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블로에 부인.”
카리나의 눈이 잠시 허공을 방황했다가 간신히 클로드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금빛을 띤 초록색 눈엔 물기가 서려 있었다.
조금 전 목숨을 잃을 뻔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담담한 목소리가 클로드의 귓가를 때렸다.
“어떻게 늦지 않게…… 오셨네요.”
“아니, 늦었다.”
클로드는 이를 악물었다.
말을 타고 시가지를 빠져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조금 전 지나쳐 온 방향에서 느껴졌다.
목덜미에 소름이 쭈뼛 끼쳤다.
한때는 공작가의 가신 중에도 유능한 마법사가 있었지만 그마저도 클로드의 즉위 직후 황실의 부름을 받아 수도로 이주해 버렸다.
‘적이다.’
피가 식었다.
그의 적들이 시가지에서 노릴 장소야 뻔했다.
클로드는 바로 말의 머리를 돌렸다. 블로에 부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비록 블로에 부인이 자신의 제안을 두 번이나 거절했다고는 하나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소중한 가신 후보가 다치는 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었다.
‘제발, 늦지 않기를.’
하지만 보석 상점에 도착하자마자 사투 끝에 지쳐 바닥에 쓰러진 블로에 부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아직도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블로에 부인을 향해 힘겹게 한 마디를 토해냈다.
“너무…… 늦었지.”
수 분이 지난 후에야 카리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땀과 눈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진동에 계속 시달린 탓인지 온몸이 쑤시고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슨……. 이게 다 무슨…….”
“방심한 탓이다. 나도, 와일더도.”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
클로드가 와일더를 탓한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귀족들은 모든 문제를 만만한 아랫사람의 탓으로 돌리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 원인에 클로드 자신도 끼워 넣었다는 건 상당히 의외였다.
“괜찮아요. 마정석을 다루는 일을 하는데, 이 정도는 감수해야죠.”
물론 카리나는 괜찮지 않았다.
조금 전 죽을 뻔했는데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카리나는 드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책임과 실책을 인정하는 이 남자를 안심시켜 줄 필요를 느꼈다.
“그런 뜻이 아니야.”
클로드는 정말로 답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건 와일더를 노린 습격이다.”
“습격이요……?”
카리나는 멍하니 클로드를 바라보기만 했다. 머리가 온통 하얗게 변해 입만 뻐끔거릴 뿐,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맞아, 이건 습격이야!’
깨달음이 조금 뒤늦게 그녀를 강타했다.
또 폭주하는 마정석에 얽히는 일이야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가게 전체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진동하는 건 누군가가 인위적인 술수를 쓰지 않고선 불가능했다.
“하필 와일더가 가게를 비우는 바람에…… 전혀 관련이 없는 블로에 부인이 휘말리게 되었군. 정말로 미안하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요?”
카리나는 성급히 물었다.
아무리 대우가 좋다 하더라도 시시각각 목숨의 위협을 받는 직장을 계속 다닐 수는 없었다.
와일더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덕에 토르스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니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는 건 한층 수월할 것이다.
클로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호한 표정으로 힘을 모두 소진한 듯한 마정석을 집어 들었다.
“이 마법은……. 나도 몇 년 만에 본다. 폭주한 마정석을 가장해 사람을 홀리고 멋대로 제어하는 건 극히 일부분이지.”
“네. 집을 뒤흔드는 게 훨씬 무섭게 느껴졌어요.”
조금 전 클로드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무너진 집에 깔려 죽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마정석의 폭주에 대항하는 건 한 번 성공하고 나니 제법 자신감이 생겼다.
‘다음엔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평온하게 조금 전을 떠올리는 카리나와 반대로, 클로드는 굉장히 초조해 보였다.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했다면 이 마법은 그대의 생명력을 끝까지 뽑아냈을 거다.”
“네……?”
카리나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은 그저 끝없이 진동하는 집 안에 갇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생명력이라니?
“만약 내가 도착하기 전에 이 집에서 나갔다면 발길이 멈춘 곳에서 죽었을 거야.”
“……말도, 안 돼요.”
