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입양합니다 (19)화 (19/145)

<19화>

“롤랜드!”

카리나는 엄하게 소리쳤지만 가빠지는 심장은 어떻게 제어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롤랜드를 도운 것도 나 때문일지도 몰라.’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이의 눈은 순수하다. 롤랜드가 이런 상황에서 카리나에게 장난치거나, 거짓말을 할 아이도 아니었다.

바로 그 사실에 카리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만에 하나,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면?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도 아니야.”

“왜요?”

“공작 각하는, 무척, 무척 높은 분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잡혀갈 수 있어.”

“엄마가 절 신고할 거예요?”

“엄마, 롤랜드 신고할 거예요?”

아이들의 합창에 카리나는 결국 웃고 말았다.

“아니. 하지만 누가 들을 수도 있잖아.”

“누가 들으면 왜 잡혀가요?”

카리나는 잠시 말문이 막혀 롤랜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것이 바로 아이들에게 한 번쯤은 찾아온다는 ‘왜요’ 병인가 싶을 정도였다.

“공작 각하 같은 분은 공주님 같은 분들과 결혼해야 한단다. 다 정해져 있어.”

“하지만 엄마도 공주님처럼 예쁜걸요.”

끼어든 건 멜리사였다.

카리나는 웃으며 멜리사를 안아 들었다. 드디어 롤랜드의 질문 세례에서 해방될 수 있어서 기뻤다.

“고마워 죽겠네. 하지만 예쁜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야. 알겠니?”

멜리사가 카리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꺄르륵거리더니, 문득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엄마, 그러면 결혼 안 하는 거예요? 공작님이랑?”

카리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절대, 절대 그런 일은 없어.”

“다행이에요오…….”

“으응?”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엄마가 결혼하는 거, 싫어요.”

“안 할게, 안 할게.”

이제 보니, 멜리사는 카리나가 정말로 공작 부인이 되어서 둘을 버릴까 봐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말도 안 되는 걱정이지만 아이의 섬세한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카리나는 연거푸 부정해 멜리사를 안심시켜주었다.

카리나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얼굴로 숨을 고롱고롱 내쉬는 멜리사를 눕히다, 무심코 아이들의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다 둔 작은 손거울을 들여다보았다.

‘……!’

순간 카리나는 칠칠하지 못한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거울 속의 여자는, 옷은 말끔하게 차려입었지만 머리카락은 온통 산발에 먼지가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아…….”

카리나의 입에서 기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집을 닦고 아이들을 단장시키느라 정신이 없어 정작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카리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이들의 말에 잠시나마 설렌 자신이 부끄러워졌기 때문이었다.

클로드는 엉망진창인 카리나의 행색이 신기하여 계속해서 쳐다본 데다, 웃기까지 한 것이다.

‘그래, 나라도 웃었겠지.’

아이들을 깔끔하게 입혔고 본인의 옷 역시 열심히 차려입었다.

그런데 머리는 온통 산발이라니.

카리나는 어느덧 이불 속으로 얌전히 들어간 롤랜드와 멜리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얘들아, 내 머리가 이 지경이 되었으면 말을 좀 해줘야지.”

“엄마 머리가 뭐가 어떤데요?”

“산발에, 엉망진창이잖니.”

“전혀 그렇게 안 보여요.”

클로드는 그렇다 치고,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가져 카리나의 심정을 잘 이해할 멜리사마저 도리질을 쳤다.

“엄마 머리 엉망 아니에요. 엄청 예뻐요!”

“그러니?”

카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무려 공작 각하나 되시는 분은 자신을 길가의 돌멩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좀 볼썽사나워서 눈에 띈 돌멩이 정도쯤일까.

‘그럼, 롤랜드만 계속 보고 있었던 것도 아니니 그냥 내 착각인 걸까…… 아니야.’

공작이 롤랜드를 계속해서 보고 있었던 것도 분명 사실이었다.

‘그럼 나와 롤랜드를 주시했다는 건데……. 나는 그렇다 치고, 롤랜드는 왜?’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그래,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공작은 소설 속에서 롤랜드를 열 번이 넘게 영입하려 할 정도로 인 재를 좋아했다.

그러니 롤랜드의 재능을 바로 알아보았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

카리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상황이 많이 달랐다면 자신은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롤랜드가 마법을 제대로 배울 기회였으니까.

하지만 롤랜드는 이제 겨우 여덟 살. 더군다나 학대 탓에 마법에 대한 거부감까지 심한 상태였다.

그런 롤랜드에게, 공작의 관심은 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걸린단 말이지.’

토르스 공작은 전생에 읽은 소설 속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역할이 아니었다.

오히려, 롤랜드가 얼마나 대단한지 부각시켜주는 엑스트라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와 롤랜드의 상성이 잘 맞지 않았다는 것은 흐릿한 기억 속에서도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죄송하지만, 멀리하는 게 맞아.’

멜리사가 물끄러미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엄마, 무슨 생각 해요?”

