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카리나는 당황하며 곧바로 아이들을 제지했다.
“얘들아, 조용히 해야지.”
동시에 안도감이 차올랐다.
롤랜드와 멜리사는 이번에도 그녀를 도와주었다.
아이들은 눈치 빠르게 다시 음식을 오물거리기 시작했고, 카리나는 클로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남편의…… 형이 남은 재산을 다 가지고 갔어요. 아이들마저 팔아버리려고 하길래, 아무것도 없이 급하게 도망쳤어요.”
클로드는 말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듯한 시선으로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여기로 도망친 거군.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토르스로 정착을 하러 오는 사람들은 많지 않거든. 보통은 다 에드무어로 가지. 수도니까.”
카리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는 저희도 거기로 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여기 정착한 거예요.”
클로드의 대답은 조금 느리게 돌아왔다.
“그럼, 부인은 아이들이 자라면 수도로 갈 생각인가?”
“……?”
카리나는 깜짝 놀라 음료를 마시다 말고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클로드에 말에는 카리나가 지나치기 어려운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카리나는 몇 년간 돈을 모으다, 수도로 이주할 것이다.
바로 클로드를 피하기 위해서.
‘그냥, 수긍만 하면 돼.’
하지만 이 간단한 대답이 왜 이렇게 무겁게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카리나는 뻣뻣한 혀를 움직여 한 음절을 만들어내었다.
“……네.”
“그래, 그렇군.”
“실망하셨나요?”
“아니.”
클로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수도가 훨씬 기회가 많은 곳이니까.”
체념에 가까워 보였지만, 카리나는 그 사실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부인에게 궁금한 게 한 가지 더 있어.”
“뭔가요?”
“왜 표식을 제거하는 방법을 물어보지 않지?”
카리나는 대답 대신 아이들을 향해 고갯짓했다.
아이들은 딴청을 피우며 열심히 음식을 먹는 체했지만, 카리나는 아이들이 그들의 대화를 열심히 듣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아마 클로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 그렇군. 생각이 짧았다.”
“사실, 궁금하지가 않아서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테니까.”
“이상하군. 부인은 예전엔 무엇이든지 다 알고 싶어 했지. 그런데 왜 지금은 궁금하지 않은 건가?”
“제가 전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니까요.”
클로드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부인은 자신의 손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처음부터 포기하나 보군.”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한 것 아닌가요? 당연히 그래야 하고요.”
카리나는 무릎 위에 얹은 왼손을 주먹 쥐었다.
“주제넘게 나선다고 해결될 문제는 처음부터 모르는 게 속이 편해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카리나는 어이가 없어 클로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기야, 공작이니까…….’
클로드 데비아탄 토르스는 그녀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도 해결하는 삶을…….
화가 나지는 않았다.
평생 다른 삶을 살았는데,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겠는가?
“설령 블로에 부인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다곤 해도 당사자야. 당연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아야지.”
“저는 몰라도 괜찮아요.”
카리나는 빠르게 대답했다.
알아도 카리나가 대응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미 무력하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는 충분히 알았으니까…….’
카리나는 그런 소모적인 감정에 정신을 빼앗기는 대신, 낯선 환경으로 옮겨져 불안할 아이들에게 전력을 다하고 싶었다.
“각하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해 주시겠죠. 그렇게 약속하셨으니까.”
“그렇긴 하다만…….”
클로드는 잠시간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슬슬 일어나는 게 좋겠군. 주방장을 부르겠어.”
카리나는 잠시 긴장하며 주방장을 기다렸다.
주방에서 다이닝룸까지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기에 주방장은 금방 도착했다.
“이분들입니까?”
희끗희끗한 머리의 주방장은 그들을 향해 성큼 다가왔다.
터져나갈 것만 같은 팔뚝과 거대한 등, 칼부림의 흔적으로 보이는 얼굴의 흉터들이 눈에 띄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옷을 차려입고 있지 않았다면 카리나는 분명 그가 산전수전 다 겪은 기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요리사로 가장한 기사로 보이기도 했다.
