아파요?”

롤랜드가 눈을 크게 떴다.

“분명,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린다고 적혀 있었는데…….”

카리나는 기억을 곰곰이 살폈다.

정신이 없는 하루였지만, 만약 가슴 부근에 화상을 입은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면 분명 기억했을 것이다.

“그런 건 전혀 없었어. 그러니까 롤랜드도, 멜리사도 걱정하지 말렴. 알겠지?”

멜리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작은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안 걱정해요!”

“이런, 멜리사.”

“엄마 나빠요. 아프다고 하면서 안 아프다고 하고…….”

“안 아파. 그건 정말인데?”

카리나는 멜리사를 안아 올렸다.

“아프면 내가 이렇게 멜리사를 안을 수 있겠어?”

“치이…….”

멜리사가 입을 삐죽이며 카리나의 목에 팔을 감았다.

카리나는 멜리사를 꽉 안아준 다음 바닥에 내려 주었다.

마음만 같아선 온종일 안아 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일곱 살은 너무 많은 나이였다.

롤랜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엄마 팔 아프니까, 다음부턴 빨리 내려와.”

“…….”

롤랜드의 말에 멜리사가 카리나의 눈치를 살피며 손을 꽉 쥐었다.

“괜찮아. 나는 아픈 걸 되게 못 참거든. 그래서 너희들 때문에 아프면 바로바로 말할 거야.”

“정말이에요?”

“그럼.”

카리나는 엄숙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마음껏 안겨도 돼. 내가 좋으면 너희들 안을 거고, 싫으면 밀어 버릴 거야. 알겠지?”

“……미는 건 싫어요.”

멜리사가 카리나의 손을 더더욱 세게 쥔 채 웅얼거렸다.

“그래? 그럼 그냥 옆에 내려놓아 줄게. 그건 괜찮지?”

“네.”

카리나는 털썩 침대에 걸터앉았다.

푹신한 이불이 하반신에 감겨왔다.

‘좋다…….’

카리나는 이 침대가 렝케 경이 쓰던 침대보다 훨씬 고가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잘 관리되었네.’

겉보기에는 사용인이 쓰는 별채처럼 허름했지만 실제론 귀족이 사용하던 곳이다.

자신처럼 지위가 애매한 손님들이 종종 드나들었을 테니, 그동안 꾸준히 관리해 왔을 것이다.

‘여기를 쓰게 된 건 정말 행운이야.’

조만간 떠나야 할 별채이기에,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걱정되는 건 바로 아이들의 반응이었다.

‘떠날 때, 아이들이 실망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이내 카리나는 렝케 경에게서 도망쳤을 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멜리사야 계속 학대를 받아왔으니 그렇다 쳐도, 롤랜드는 귀족 도련님 대우를 받아왔음에도 힘겨운 마차 생활에 금세 적응했다.

‘힘든 티를 내지 않았던 것에 가까웠겠지만…….’

롤랜드는 물론 멜리사도 단 한 번도 칭얼거린 적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카리나는 차라리 아이들이 떼를 부리기 시작한 지금이 더 반가웠다.

‘그때 아이들은 나에게조차 버림받을까 봐 무서워했어. 그래서 차마 고집 한 번 쓰지 못한 거야.’

어떤 부모는 천사처럼 착한 아이를 원한다.

또 어떤 부모는 자신의 요구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같은 아이를 원한다.

어릴 적, 카리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싶었기에 두 역할 모두를 수행했다.

그리고 카리나는, 두 가지 모두 고통스러운 역할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에는 너무 젊었다.

“그럼 나도 이제 방을 한 번 골라 볼까?”

“좋아요!”

롤랜드가 밖으로 우다다 뛰쳐나가는가 하더니, 비명을 내질렀다.

“롤랜드!”

카리나는 황급히 롤랜드를 향해 뛰어갔다.

롤랜드는 문간에 얼어붙은 듯 서서 복도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본 이상한 거였어요!”

“야옹이예요.”

멜리사가 고집스레 말했다.

“롤랜드, 멜리사. 어떻게 생긴 동물이었는지 자세히 말해 주겠어?”

카리나는 아직도 떨고 있는 롤랜드를 토닥여 진정시켜 주고, 입을 뾰로통하게 내민 멜리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까는 그냥 넘어갔지만 위험한 짐승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멜리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야옹인데요. 털이 뾰족뾰족하고 검고 눈이 완전 노란색이었어요!”