“아무 생각 안 해.”

“거짓말. 아직도 머리카락 생각만 하고 있잖아요. 하나도 안 엉망인데.”

“……아닌데? 너희들이 이뻐 죽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멜리사가 꺄르륵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제가 여태까지 본 사람 중 제일 예쁘고, 동화책 공주님보다 더 예뻐요.”

“멜리사, 학교에서 아부하는 법도 가르쳐 주던?”

“아부가 뭐예요?”

“사실은 안 그러면서, 칭찬하는 거.”

“아닌데에…….”

멜리사는 입을 삐죽거렸다.

카리나는 웃으며 아이들이 잠옷으로 갈아입는 걸 도와주었다.

잔뜩 긴장에 질려 있던 아이들은 이불을 토닥거려주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카리나도 침대에 누웠다. 아이들이 깊은 잠들었는지 쌕쌕거리며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두 눈을 말똥말똥 뜬 채 천장만을 바라보아야 했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데비아탄 씨가 누군지 언질을 해 주셨어야 했다고 생각해요.”

카리나는 진열장의 먼지를 닦아내며 투덜거렸다.

“적어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을 거고, 그러면…….”

“거짓말.”

와일더가 퉁명스러운 어조로 내뱉었다.

“애초 만나려 들지도 않았겠지.”

“…….”

“블로에 부인, 생각해봐. 상대가 그 애송이라고 해서 고마운 마음이 달라지는 건 아니잖나?”

“……그건, 그렇죠.”

카리나는 인정했다. 그의 꿍꿍이가 무엇이건 클로드가 보내준 명의가 아니었다면 롤랜드는 크게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롤랜드의 재능을 탐내어 도와주었다고 한들 클로드가 롤랜드의 은인이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었고.

“나는 이미 부인에게 기회를 줬네. 그걸 차 버린 건 바로 부인이고. 그러니 내게 따지진 말게.”

“……와일더 씨를 탓하려는 건 아니에요.”

“방금 했는데?”

카리나는 결국 걸레질을 잠시 멈춘 채 팔뚝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 실수야.’

와일더의 입장에선 그저 공작이 불쌍한 평민에게 내리는 적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성심성의껏 카리나를 도와준 와일더를 본의 아니게 탓했다는 사실을 깨닫자 죄책감이 몰려왔다.

“죄송해요. 그냥……. 요새 너무 힘들어서.”

“죄송할 것까지야.”

와일더는 심술궂은 얼굴로 서랍 몇 개를 열었다.

“자, 십 년은 넘었을 먼지들이랑 그만 씨름하고 이리 와 보게. 이제 진짜배기 일을 가르쳐 줄 테니까.”

카리나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동안 자신은 제법 많은 것들을 배웠다.

특히 마정석과 관련해선 렝케 경보다도 더 많이 알 듯했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은 같은 나이대 사람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싶어 한단 말이야. 내가 아무리 골라 줘도 노인네 안목이라고 무시하니…….”

와일더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얼마 전 도저히 와일더의 안목을 못 믿겠다며 난동을 부린 젊은 커플이라도 떠오른 모양이었다.

“블로에 부인이 안목을 키우는 게 좋겠어.”

카리나는 크게 당황했다.

여태까지 와일더는 자신에게 다양한 보석의 종류와, 가짜 보석을 가려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느닷없이 장신구에 대한 안목이라니.

렝케 경은 사치할 여유가 없는 남작이었고 마법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카리나 역시 미적 감각이라곤 전혀 없었다.

“블로에 부인은 감이 좋으니까……. 일단 이렇게 한번 해 보지. 둘 중 뭐가 나은가?”

와일더는 둘 다 똑같이 요란해 보이는 브로치 두 개를 들어 올렸다.

하나는 배추를 갉아 먹고 있는 애벌레 모양 금장식이 자수정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다.

다른 하나는 번데기에서 막 빠져나오는 나비 모양 금장식이 자수정을 장식하고 있었다.

“비슷해 보여요.”

“비슷하다고?”

와일더는 허탈해 보였다.

“이게 훨씬 낫지!”

그는 번데기에서 빠져나오는 나비 모양 금장식을 가리켰다.

“아니, 누가 애벌레를 좋아한단 말인가? 블로에 부인, 내가 모르는 취향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쪽도 징그럽긴 마찬가진데요.”

카리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말이 나비지, 번데기에서 막 빠져나와 날개가 축 늘어진 형상이라 징그럽기로는 애벌레 못지않았다.

“블로에 부인, 이쪽엔 의미가 담겨 있어. 반면 이쪽은……. 의미랄 게 없지 않나.”

와일더는 배추 애벌레 브로치를 톡톡 건드렸다.

“나비 브로치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데요?”

“성장. 변태. 탈피. 변화. 진화…….”

와일더는 다양한 의미를 늘어놓더니 잠시 말을 멈추었다.

“블로에 부인에게는 이런 표현이 더 익숙하려나? 마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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