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입양합니다 (26)화 (26/145)

<26화>

‘겁먹지 마. 겁먹지 마, 겁먹지 마…….’

카리나는 속으로 되뇌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공황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 하는지 배웠잖아.’

와일더가 일러준 대로 눈을 딱 감고, 버티면 홀리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미 늦었어!’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마정석에 못 박힌 듯한 눈을 감거나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카리나는 와일더가 알려준 방법은 예방책이었지, 마정석에서 홀린 상황에서 빠져나올 해결책은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대로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하지만 카리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저번처럼 무기력하게 바닥에 쓰러져 허덕이다 남의 도움만 받을 수는 없었다.

혹은 죽거나.

카리나는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정신 차려. 렝케 경에게서 도망치는 건 이것보다 더 위험했어. 멍청하게 넋만 안 빼놓으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야.’

와일더의 설명에 따르면, 그때 자신이 당황하여 휘말린 것처럼 넋을 완전히 놓지만 않으면 마정석은 치명적인 위해는 가하지 못한다.

물론 무사히 빠져나오더라도 꽤나 고통스러울 거라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좀 아픈 것 정도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카리나는 무사히 아이들에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고통 정도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눈을 감을 수 없어도 빠져나오는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버티자.’

와일더가 말해준 방법의 골자는 그리 대단한 게 아닌, ‘버티라는’ 것이었다. 이미 홀린 후라고 해서 대응법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카리나는 눈앞의 마정석이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려 애썼다.

당연히 그녀가 떠올린 대상은…….

‘롤랜드, 멜리사.’

카리나는 필사적으로 둘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 나이대 아이답게 천진난만하게 즐거워하는 롤랜드와, 진지한 얼굴로 카리나에게 안겨 오는 멜리사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창백하게 질린 채 괴로워하는 두 아이의 모습까지…….

‘애들에겐 나밖에 없어.’

마정석에 저항하는 카리나의 하얀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카리나는 이를 악물며 버텼다.

저번처럼 힘없이 마정석에게 굴복한다면, 누군가가 운 좋게 구해주지 않는 이상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카리나의 빈약한 지식과 경험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어떻게든 해야 해……!’

카리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 순간.

눈앞에 시뻘건 글씨들이 맨 살갗에 낙인을 찍듯 불타올랐다.

전생에 읽은 책의 글귀들이었다.

「문을 연 순간,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들었다.

여태껏 불길한 직감이 틀린 적이 없었기에 롤랜드는 바짝 긴장한 채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만약 혼자 살았다면 한 톨 어치의 걱정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롤랜드는 지금, 카리나와 함께 살고 있었다.

카리나는 렝케 경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이후 그 어떤 도움의 손길도 거부했다.

짐이 되기 싫다나 뭐라나.

하지만 롤랜드는 멜리사가 죽은 이후 렝케 경의 고문을 받으며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카리나를 도저히 못 본 체할 수 없었다.

카리나는 이제 겨우 서른 중반에 불과했지만, 렝케 경의 고문은 그녀를 머리가 하얗게 세고 전신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게 진 노파의 모습으로 만들어놓았다.

다행히 카리나도 롤랜드의 간곡한 설득에 마음을 열었다.

비록, 건강해지면 그만 얹혀살겠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하지만 카리나도, 롤랜드도 그녀가 건강해지는 날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롤랜드 도련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롤랜드는 재빨리 카리나가 있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카리나가 마정석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채 경련하고 있었다.

롤랜드는 바로 상황을 알아차렸다.

‘원래는 나를 노린 함정이야.’

무수히 많아 누군지 짐작이 되지도 않는 적 중 한 명이, 그를 노리고 폭주하기 쉬운 마정석을 보냈다.

롤랜드는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상황 자체는 그렇게 위험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늦게 돌아왔을 경우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해졌다.

마정석의 폭주는 자신만큼 마법에 조예가 있는 마법사에겐 성가신 수준의 해프닝에 불과했다.

하지만 카리나처럼 아무런 마법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순식간에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었다.

그는 차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카리나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카리나, 괜찮아요. 안심해요.”

“도련님……!”

카리나의 주름진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롤랜드는 바닥에 반쯤 쓰러진 그녀의 몸을 억지로 지탱했다.

만약 마정석에 홀린 초기에 발견했더라면 강제로 카리나와 마정석의 연결을 끊어낼 수 있었겠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

‘카리나 스스로 빠져나와야 해.’

그는 카리나를 안심시키려 노력하며 최대한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카리나, 숨을 들이쉬고……. 마력을 분출시켜요. 마정석의 마력이 그대로 몸을 통과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왔다가 지나가는 바람처럼요.”