카리나는 고개를 뒤흔들었다. 조금 전 자신이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 맞닥뜨려 있었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불행히도, 클로드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야. 언제든지 다시 노려질 수 있어.”
클로드는 카리나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암살에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서, 마정석이 그대의 심장에 표식을 남겼어. 그 어떤 곳도 그대에게 안전하지 않아.”
침묵이 흘렀다.
카리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잠시 눈앞이 아찔했지만, 어떻게든 버텨서 상황을 파악해야만 했다.
“표식이라뇨?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어요!”
“들어본 적 없는 게 당연해. 정신이 똑바로 박힌 마법사라면 쓸 리가 없는 금지된 마법이니까.”
물론 렝케 경은 정신이 똑바로 박힌 마법사가 아니었고, 금지된 마법도 거리낌 없이 시전하곤 했다.
하지만 카리나는 그 사실을 굳이 클로드에게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정확히 어떤 종류의 표식인가요?”
카리나는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이미 사고는 일어났다. 최선을 다해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표식 자체가 그대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시전자는 그대가 언제 어디에 있든 그대의 위치를 알 수 있지. 지금 이 순간에도…….”
“…….”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는 와일더 씨를 겨냥한 거였군요.”
“그래.”
“대체 와일더 씨에게 어떤 원한이 있기에…….”
“원한?”
클로드는 코웃음을 쳤다.
“내게 와일더는 부모님이 남겨 주신 귀중한 유산이야. 제거한다면 당연히 큰 타격이 되지. 그게 다야.”
“그냥, 공작 각하께 손해를 입히려고……?”
“정확하군.”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카리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렝케 경 같은 악인을 평생 겪어 왔는데도, 사람들의 악의는 그녀를 놀라게 만들었다.
“여하튼, 그대는 이제 내 적들의 표적이 되었어.”
“……제가 와일더 씨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면 돌아가지 않을까요?”
“그럴 리가.”
클로드가 쓰게 웃었다.
“이미 그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했을 거야. 와일더의 조수고, 내가 영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겠지.”
“…….”
“노렸던 사람은 아니지만, 그대를 제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커.”
카리나는 고개를 들었다.
처음엔 두려움이 마음을 꽉 쥐고 놓아 주지 않았고, 그다음엔 억울함이 머릿속에 한가득 찼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고개를 치밀고 올라오는 감정은, 분노였다.
“왜, 저는 여태까지 경고 한 번 받지 못했나요?”
“그건…….”
클로드는 무어라 변명하기 위해 입을 연 듯했지만, 카리나의 이어지는 말에 다시 입을 닫고 말았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게 공작 각하나 와일더 씨의 잘못이 아닌 건 알고 있어요. 그러니 제가 각하의 적들에게 노려지든 말든 그 문제로 각하께서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클로드는 섣불리 사과하지도, 변명하지도 않았다.
그저 카리나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 정도는 알려 주셔야 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마음의 대비라도 하고 있을 테니까요.”
카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 전 겪었던 고통이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신체적인 고통보다도 더욱 괴로웠던 건 누군가가 구해 줄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만 했던 무기력함이었다.
“무방비하게 눈물만 흘리면서 각하께서 구해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침묵이 흘렀다.
클로드는 말문이 막힌 얼굴로 카리나를 바라보았다.
카리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일개 평민이, 남부를 다스리는 공작에게 대답을 감히 어떻게 재촉하겠는가?
“……이런 일이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 보니, 최악의 판단이었군.”
클로드가 쓴웃음을 지었다.
“진심으로 사과한다. 이제부터 부인을 위험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면 그 무엇이든 알려주도록 하지.”
“감사…….”
클로드는 고개를 저으며 카리나의 말을 끊었다.
“감사할 것 없어. 부인의 말대로, 진작 알려 주었어야 할 정보니까. 이번 일이 끝나면 마땅한 보상 역시 받게 될 거야.”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이 남자는 정말로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쁜 사람은 아니야.’
어쩌면 자신에게는 절실하지만, 세간의 시선으로 보기엔 얼토당토않은 요구도 받아줄지도 모른다.
그녀는 클로드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보상, 지금 받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