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블로에 부인.”
클로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리나는 몸을 돌렸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이들이 고양이도 무서워하나?”
“아뇨.”
렝케 경이 롤랜드에게 야수가 아닌 다른 것을 공격하게 만든 건 오직 그 강아지 한 마리뿐이었다.
카리나는 렝케 경의 저택에서 고양이와 함께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본 적도 있었다.
“다행이군. 쥐 때문에 고양이를 많이 키우고 있거든.”
“쥐요?”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무려 남부 전체를 다스리는 공작저도 쥐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때, 롤랜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양이요?”
“그래, 무서우면 방에 고양이가 싫어하는 풀을 가져다 두면 된다.”
“고양이는 좋아요.”
롤랜드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멜리사 역시 진정되었기 때문에 카리나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이동할 수 있었다.
카리나는 공작저에 들어가자마자 클로드가 콕 집어 고양이를 언급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새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값깨나 나갈 듯한 조각상의 머리에 앉아 빤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멜리사가 고양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야옹아.”
“이 녀석 이름은 데이지란다.”
멜리사는 뾰로통하니 고개를 돌렸지만 카리나는 ‘데이지’라고 중얼거리는 멜리사의 입 모양을 놓치지 않았다.
‘정말로 많네.’
곳곳에서 고양이가 한 마리씩 튀어나왔다.
사용인보다 고양이가 많아 보일 정도라, 이 많은 고양이를 먹여 살릴 쥐가 공작저에 과연 있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고양이는 모두 각양각색이었는데, 클로드는 그 모두의 이름을 꿰고 있는 듯했다.
하나같이 꽃 이름이 붙어져 있어서, 카리나는 내심 멜리사라는 고양이도 있는지 궁금했지만 없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공작저의 내부 뜰에 있는 작은 이층집에 도착했다.
소박하고 아담한 벽돌집이었다.
‘역시 공작저 안에 묵는 게 아니었구나.’
이층집은 공작가의 일원이나 손님이 묵을 숙소라기보단 제법 지위가 높은 사용인의 집에 가까워 보였다.
실망은커녕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만약 공작저에 머무르며 극진한 손님 대접을 받아야 한다면 부담스러워서 매일이 가시밭길일 것이다.
문은 클로드가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저절로 열렸다.
“……!”
카리나와 아이들의 눈이 커졌다. 밖에서 보기엔 평범한 평민의 주택처럼 보였던 벽돌집의 내부는, 공작저 내부 못지않게 화려했다.
“정말 저희가 여기서 사는 거예요?”
아까의 어두운 표정은 완전히 사라진 롤랜드가 밝게 물었다.
“그럼.”
“나쁜 사람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야.”
카리나는 롤랜드에게 주의를 주었다. 자신의 표식이 사라지면 떠나야 할 집이다.
아이들이 이 집에서 영원히 살기를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롤랜드는 이런 집에서 잠시나마 산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은 듯했다.
“여기에도 고양이가 있어요?”
“쥐가 있는 곳에는 어디나 있지.”
클로드가 엄숙하게 말했다.
“그리고 여긴 쥐가 참 많단다.”
카리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여관엔 쥐보다 더한 것들이 돌아다녔다.
클로드가 아이들을 향해 허리를 구부렸다.
“2층엔 너희들을 위한 방이 있을 것 같구나. 먼저 하나씩 정해 보는 건 어떻겠니?”
멜리사는 못 들은 체했지만 롤랜드는 카리나를 향해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올라가도 돼요?”
“그럼. 엄마도 같이 가자.”
곧장 아이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카리나를 클로드가 제지했다.
“부인에게만 보여 줄 곳이 있어.”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늘상 그녀가 아이들의 뒤를 쫓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들은 카리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층계를 우당탕 올라갔다.
클로드는 아이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카리나를 어디론가 안내했다.
바로 집과 완전히 분리된 거대한 창고였다.
“부인이 직접 여는 게 좋겠군.”
카리나는 무심코 음식 재료가 가득한 식품저장소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문고리를 돌렸다.
“……!”
안은 다른 의미의 재료로 가득했다. 카리나는 순식간에 열 개도 넘는 마법 재료들을 알아보았다.
말린 약초들처럼 제법 구하기 쉬운 재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마물의 뿔처럼 렝케 경이 애지중지하던 재료도 상당했다.
없는 건 오직 마정석뿐이었다.
만약 렝케 경이 봤다면 탐욕스러운 얼굴로 주머니에 귀중한 마법 재료들을 한가득 쑤셔 넣었을 것이다.
“이 집은 원래 사촌이 마법을 연구하던 곳이야.”
카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소박해 보이는 집은 실은 공작가의 일원이, 그것도 귀중한 마법사가 연구실로 삼던 장소였던 것이다.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곳이네요. 감사합니다.”
카리나의 목소리는 평소 클로드에게 말하던 톤보다 몇 배나 밝았다.
