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카리나는 고개를 저으며 황급히 눈가에 고인 물기를 닦아냈다.
“눈, 눈에 뭐가 들어갔네.”
둘보다 더 어린아이들이라도 믿지 않을듯한 거짓말이었지만, 아이들은 착하게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너희들, 배 안 고프니? 뭐라도 해 줄까?”
“고파요!”
아이들이 합창하듯 소리쳤다.
“알겠어. 오늘은 맛있는 걸 해 줄게.”
“어제도 맛있었어요.”
“어제보다 더 맛있는 거야.”
카리나는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그녀에 대한 걱정이 가시고 기대감만이 온전히 남아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어른들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아니, 해서는 안 된다.
과거로부터 얻은 교훈이었다.
카리나는 짧았던 유년기 내내 온통 그녀를 전혀 돌아보지 않는 어머니를 걱정해야 했으니까.
그녀는 아이들에게 자신과는 다른 어린 시절을 선사하고 싶었다.
‘돈이 좀 여유가 있다면 오늘은 외식하자고 했을 텐데.’
카리나는 오늘 저녁거리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객실에서 불을 사용하여 요리를 하는 건 금지였기에, 카리나가 할 수 있는 요리는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롤랜드와 멜리사에게 불을 지펴 달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카리나는 아이들이 불 마법을 가까이하면 혹시라도 위험한 불장난을 할까봐 불과 관련된 마법은 쓰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아이들은 처음엔 굉장히 의아해하면서 정말 하면 안 되냐고 되물었다.
고아원에서는 성냥을 가지고 놀아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을뿐더러, 렝케 경은 롤랜드가 위험한 마법 장난을 하며 노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아이에겐 그 어떤 어른보다도 카리나가 소중했기 때문에 그녀가 일러준 대로 불 관련 마법은 절대 쓰지 않았다.
빵마저 불 마법을 쓰지 않고 단순히 사물을 부풀리는 마법을 써서 만들려고 했으니 말 다 했다.
물론, 그 결과는 밀가루 폭탄을 맞은 방이 되었지만.
다행히 이 동네에 집에 오븐 하나 들이지 못할 정도로 넉넉지 못한 형편인 사람이 카리나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상인들로부터 여러 가지 요리법을 들을 수 있었다.
“오늘은 뭐예요?”
“거위 샐러드랑 햄과 치즈를 끼운 바게트.”
“맛있겠어요!”
아이들은 큰 소리로 감탄하더니, 양옆에 달라붙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다친다, 비켜.”
카리나는 엄하게 말했지만 아이들은 그게 말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신, 얌전히 있어야 해. 알겠지?”
“네!”
아이들은 약속을 지켰다.
카리나는 바게트와 햄을 잘라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아이들은 옆에 얌전히 대기하고 있다가도 카리나가 샌드위치를 만드는 족족 집어먹었다.
결국, 자신이 먹을 샌드위치는 바게트의 꽁지 부분밖에 없었지만 카리나는 개의치 않았다.
아이들이 별것 없는 음식을 잘 먹어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 혼낼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진 야채 샐러드를 만들기 위해 잘 익은 사과를 집어 들었다.
바로 그때.
쾅!
굉음이 울렸다.
“……!”
카리나는 너무 놀라 비명 한 마디 내뱉지 못한 채 롤랜드와 멜리사를 끌어안았다. 눈을 꽉 감은 채.
“엄마, 엄마.”
잠시 후, 롤랜드가 카리나에게서 벗어나려고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불렀다.
“그냥, 나무예요. 나무.”
“……?”
카리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심각한 분위기를 예상했는데, 오히려 쿡쿡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와 마음은 한결 놓였다.
“……정말이네.”
카리나의 허리께까지 올 듯한 사과나무 묘목 몇 그루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상황이 제법 웃기긴 하지만 이것들을 치워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나 때문이겠지.’
카리나는 당황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롤랜드를 향해 물었다.
“이런 경우가 흔하니?”
분명 그녀가 초보라서 제대로 마법을 제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그간 렝케 경이 데려온 아이들에게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저도, 멜리사도 이런 적은 없었어요. 심지어 비슷한 경우가 있다는 얘기도 못 들었고요. 조금 전 마법을 쓰려고 생각한 거예요?”
“아니.”
오직 음식을 만드는 데만 온전히 집중했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든 적은 없었다.
“아까 마법의 여파가 남은 게 아닐까요?”
롤랜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멜리사가 신기한 얼굴로 사과나무 묘목들의 개수를 헤아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멜리사 역시 아무것도 짚이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카리나는 아주 다행스럽게도 쟁반에 얹힌 채 바닥에 안착한 바게트 꼭지를 집어 들었다.