“그게 어떻게 고양이야!”

롤랜드가 기가 막힌다는 듯 소리쳤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어요.”

“마법이었니?”

“아뇨.”

롤랜드가 고개를 저었다.

“멜리사도 저도, 마법에 대해선 잘 알아요. 그건 난생처음 보는 동물이었어요. 고양이보다는 돌멩이처럼 생겼어요. 움직이는 돌멩이.”

“일단 공작 각하께선 고양이라고 하셨지.”

카리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듣기에도 고양이는 아닌 것 같구나. 다음에 만나면, 물어보겠어. 그래도 별로 위험한 동물은 아닌 것 같으니 너무 겁먹지는 마렴. 알겠지?”

“네.”

롤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블로에 부인!”

에두아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리나는 황급히 1층으로 내려갔다.

에두아르는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각하께서 가정교사를 구하셨다고 전해 오셨습니다.”

“네? 벌써요?”

“실은 그게, 테라이스 양을 설득하셨습니다.”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테라이스 양은 공녀 이외의 학생을 받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녀를 단 몇 시간 만에 설득시켰다니?

“하지만 테라이스 양은 너무 힘들다고 거절했는걸요.”

“할 만하다고 생각했으니, 받아들였을 겁니다. 다만 조건을 하나 걸었는데, 본관의 서재에서만 수업하겠답니다. 부인,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전혀 상관없어요. 그럼 아이들만……?”

“예. 정해진 시간에 아이들을 본관 입구로 데려다주시면, 그다음은 테라이스 양이 맡을 겁니다.”

테라이스 양이 요구한 시간은 매일 아침 10시부터 12시까지였다.

등교 시각은 9시였기에 그다지 이른 시간은 아니었지만, 게으름을 피우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카리나는 아이들을 깨워 아침을 먹였다. 에두아르는 그들을 위해 수란과 바싹 구워진 토스트, 토끼 모양으로 자른 사과를 준비해 주었다.

“너무 귀여워서 먹기 싫어요.”

롤랜드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카리나는 그런 롤랜드가 더 귀엽다고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그래도 먹어야지. 롤랜드가 먹지 않아서 버려진다면 이 토끼가 더 슬퍼할 거야.”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롤랜드가 사과를 사각사각 베어 물었다.

“잘했어.”

식사는 금방 끝났다.

카리나는 에두아르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저희를 위해 이곳에 머무시기까지 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에두아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아이들이 다른 데 정신이 완전히 팔렸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야 카리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들었습니다. 당연히 저희가 책임져야 할 일이니, 목숨을 걸고 부인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그래도 에두아르 씨는 당사자도 아니시잖아요.”

에두아르가 거친 웃음을 터뜨렸다.

“공작저의 일원인 제가 어떻게 당사자가 아닙니까? 그러니, 부인은 염려 말고 여기 머무십시오.”

잠시 후, 카리나는 아이들과 함께 별채를 나섰다.

‘내일부턴 좀 느긋하게 나올 수 있겠지.’

길을 잃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약속보다 한 시간이나 이른 시간이었다.

“길, 확실히 기억해 둬.”

“그럴게요.”

롤랜드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멜리사가 불안한 눈길로 카리나를 올려다보았다.

“엄마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벌써 잊어버린 거야, 멜리사? 학교는 둘이서 갔잖니. 여기는 너희 둘만을 위한 꼬마 학교라서, 너희들만 수업을 받아야 해.”

“치잇…….”

다행히 멜리사는 울상만 좀 지을 뿐 떼를 쓰지는 않았다.

카리나가 양손에 아이들의 손을 잡고 회랑을 걸을 때였다.

맑고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은 날카로운 말이 카리나의 귓가를 스쳤다.

“안드레아, 저기 저 더러운 애들은 뭐지?”

카리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새카만 머리칼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십 대 초반 소녀가, 카리나와 아이들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소녀는 카리나가 태어나서 본 옷 중 가장 값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아.’

카리나는 금방 소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방금 그녀의 아이들을 ‘저기 저 더러운 애들’이라고 부른 소녀의 이름은 아스트리드 데비아탄 토르스.

남부의 공주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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