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일전에 보낸 초대장에 대한 답을 받으러 왔다.”
“네……?”
카리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어안이 벙벙했다.
초대장이라니.
대체 언제 그런 걸 자신에게 보냈다는 말인가.
클로드도 놀란 듯 카리나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부인의 집으로 보내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와일더에게로 보냈는데. 설마, 못 받았나?”
“네.”
카리나는 정말 억울해졌다. 아무리 자신이 겁이 없다 한들 토르스에 살면서, 토르스 공작의 초대장을 무시할 만큼 간이 크지는 않았다.
‘아니, 그건 머리가 없는 거지.’
카리나는 진정성을 보여 주기 위해 최대한 또박또박 대답했다.
“감히 제가 각하의 초대장을 무시할 리가 없잖아요. 당연히 보지도 받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초대하신 건가요?”
“그래, 못 받은 거였어.”
무려 자신이 보낸 초대장이 어디선가 분실이 되었다는 데도 공작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 반대였다.
“그럼 거절은 한 번만 당했다고 생각해도 되겠군.”
“네?”
클로드의 알쏭달쏭한 말에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거절이라니?
“블로에 부인.”
클로드가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부인이 나를 꺼리는 건 알고 있어. 내가 토르스를 다스리는 공작이기 때문이겠지.”
“…….”
“만약 내가 부유한 상인이었다면 부인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을 거야. 그렇지 않나?”
“……네.”
카리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클로드가 자신에게 공작가의 가신을 제안해왔을 땐, 아직 그가 롤랜드에게 관심을 보이기 전이었다.
당연히 클로드가 귀족이 아니었더라면 카리나는 기뻐하며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클로드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 기묘한 상황이군. 여태까지는 도움만 되어왔던 것이…… 지금은 방해가 된다니.”
“각하껜 감히 저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가신들이 많…….”
“많지 않아.”
클로드가 단칼에 카리나의 말을 잘랐다.
“아니, 없어.”
“없다니요?”
카리나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당장 와일더만 해도 공작가의 가신이었다고 했다. 지금은 은퇴한 듯했지만, 공작가에 유능한 가신이 와일더뿐이었을 리가 없다.
게다가 소설 속 내용을 생각한다면 공작은 인재광.
자신처럼 무려 공작의 가신 자리를 거부하는 사람이 많을 리가 없으니, 분명 그동안 상당히 많은 인재들을 영입했을 것이다.
“다 나를 떠났지.”
“뭐라고요?”
카리나는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예의도 잊고 크게 소리치고 말았다.
제 발로 떠났다니.
그 말은, 공작이 부족한 군주라는 말밖에 더 되겠는가.
사실이든 거짓이든 공작의 입에서 나올 수가 없는 말이었다.
다행히 클로드는 얼핏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카리나의 태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블로에 부인이 나를 떠난다 해도 노여워하지 않겠다. 어차피 숱하게 겪은 일이라 이제는 익숙해.”
“……”
“그러니, 나를 이용해라.”
카리나는 어안이 벙벙해 입을 살짝 벌린 상태로 굳어지고 말았다.
“와일더를 폄하하진 않겠다. 좋은 고용주고, 좋은 스승이겠지. 분명 부인에게 많은 걸 알려줄 거야.”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나는 와일더가 줄 수 없는 것들을 줄 수 있어.”
새파란 눈이 그녀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곳에서 숱하게 받아 왔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리는 시선이 아니었다.
분명, 날카롭기 그지없는데도 그 기저에 맹렬함이 일렁이는 시선이 내면까지 뚫어볼 기세로 카리나를 집어삼켰다.
카리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어떤…….”
“부인의 재능은 단순히 마법상을 하기엔 너무 아까워.”
“…….”
카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남자는 그녀가 가진 마법사의 재능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카리나는 마법을 사용하지 말아야 할 체질이었으니, 클로드는 잘못 짚어도 크게 잘못 짚은 셈이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그 사실을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해묵은 것도 아닌, 아직 생생하게 벌어져 피를 흘려내고 있는 상처를 자신의 손으로 헤집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밑에서 배우고 증진해라. 공작가의 가신이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모두 사용해서, 부인 자신의 역량을 키워.”
카리나가 마법사가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벌써 충성을 맹세하며 무릎을 꿇고도 남을 만큼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카리나는 귀족 가문의 가신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예상할 수 있었다.
웬만한 귀족들은 가신에게 의무만을 요구하지 권한을 최대한 이용하라는 말은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럼 뭐해,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마법사는 될 수 없는걸.’
차라리 클로드가 공작가의 마법상을 제의했더라면 카리나는 크게 흔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남자가 원하는 건 그녀의 마법사로서의 자질이었다.
절대 사용해선 안 되는.
“교장에게서 들었다. 아이들이 나이에 비해 무척 영특하다더군.”
“……!”
카리나의 눈이 흔들렸다.