“에두아르, 잘 왔어. 그래, 여기 이 숙녀분은 블로에 부인이고, 이 꼬마들은 블로에 부인의 자식들이지. 이름이…… 롤랜드, 멜리사 블로에.”
에두아르는 카리나의 오른손을 잡고 힘차게 흔들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에두아르 해리스라고 합니다. 편하게 에두아르라고 불러 주십시오.”
“저야말로 반가워요. 폐 끼치지 않도록 노력할 테니, 앞으로 당분간만…… 잘 부탁드려요.”
“부인께선 어떠한 노력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에두아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지워 두십시오. 부인께서는 저희 토르스의 손님이시니, 편하게 계시다 돌아가시면 됩니다.”
카리나는 조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두아르는 친절하기는 했지만 마치 그 자신이 공작저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옆에 클로드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도!
만약 그가 렝케 경이었다면 에두아르는 이미 인근에서 가장 높은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까마귀밥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 클로드를 에두아르가 제지했다.
“각하, 치체스터 경이 무언가 골치 아픈 문제가 있는 것 같던데요.”
“그가 그렇다고 자네에게 말했나?”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보면 알죠? 저희가 무슨 사인데요!”
“그건 그렇지. 올라가 보겠다.”
카리나는 클로드가 왜 에두아르를 자신과 아이들의 호위로 붙였는지 금세 납득했다.
에두아르는 그 존재만으로도 안정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무서운 겉모습과는 달리 붙임성이 좋아 아이들과도 금방 친해졌다.
“에두아르 아저씨, 저건 뭐예요?”
롤랜드가 뿔이 달리고 이를 험악하게 드러낸 조각상을 가리켰다.
어찌 보면 박쥐 같기도, 어찌 보면 흡혈귀 같기도 한 모양새였다.
“저건 가고일이라는 거야. 가고일에 대해 들어봤어?”
“아뇨.”
롤랜드가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먼 옛날 이 땅에 살던 것들인데, 무척 잔혹해서 사람을 산 채로 잡아먹었다고 해. 그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시절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조각상을 남겨 놓았지.”
“지금은 없어요?”
멜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행히 없어.”
“왜요?”
“왜냐면 다 지하로 내쫓겼거든. 지금은 지하에서 자기들끼리 잡아먹으면서 살고 있겠지.”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궁금한 게 많았구나.’
카리나의 입장에서야 클로드와 와일더의 실수로 인해 봉변당한 상황이었지, 그 내막을 제대로 모르는 아이들은 그저 이 상황이 신기할 만도 했다.
그리고 카리나는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상황을 알려줄 생각이 결코 없었고.
카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내가 걸어 다니는 표적이 되었다고 말을 해…….’
어느덧 그들은 별채에 도착했다.
에두아르는 현관 근처에 있는 1층 방을 골랐다.
“부인과 아이들께선 2층을 쓰시는 게 좋을 겁니다. 만약 침입자가 들어오면, 제가 막을 테니까요.”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들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너희들, 다 골랐어?”
“이 방이요!”
롤랜드와 멜리사가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힘차게 외치며 달려갔다.
아이들이 고른 방은 계단에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거대한 방이었다.
“아.”
카리나는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이 이 방을 고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거대한 침대 두 개.
마치 거울로 비춘 상처럼 양쪽 벽에 하나씩 놓친, 책상과 화장대와 옷장과 거울.
“방을 하나씩 쓰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저흰 같이 쓰고 싶어요.”
롤랜드가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그래야, 제가 멜리사를 지켜줄 수 있을 테니까요.”
“고맙지만 너희는 내가 지킬 거란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에두아르 씨가 지켜주고 계시잖니?”
“그래두…… 이 방이 좋아요.”
멜리사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당연히 이 방이 좋으면 이 방을 쓰는 거지. 그냥 누가 누구를 지킬 필요는 없다는 얘기야. 알았지?”
“네!”
힘차게 대답하는 멜리사와는 반대로, 롤랜드가 무언가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얼굴로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아이의 망설이는 듯한 입술에서 작은 질문이 흘러나왔다.
“엄마, 나쁜 사람들이…… 엄마한테 표식을 남겼어요?”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크게 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