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왜지?”
클로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즉위 이후, 시종장은 꼭 그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에만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래서 그 이유가 무엇이든 주의 깊게 들어볼 생각이었다.
“아시잖습니까.”
“모르겠는데.”
클로드는 답을 알면서도 잠시 딴청을 피웠다.
“테일즈 경이 각하를 배신하고 떠난 게 겨우 두 달 전입니다!”
“배신이라니.”
클로드가 딱딱하게 대답했다.
“입조심하게, 치체스터 경. 테일즈 경이 들으면 섭섭하겠어.”
“배신 맞잖습니까. 겨우 종자 나부랭이를 삼 년간 번듯한 기사로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포드 백작가로 가버리다니……!”
“어쩔 수 없지.”
씁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번듯한 기사로 키워 주면 뭐해, 수도에 번듯한 집 하나 마련하는 게 꿈이었다는데.”
포드 백작가는 수도, 에드무어에서 부유한 상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테일즈에게 집 하나 마련해 주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공작가 역시 돈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포드 백작가가 들인 돈보다 몇 배를 들일 수도 있었다.
문제는 테일즈는 단순히 수도의 집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에드무어에서 살기를 원했지. 남부는 지긋지긋하다면서…….’
그 당시, 클로드는 지금처럼 쓴웃음을 지으며 테일즈를 조용히 보내주었다.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배신감이 들지도 않았다.
“대체 몇 명입니까. 실컷 키워 놓았더니 수도로 홀랑 내뺀 것들이.”
“한때 내 밑에서 충성을 다한 자들을 그렇게 나쁘게 말하지 말게.”
여기가 시골인 것도 사실이니까.
클로드는 뒷말은 조용히 삼켰다.
자신의 즉위 이후 토르스는 많이 발전하긴 했지만, 수도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만큼, 수도의 인프라를 쫓아 간 사람들을 탓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 충직한 시종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각하는 너무 자비로우셔서 탈입니다. 그러니 그자들이 겁 한 번 먹지 않고 냉큼 모시는 주인을 갈아치운 거겠지요.”
시종장이 클로드를 안쓰러운 듯 바라보았다.
“북부에서 온, 원래는 수도로 가고 싶어 했던 평민이라. 끝이 어떻게 될지 뻔히 보이지 않습니까?”
“블로에 부인은 딱히 그런 욕심은 없어 보였어. 죽은 남편의 아이도 둘이나 키우고 있고, 모험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니야.”
“사람은 돈이 생기면 생각이 변합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십시오. 와일더의 조수라니, 잘 됐지 않습니까?”
“…….”
클로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종장이 어떠한 맥락에서 생뚱맞아 보이는 말을 꺼냈는지 짐작이 충분히 갔기 때문이었다.
“와일더가 일개 조수에게 수도로 이주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월급을 주지 않을 테고, 겨우 보석상의 조수에 불과한 블로에 부인에게 눈독을 들이는 자들도 없을 테니까요.”
“치체스터 경!”
시종장은 클로드의 불호령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와일더는 각하의 사람이니, 자신의 조수를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게 해 줄 겁니다.”
“그래서 블로에 부인을 이용하란 건가? 제대로 대우해 주지도 않으면서? 사람은 도구가 아니야.”
“어차피 각하의 제안을 한 번 거절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고 사람의 약점을 이용해도 되는 건 아니지. 이건 못 들은 것으로 하겠어, 치체스터 경.”
시종장은 더는 클로드를 만류하며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저는 단지, 각하께서 상처받지 않기를 원할 뿐입니다.”
“알아.”
클로드의 얼굴이 풀어졌다.
“경이 날 얼마나 위하는지 모를 수가 없지. 그러니…….”
그는 잠시 망설였다.
지키지도 못할 헛된 약속을 하는 건 질색이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왜인지, 이 문제에서만큼은 오랜 원칙을 깨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블로에 부인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권유해 보겠어. 또 거절당한다면, 그때는 정말로 포기하겠다.”
클로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바로 방을 나섰다. 공작가의 정식 초대장마저 거절당했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내 상황을 진솔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해야겠어.’
무려 토르스 전체를 다스리는 공작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자부심과, 약간의 동정심을 함께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물론 상당히 모양새가 빠지는 방법이었기에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해왔는데, 그간의 승률은 제법 좋은 편이었다.
비록 지금은 그 방법을 사용하여 힘겹게 영입에 성공한 인재 모두가 수도로 떠나 버렸지만.
‘치체스터 경이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가.’
표현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열심히 발굴한 인재들이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문제로 떠나 버릴 때마다 입는 심적 타격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을 갓난아기 시절부터 지켜본 치체스터 경에겐 당연히 걱정을 잔뜩 끼쳐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재 영입에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겨우 세 명 남은 나이 든 가신들은 해가 갈수록 부쩍 기력이 쇠약해졌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 세대의 가신이었지, 자신 세대의 가신은 아니었으니까.