이것들을 치우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아무래도 샐러드는 못 먹겠네. 같이 좀 치워줄래?”
“근데, 엄마가 닿으면 또 이런 일이 있을 것 같은데……. 저희가 치울게요. 엄마는 그냥 쉬세요.”
“맞아요. 빵도 저희가 다 먹어 버려서…….”
일이 이렇게 되어 카리나가 굶게 된 게 아이들은 영 미안한 모양이었다. 카리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묘목을 옮길 아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일이 여기서 더 커지지 않게 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알겠어. 내일쯤엔 이런 일이 안 생기겠지?”
“모, 모르겠어요.”
롤랜드는 불안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카리나는 이내 자신을 탓했다.
한창 배우던 중 자신과 함께 도망친 롤랜드가, 어떻게 이런 이변에 대처하는 법을 알겠는가?
“어쩔 수 없네. 당분간 야채는 금지야.”
“전 좋아요!”
롤랜드가 기쁜 듯 환호성을 질렀다. 카리나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가도 야채를 먹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에 환호하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웠다.
하지만 롤랜드는 멜리사가 쿡 찌르자마자 바로 말을 바꿨다.
“그, 그러니까……. 전 괜찮아요. 야채가 없어도.”
“저도요.”
멜리사가 대답하며 묘목 하나를 집어 들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카리나는 행여 자신이 또 사고를 칠까 봐 두 손을 등 뒤로 교차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게 무슨 꼴이지…….”
카리나의 혼잣말을 들은 롤랜드가 고개를 있는 힘껏 저었다.
“엄마, 저희는 괜찮아요. 많이 먹어서 힘이 잔뜩 나는걸요.”
“……내일은 꼭, 와일더 씨께 물어서 고쳐올게. 그분은 뭘 잘 알겠지.”
카리나는 내일 일과를 마치고 와일더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처럼 와일더보다 일찍 출근한 카리나는 작은 소포를 발견했다.
발신은 토르스 공작저, 수신은 와일더 보석 상점으로 되어 있는 소포는 마정석이 들어 있다기엔 너무나 큰 크기였다.
‘뭘까?’
작은 호기심이 솟았지만 카리나는 와일더가 올 때까지 포장을 풀지 않았다.
“그게 뭐지?”
“공작저에서 온 소포예요.”
“풀어봐.”
카리나는 빠르게 포장을 풀었다.
반짝이는 광택의 포장지는 카리나가 입고 있는 옷 보다도 비싼 재질로 느껴졌다.
‘필요 없으면 달라고 할까. 아이들 장갑이라도 만들어 주기에 좋을 것 같…….’
태평하게 아이들 생각이나 하고 있던 카리나의 손이 뻣뻣하게 굳었다.
동시에 와일더가 이게 무슨 일이냐고 곁에서 큰소리로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빨강, 노랑, 분홍, 하양, 하늘…….
시야가 각종 색깔로 한데 뒤덮여 도저히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전신을 짓눌러오는 짙은 꽃향기가, 일어난 일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손! 손을 올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카리나는 두 손을 허공에 들어 올렸다.
그제야 그녀의 품에서 솟아나던 꽃들의 향연이 멈추었다.
와일더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졸지에 꽃 공장으로 변해버린 가게를 둘러보았다.
“이 무슨……. 부인, 어디 괴팍한 마법사에게서 저주라도 받았나?”
“아뇨. 그게…….”
카리나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어제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물론, 사과도 잊지 않았다.
“보석이나 마정석만 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꽃다발을 보내오실 줄은…….”
와일더가 잘게 혀를 찼다.
“쓸데없는 짓이 화를 불렀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괜히 마법을 배운다고 해서…….”
“아니, 부인 말고.”
“……?”
카리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와일더를 빤히 쳐다보았다.
와일더는 그런 그녀를 무시하고는 쓰레받기를 꺼내 꽃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는 함께 치우려는 카리나를 제지했다.
“부인은 얌전히 앉아 있게. 괜히 치울 거리만 더 늘리게 될 수도 있으니.”
“……네.”
일이 모두 끝난 이후, 와일더는 피로가 역력한 얼굴로 의자에 반쯤 몸을 누이듯 주저앉았다.
카리나는 바싹 긴장하며 그의 눈치만 살폈다.
자신이 아무리 와일더와 공작에게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고 해도, 이렇게 큰 사고를 쳤으니 그만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침묵이 흘렀다.
와일더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카리나는 바싹 타들어 가는 속을 주체할 수가 없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가 있는데, 무엇부터 듣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