“하지만 도련님, 저는 마법을…….”

“겁먹지 말아요. 이건 마법이 아니니까, 카리나도 할 수 있어요.”

얼마나 지났을까.

요동치던 카리나의 몸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마력을 분출하던 마정석도 평범한 돌덩어리로 돌아갔다.

그는 카리나를 완전히 안정시킨 다음 마정석을 확인했다.

‘역시.’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보낸 자의 이니셜이 마정석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다.

C.D.T」

이번엔 정신을 잃지도 쓰러지지도 않았다.

카리나는 홀린 듯 글자 속 롤랜드가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마력은 싸워야 할 대상이 전혀 아니었어.’

책 속 롤랜드의 조언을 따르는 건 쉽지만은 않았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카리나는 이를 악물며 버틴 끝에 롤랜드의 조언대로 마력을 그대로 흘려보낼 수 있었다.

마력은 카리나를 휩쓸고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대신 그녀의 몸을 조용히 통과했다.

거센 강풍을 가로막는 벽에서, 뻥 뚫린 통로가 된 기분이었다.

바람의 힘은 고스란히 느끼면서도 절대로 부서지지는 않는.

다행히 수 분 만에 카리나는 안정을 되찾았다.

미쳐 날뛰던 마정석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다.

‘살, 살았어…….’

그제야 긴장이 풀린 카리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까슬까슬한 마룻바닥에 다리가 쓸렸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지금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살아남았다는 사실 하나만이 중요했다.

그때였다.

가게 전체가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크게 진동한 것은.

“아악……!”

카리나는 속에서 들끓는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진동은 점점 더 심해져 진열장이 하나둘 쓰러지는 지경이 되었다. 카리나는 바닥을 부여잡으며 버텼다.

“아파, 아파……!”

카리나는 신음을 토해냈다. 조금 전 마정석과의 기 싸움에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며 대항했기 때문에 갑자기 급변한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나가야 해!’

왜, 어떻게, 라는 의문조차 품을 시간이 없었다. 카리나는 바닥을 꾸물꾸물 기어 현관과 겨우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까지 도달했다.

“블로에 부인!”

카리나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창문 밖으로 막 달려온 듯한 클로드의 모습이 보였다.

항상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던 은빛 머리칼은 온통 헝클어졌고, 차갑기만 하던 새파란 눈동자는 분노로 타오르고 있었다.

카리나는 안도감과 함께 눈물을 글썽이며 클로드의 모습을 필사적으로 좇았다.

‘이제…… 살았어.’

클로드가 왔으니, 그녀는 이제 이 영문 모를 상황에서도 벗어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카리나를 마지막으로 지탱하고 있던 한 줄기 의식이, 몰려드는 안도감에 긴장을 풀고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의식을 완전히 잃은 카리나의 몸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토르스의 공작, 클로드는 품속에서 루비 여섯 개를 꺼내 공중에 흩뿌렸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루비 여섯 개가 공중에서 타오르는가 하더니, 다음 순간 여섯 자루의 검붉은 검으로 바뀌어 땅에 박혔다.

그는 여섯 자루의 검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현관문이 아닌 창문으로 다가갔다.

가게의 현관에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생성된 마법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루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잘게 빻아진 유리들이 사방에 널린 걸 보니 얼마나 강력한 마법이 집을 흔들어댔는지 알 만했다.

‘…….’

클로드는 안에 있을 카리나가 겪었을 고통이 충분히 짐작되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지금은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생각하지 말자. 블로에 부인이 동정을 바라는 사람도 아니니.’

그는 첫 번째 검을 냅다 창문을 향해 집어 던졌다.

쾅!

검은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창틀에서 정확히 한 뼘가량 떨어진 공중에 박혔다.

쾅! 쾅! 쾅! 쾅! 쾅!

다섯 번의 파열음이 이어진 끝에 여섯 자루의 검은 사람 하나가 능히 통과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육각형을 이루었다.

이 가게를 지배하고 있는 마법의 맥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절단 마법식이었다.

“블로에 부인!”

클로드는 카리나를 소리쳐 부르며 창틀을 단걸음에 건너뛰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개자식들.’

가게 내부는 무엇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와일더가 평생에 걸쳐 모아온 자랑스러운 보석들이 바닥에 나뒹굴었고, 거대한 진열장이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블로에 부인이…….

바닥에 눈물과 함께 하얗게 일어난 손톱자국을 보자 분노가 들끓었다.

클로드는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바닥에 힘없이 너부러진 카리나를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이것으로 그가 쓰러진 카리나를 일으킨 건 두 번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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