클로드가 왜 그녀에게만 이 장소를 보여 주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당연히 롤랜드의 재능을 키워 주라는 뜻이리라.
하지만 클로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왜 아이들이 나오지?”
그제야 카리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점을 감지했다.
“당연히 아이들이 마법을 배울 곳이 아닌가요?”
“블로에 부인.”
클로드가 카리나의 말을 끊었다.
“아이들이 마법을 배웠으면 하는 부인의 마음은 이해한다. 마법사만큼 빠르게 신분을 상승할 방법도 드무니까.”
“각하……?”
“하지만 이것 하나만 확실히 해 두지. 여긴 위험하니 아이들이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해.”
“그럼 여긴, 저만 쓰는 건가요?”
“그래. 오직 부인만이 쓸 수 있는 공간이야.”
카리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은 분명 클로드에게 마법을 쓰면 안 되는 체질이라고 밝혔다.
이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란 말인가?
“각하,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마법을 쓰면 안 되는 체질입니다.”
“알고 있어.”
클로드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럼, 이것들은 절 위한 건 아니네요.”
“그럼 여기 이 모든 게, 오직 마법사만을 위한 것인가?”
“그건 아니죠. 하지만…….”
클로드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그녀의 말을 끊었다.
“부인은 와일더의 밑에서 마정석을 다루지 않았나. 와일더도, 부인도 마법사가 아닐 텐데.”
“마정석은 달라요.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마법을 위한 재료잖아요.”
“그 마법을 위한 재료에 대해 마법사보다 더 잘 알아야 하는 사람이, 바로 마법상이지.”
“아……!”
카리나는 그제야 클로드가 원하는 바를 깨달았다.
‘하기야, 내가 마법상이 되면 롤랜드에게도 도움이 되겠지.’
마법상은 희귀한 직업이었다.
실력 있는 마법상은 더더욱 드물어서, 뛰어난 마법상을 찾아가기 위해 국경을 넘는 마법사들도 상당수 있을 정도였다.
당연히 공작가에게도 도움이 될 터이고.
‘롤랜드 말고도…… 나 또한 붙잡고 싶어 하는 거야.’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서둘러 그 생각을 머리 한편으로 넘겼다.
어차피 롤랜드 때문에라도 가까이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와일더에게서 들었어. 부인이 좋은 마법상이 될 거라고 하더군.”
카리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각하, 호의엔 진심으로 감사드리나 저는 공작가의 가신이 될 수 없어요.”
“가신이 되어 달라고 하는 게 아니야. 뛰어난 마법상은 그 존재만으로도 토르스의 큰 자산이지.”
카리나는 더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롤랜드의 교육도 넌지시 바라고 있을지도 몰라.’
그녀는 클로드의 목적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아, 아이들은요?”
“아이들?”
클로드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위험하다고.”
“하지만, 저는…….”
“겨우 일고여덟 살 된 아이들이 아닌가? 벌써 마법 교육을 시키는 건 너무 성급한 것 같군.”
“그, 그런가요?”
“내가 마법을 처음 접했을 땐 열한 살이었어. 지금 생각하면, 그 나이도 한참 이르지.”
클로드는 조금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는데, 어른들의 말만 믿고 목숨을 걸었으니까.”
“…….”
말문이 턱 막혔다.
여태까지 렝케 경이 데리고 온 아이들은 모두 열 살보다 어렸다.
그동안 카리나는 렝케 경의 방식이 잘못되었다고만 생각해 왔기에, 그 아이들이 마법을 접하기에 너무 어리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클로드의 얘기를 들으니 여태까지 생각해 보지 못한 의구심이 자라났다.
성공했을 때의 마법은 그 어떨 때보다도 강한 쾌감을 가져다주지만, 그 성공을 이루기 위해선 처절한 실패를 수없이 많이 겪어야 한다.
착잡한 마음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어린아이가 겪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었어.’
실제로 렝케 경이 데려온 아이들 중 반절이 폐인이 되어 저택에서 나가지 않았던가.
“블, 블로에 부인.”
카리나는 당황한 클로드의 목소리가 들려온 다음에야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황급히 소매로 눈물을 훔쳐냈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요.”
“…….”
다행히 눈물은 빨리 말랐지만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내가 무례한 말을 했다면 진심으로 사과한다.”
“아니에요.”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냥, 제가 그동안 아이들에게 못할 생각을 한 것 같아서…….”
그동안 자신의 머릿속엔 온통 롤랜드와 멜리사가 마법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심지어 아직 마법을 꺼려 하는 롤랜드에게 마법을 권유했다.
“블로에 부인.”
클로드가 진지하게 그녀를 불렀다.
아이들의 엄마가 되기 위해 가장한, 가짜 호칭으로.
“부인이 무슨 생각을 했든, 그건 전부 부인의 아이들을 위해서였어. 그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