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클로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테라이스 양, 분명 아스트리드가 훌륭한 학생이라고 하지 않았나? 요즘 속을 썩인다면 내가…….”
“아닙니다.”
테라이스 양은 고개를 내저었다.
“오히려 그 나이대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의 교육을 능히 따라가고 계십니다.”
“그럼 아스트리드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거군.”
테라이스 양이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감히 공녀님께 문제가 있다고 말씀드릴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 문제는…….”
“접니다.”
테라이스 양의 목소리에선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테라이스 양은 내가 여태까지 본 가정교사 중 가장 훌륭해. 그런 자네에게 문제가 있을 리가 없지.”
테라이스 양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과찬 감사합니다만, 공녀님께서는 제가 전력을 쏟아야 간신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시다는 의미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두 어린아이는 받아 줄 수 없다는 거군.”
“네, 지금 공녀님께서는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가정교사 셋이 붙어서 가르칠 양을 능히 습득하고 계십니다.”
클로드가 낮게 혀를 찼다.
“그래, 아스트리드가 낯을 좀 가리긴 하지…….”
“이런 상황에서, 제가 다른 학생을 받는 건 무리입니다.”
“그렇겠군.”
클로드가 나지막하게 신음했다.
테라이스 양은 고용주가 그러든 말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만약 제가 이 아이들까지 맡는다면 공녀님의 교육에까지 영향이 갈 텐데, 그건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어린아이들이니 오래 가르칠 필요가 없는데도?”
“제가 여태까지 가르쳐 본 적이 없는 어린아이들이니 준비에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군. 아쉽게 되었어.”
클로드는 진심으로 아쉬워 보이는 눈치였다.
카리나는 그가 이렇게까지 테라이스 양의 교육을 고집하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굳이 끼어들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둘 다 자신보다 훨씬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테라이스 양이 돌아가고 난 이후, 클로드가 미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게 되었어. 하지만 다른 가정교사를 찾아보겠다.”
“실은 보내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학교를 잠시 빠진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니까요.”
클로드가 더는 반박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시기에만 배울 수 있는 것도 있는 법이야. 부인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서이니, 거절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군.”
카리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좋은 가정교사를 보내주신다면 거절할 생각은 없어요. 그런데, 왜 테라이스 양을 고집하셨나요?”
“그녀가 최고니까.”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나와 잘 맞아.”
“어떤 면에서요?”
“유명하다는 가정교사들을 모두 불러 보았지만, 하나같이 지나치게 강압적이더군. 아스트리드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토한 적도 있었어.”
카리나는 놀란 기색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이미 테라이스 양만 하더라도 충분히 깐깐해 보였는데, 그런 그녀보다 훨씬 강압적인 가정교사들이 유명하다니?
그래도 렝케 경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상당히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공녀님께서는 좋은 학생이신 것 같았어요.”
“좋은 학생이지. 좋은 동생이고.”
찰나의 착각일까.
카리나는 클로드의 말에 담긴 쓰디쓴 기색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녀는 더 캐묻지 않았다.
다름 아닌 공작과 공작의 여동생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가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고, 알아서도 안 될.
클로드는 곧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급하게 준비시켜서 부족한 점이 많군. 본관으로 오겠나? 식사를 같이 들지.”
카리나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부인은 내 손님이야. 고용인이 아니지. 그러니 식사 정도는 같이 할 수 있지 않나.”
“알겠습니다.”
“부담스럽게 생각하지는 마. 정식 연회도 아니고, 그냥 식사만 같이 드는 것이니.”
공작저의 다이닝룸은 그들이 기거하는 집으로부터 긴 회랑을 걸어 이동해야 했다.
카리나는 지금 상당히 신기한 상황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만약 일반적인 귀족이었다면, 공작저에 들어서자마자 사용인이 달려와 그녀와 아이들이 기거할 별채로 안내했을 것이다.
당연히 클로드는 그들을 사용인에게 인계하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을 것이고.
‘애초에 마차를 같이 타지도 않았을 거고.’
당연히 식사 초대 또한 없었으리라. 아이들이 배가 고프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고.