클로드에게는 평생을 함께할 젊은 가신들이 필요했다.
따라서 클로드는 가공되지 않은 원석들을 토르스 곳곳에서 캐내어 소중하게 키우고 대우했다.
그리고 카리나 블로에는, 여태까지 그를 거쳐 간 그 어떤 인재보다도 탐나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 * *
카리나는 아침부터 열심히 가게를 쓸고 닦았다.
‘와일더 씨가 오기 전까지 최대한 깨끗하게 해 놓아야지.’
요즘 들어 와일더가 늦게 출근하는 날이 부쩍 잦아졌다.
카리나에겐 그냥 자리만 지키면 된다고 말했지만, 여태까지 받은 도움들을 생각하면 가만히 앉아 빈둥댈 수는 없었다.
그녀는 위험해 보이는 물건들엔 손을 대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열심히 묵은 먼지들을 벗겨냈다.
퍽 쉬운 일이었다.
렝케 경의 저택에서 하던 일들과 그리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유일한 변수는 마정석의 폭주에 휘말리는 것뿐.
하지만 와일더는 카리나에게 마정석의 폭주에 홀리지 않는 법도 며칠 전 가르쳐 주었다.
‘버텨.’
‘네……?’
‘눈 딱 감고 버텨. 그러면 홀리지 않고 버틸 수 있지.’
‘그렇게 간단해요?’
‘그래. 실제로 해 보면 너무 간단해서 놀랄 것 같군. 왜, 못 믿겠나?’
‘아뇨, 믿어요.’
얼핏 들어서는 단순한 놀림 같기도 했지만 카리나는 와일더의 말을 믿었다.
분명 와일더는 그녀가 모르는 사실을 많이 아는 전문가였다.
그가 충분히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비상 상황을 가지고 카리나를 놀릴 이유는 없었다.
한창 청소하던 도중, 손님의 출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가게 깊숙한 곳에 있는 선반에서 먼지를 털어내던 카리나는 서둘러 현관으로 뛰쳐나갔다.
“어서 오세요. 와일더 보석 상점입니다.”
“블로에 부인.”
“……!”
클로드 데비아탄 토르스 공작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가게 안으로 한 발짝 들어왔다.
카리나는 잠시 몸을 뻣뻣이 굳히며 긴장했지만, 이내 자세를 바로 고치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와일더 씨께선 오후에 출근하십니다. 자택으로 심부름꾼을 보낼까요?”
“그럴 필요 없다. 오늘은 와일더를 보러 온 게 아니니까.”
“……?”
카리나는 눈을 깜박였다가, 이내 그 함의를 알아차리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렇게나 놀랄 만한 일인가? 내가 와일더가 아니라 블로에 부인을 보러 왔다는 게.”
“저 같은 미천한 과부를 보러 오셨다니, 놀랄 수밖에요.”
카리나는 말을 조심스럽게 골랐다.
이제는 예전처럼 말을 되는대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이 남자는 롤랜드의 병을 고쳐준 은인이었지만, 롤랜드의 재능에 눈독을 들인 군주이기도 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블로에 부인.”
클로드는 무뚝뚝하게 말을 한마디 내뱉었다.
“토르스에서 지낸 지 한 달 정도 되었지. 그동안 고충이 많았을 것 같은데, 아무리 사소한 것들이라도 스스럼없이 말해 주었으면 좋겠군.”
“아…….”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드는 토르스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이주민의 고충을 듣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듯했다.
‘그러고 보니, 토르스 공작은 소설 속에서도 남부 사람들에게 제법 인망이 높았었지.’
혼자서는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던 소설의 내용들이, 이렇게 때때로 떠오르는 게 참 신기했다.
‘토르스 공작은 입에 발린 칭찬이 아니라, 실제 현실을 듣고 싶어 하는 거야.’
카리나는 토르스 공작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만약 상황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자신은 이 젊은 군주에게 퍽 호감을 느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롤랜드의 보호자였고, 롤랜드를 보호하기 위해선 이 남자와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딱히 힘든 건 없어요. 모두 저에게 친절하시고요.”
카리나는 클로드가 가장 바라지 않을, 뻔한 칭찬들을 늘어놓았다.
토르스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세상에 천국은 없는 법이다.
토르스에서 그녀를 등쳐먹으려 한 게 돌팔이 의사들이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었다.
굳이 들으려 하지 않아도 들려오는 수군거림은 또 어떻고.
하지만 카리나는 클로드에게 그 사실들을 모두 숨겼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었고,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카리나는 만에 하나 그가 좋게 생각하는 사람을 비방하는 바보짓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그런가? 정말 다행이군.”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클로드는 실망하기는커녕, 안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그 이유에 대해 찬찬히 생각하지 못했다.
바로 다음 순간, 클로드가 폭탄선언을 던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