순간, 롤랜드를 바라보던 클로드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클로드는 카리나의 동요를 눈치챈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추가 교육을 위해 유능한 가정교사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부인의 사정으론 어려울 것 같다고 염려하더군.”
“…….”
“가신의 가족들 역시 미래의 가신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아이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약속하겠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미래의 가신.
그 말인즉슨, 롤랜드와 멜리사가 공작가의 교육을 받고 재능을 꽃피우면 두 아이 역시 자동적으로 공작가의 가신이 된다는 뜻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니야.’
생각해 보니 당연했다.
카리나가 마법사의 재능이 좀 있다고 해도, 대마법사가 될 정도는 아니다. 아니, 애초에 평범한 마법사조차 되지 못한다.
하지만 롤랜드는 미래 대마법사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자질을 갖추고 태어났으며 멜리사 역시 영특했다.
‘목적은…… 롤랜드였어.’
그렇다면 당연히 가신이 되어선 안 된다. 카리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각하, 저는 부족하여…… 누만 끼칠 거예요. 가신이 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어. 그대보다 훨씬 못한 자들도 많이 봐왔다. 내 눈을 믿어 주었으면 좋겠군.”
“아뇨.”
카리나는 눈을 꽈악 감았다가 다시 떴다. 클로드의 냉철한 시선은 여전히 그녀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냥, 말해 버려.’
카리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가끔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헤집어야 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저는 각하께서 생각하는 그런 재능은 없어요. 왜냐하면…….”
클로드가 카리나의 말을 단칼에 끊었다.
“부인은 내 안목을 못 믿는 건가? 아니면 무시하는 건가? 나는 부인이 그동안 토르스의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들을 몇 번이나 해내는 걸 봐 왔어.”
“각하, 저는 마법을 쓸 수 없는 체질이에요.”
잠시 적막이 흘렀다.
클로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지?”
“와일더 씨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저는 마법을 쓰면 안 되는 체질이라고.”
카리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클로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작 말할 걸 그랬어.’
오히려 말을 토해내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그래, 좀 특이한 체질이라는 게 무슨 잘못이야?’
다름 아닌 와일더의 판단이니, 공작도 이쯤 하면 포기하고 돌아갈 것이다.
사실 그가 정말로 가신으로 삼고 싶은 건 롤랜드겠지만, 이제 겨우 여덟 살 난 꼬마를 가신으로 삼겠다 우긴다면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고도 남았으니까.
‘와일더 씨껜 죄송하지만…… 토르스를 떠날 생각을 해야겠어.’
일반적으로 귀족가의 가신은 성인만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열둘, 열셋 즈음부터 종자 신분으로 가신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롤랜드가 그 나이가 되기 전에는 토르스를 떠나야 했다.
‘롤랜드랑 멜리사는 자유롭게 살아야 해. 소설과는 달리…….’
렝케 경의 학대에 시달리다 죽은 멜리사는 말할 것도 없고, 롤랜드 역시 렝케 경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행복하지 않았다.
여러 대귀족은 물론 황실까지도 롤랜드를 노렸으며 더 나아가 기존 마법사들 역시 그를 자신의 파벌로 끌어들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롤랜드가 원한 건, 오직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평온한 삶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차라리 적당한 시기에 마탑으로 들어가는 게 나아.’
전생에 읽은 소설에서의 롤랜드 역시 그 방법을 선택했다.
마탑 출신 마법사가 아니었기에 이방인이 겪는 여러 고충은 있었지만 그래도 정쟁에 휘말리는 것보단 안온한 삶이었다.
‘아이들을 마탑에 보내면…… 나는 쓸쓸해지겠지.’
카리나는 부질없는 생각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마탑은 스무 살은 되어야 들어갈 수 있다. 십 년도 더 넘게 남았는데, 지금 걱정해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믿을 수가 없군.”
클로드의 중얼거림이 카리나를 긴 생각으로부터 끄집어냈다.
“네. 전 마법을 전혀 제어할 수 없는 체질이래요.”
“그래도 노력하면…….”
“노력으로 가능한 문제라면, 와일더 씨가 이미 제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까요?”
“그렇군.”
클로드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정말 아까워.”
카리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아니라, 롤랜드를 아까워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부정적인 감정은 일지 않았다.
클로드 데비아탄 토르스는 공작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은, 아이들의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고.
카리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른 용건은 없으신 건가요? 말씀해 주시면 전해드릴게요.”
“없다. 실례했네, 블로에 부인.”
카리나는 거리에 나가서 클로드가 말에 올라탈 때까지 배웅한 다음에야 가게로 돌아왔다.
‘휴…….’
이제 공작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일 일은 없을 것이다.
‘롤랜드가 클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겠지.’
카리나는 보석 상점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청소를 거의 끝낸 시점이었기 때문에 흡족할 정도로 깨끗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이었다.
그때.
나란히 진열된 보석 세공품 중, 머리핀에 장식된 자그마한 진주 한 알이 그녀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안 돼……!”
카리나의 목에서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이 느낌을 알았다.
폭주 직전의 마정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