‘롤랜드 때문일까, 아니면…….’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클로드는 롤랜드의 재능도 탐이 나고, 그 와중에 그녀가 좋은 마법상이 된다면 토르스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여기에 계속 머물러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카리나는 클로드를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클로드는 좋은 사람이었고, 분명 카리나가 여태까지 알아 온 귀족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런 귀족의 가신이라면 되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만약 카리나가 클로드에 대해 전혀 몰랐다면 이미 가신으로서 충성을 맹세하고도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리나는 클로드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잘 알았다.
미래 롤랜드에게 집착하고, 대척할 사람.
‘거리를 두는 게 맞아.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다이닝룸에 도착하자 네 사람을 위한 멋진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다.
카리나는 클로드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두 아이를 자신의 양옆에 앉혔다.
클로드는 그녀가 자신의 맞은편에 앉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와 같이 식사하는 것도 오랜만이군.”
“공녀님은요?”
“아스트리드는 나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서.”
“그렇군요.”
카리나는 순순히 납득했다.
열 살이 훌쩍 넘게 차이 나는 오빠라니, 부담스러울 만도 하다.
곧 그들 앞에 맛있는 음식이 한가득 차려졌다.
오랜만에 보는 풍족한 음식에, 롤랜드와 멜리사가 눈을 빛냈다.
카리나는 계속 가시가 돋친 것처럼 주변을 경계하던 멜리사가 라즈베리 잼과 버터를 가득 바른 빵 한입에 빵긋 웃는 모습을 보고 미소 지었다.
‘역시 먹는 게 최고구나.’
클로드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공작가의 음식은 정말로 최고였다.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산해진미라서가 아니었다.
모두 토르스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었다.
부드러운 빵, 과육이 씹히는 라즈베리 잼, 녹진한 소고기 스튜, 신선한 야채를 다지고 그 위에 새콤달콤한 소스를 끼얹은 샐러드까지.
하지만 그 종류가 흔하다고 해서 맛까지 흔하지는 않았다.
음식 하나하나가 입에서 사르르 녹아, 감탄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주방에서 그들을 배려할 이유가 없었으니 클로드의 취향인 듯했다.
카리나는 아이들이 그저 조용히 먹는 게 전부인 자신과 달리, 예법에 맞추어 먹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깜짝 놀랐다.
롤랜드는 차기 남작위까지 물려받을 예정이었기에 엄격한 예법을 익혔고, 멜리사는 그런 롤랜드를 보며 따라 익힌 모양이었다.
클로드가 무심코 한마디 던졌다.
“아이들을 잘 키웠군.”
카리나는 곧바로 감사하다고 대답하려다가, 번뜩 떠오른 생각에 몸이 저절로 굳고 말았다.
‘아이들을 키운 건 내가 아니야. 그럴 수가 없어.’
그녀는 죽은 남편의 전 부인이 키운 아이들을 어쩌다 떠맡게 된 불운한 과부일 뿐이다.
즉, 이 아이들을 키운 건 그녀가 아니었다.
“애들 아빠가 잘 키웠죠.”
“……귀족이었나?”
“절대 아니에요.”
카리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렇군. 기분 나빴다면 실례했다. 보아하니 또래 아이들보다 교육을 잘 받은 듯해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꾸며낸 이야기를…… 의심하는 걸까?’
카리나는 자녀가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직업을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상인이었어요.”
클로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상인이면 재산도 꽤 남겼을 텐데, 왜 이런 곳에서 고생하고 있지?”
“…….”
말문이 턱 막혔다.
‘그 생각을 못 했어…….’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말들은 모두 뻔한 변명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그때, 멜리사가 입을 삐죽이며 클로드를 향해 고사리손을 죽 뻗었다.
언제 클로드를 경계했냐는 듯 친근해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삼촌, 삼촌이 나쁜 사람이었어요.”
롤랜드 역시 조금 전까지 우물거리던 고깃덩어리를 꿀꺽 삼키고 큰 소리로 덧붙였다.
“네, 삼촌이 우리를 때리고 돈도 다 가져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