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다음 날, 와일더는 데비아탄 씨의 대답을 전해 주었다.
“자기 집이 너무 머니까, 블로에 부인의 집에 자신이 직접 찾아가도 괜찮겠는지 묻던데. 괜찮다면 내일 저녁에.”
카리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제가 가게에 있을 때 안 오시고요?”
“낮에는 바쁘대. 저녁에는 부인이 애들을 봐야 할 테니, 직접 찾아가겠다더군.”
“많이 바쁘신 분인가 보네요.”
“바쁘긴 많이 바쁘지. 그래서, 괜찮은가? 싫으면 말하게. 내가 정중하게 돌려서 말할 테니까.”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데비아탄 씨 덕에 롤랜드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런 은인을 저렴한 여관에 묵는 게 창피하다는 이유로 감사 인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도움을 받은 당사자인 롤랜드도 자신과 함께 인사하는 게 도리에 맞는 것 같았다.
“내일 저녁엔 언제든지 괜찮다고 전해 주세요.”
다음 날 저녁.
카리나는 데비아탄 씨의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방안을 반짝반짝 윤이 날 때까지 닦았다.
물론 아이들에게도 깔끔하게 옷을 입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카리나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가 그 누구를 상상했든 눈앞의 이 남자는 절대 아니었다.
반쯤 벌려진 그녀의 입에서 힘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공작 각하……?”
카리나와 롤랜드, 그리고 멜리사가 정착한 이 토르스라는 지역 전체를 다스리는 공작은 자신을 뽐내지도, 거들먹거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겸연쩍은 얼굴로 인사를 했을 뿐이었다.
“실례가 될 것 같았지만……. 꼭 한번 와 보고 싶었다.”
“들, 들어오세요.”
카리나는 마치 롤랜드와 멜리사가 조형하고 움직였던 호문쿨루스처럼 영혼 없이 행동했다.
기계적으로 공작에게 차를 권하고, 찬물에 유행하는 녹차 가루를 타서 건넸다.
분명 롤랜드의 은인, 데비아탄 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충분히 전달하고 싶었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롤랜드와 멜리사는 무언가를 얘기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무거운 공기에 짓눌려 카리나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데비아탄 씨라고 들었어요.”
공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 이름이 클로드 데비아탄 토르스다. 토르스는 작위에 가까우니…… 주로 클로드 데비아탄으로 불리지. 사실 블로에 부인이 내 이름은 잘 모를 듯하여, 속이려고 그 성을 쓴 것도 맞다.”
카리나는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전혀 신경 쓰지 마세요.”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롤랜드의 생명을 살려 준 은인에게 왜 나를 속였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심지어 이번이 두 번째였지 않은가. 자신이 이 남자에게 빚진 것은.
처음에는 그녀 자신의 목숨. 두 번째는 롤랜드의 목숨. 어떠한 말로도 감사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빚이었다.
카리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도움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제 아들이 살았어요.”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아니다. 솔베타인 선생에게서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두 들었어. 블로에 부인을 속인 의사들은 처벌받을 거야.”
“그렇군요.”
카리나는 그것 하나만큼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그 의사들은 자신처럼 순진하고 돈 없는 사람들을 속여 먹지 못할 것이다.
자신보다 겨우 몇 살 많아 보이는 공작, 클로드는 보기보다 제대로 토르스를 다스리고 있는 듯했다.
정착할 곳을 정말 제대로 고른 듯싶어 안심이 되었다.
‘보기 드물게 좋은 귀족일지도.’
카리나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클로드의 시선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더니, 아까부터 감사의 인사를 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롤랜드에게 꽂혔다.
“아이가 참 귀엽군.”
그 말엔, 어딘지 카리나를 불안케 하는 요소가 있었다.
롤랜드는 원래 정말 귀여운 소년이었다.
하지만 최근 며칠 동안 열에 들떠 있었기 때문에 카리나의 입으로도 도저히 귀엽다고는 말을 해 줄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본디 초롱초롱했던 파란색 눈은 특유의 반짝임을 잃었고, 갈색 고수머리는 카리나가 아무리 빗질을 해 보아도 엉망진창으로 엉켜 있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귀엽다기보다는, 안쓰러운 모양새다.
즉, 클로드는 롤랜드를 대놓고 관찰하는 그에 이상한 이유를 붙이며 합리화하고 있었다.
카리나는 자신에게도 제법 공격적으로 들릴 정도로 쏘아붙였다.
“실례하오나 각하, 제 아들은 겉만 저렇지 속은 꼬마 악마입니다!”
“그, 그런가?”
클로드는 멋쩍은 듯 중얼거렸지만 롤랜드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다.
카리나의 마음속에 의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아무리 자신과 롤랜드의 은인이라 한들, 클로드는 토르스의 군주이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허투루 보아서는 안 되었다.
‘왜 롤랜드를 저렇게 보는 거지……?’
롤랜드가 렝케 경의 후계자로 키워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토르스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공작이 렝케 경 같은 하급 귀족을 알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카리나처럼 전생의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닐 테니 롤랜드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마법사가 된다는 사실 역시 모르리라.
‘그럼 왜……?’
카리나의 의심스러워하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클로드의 시선이 공중에서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크, 크음. 난 이만 가 보는 게 좋겠군.”
“공작 각하, 정말 감사드립니다.”
롤랜드가 이러다 인사를 전혀 못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벌떡 일어나서 인사했다.
클로드가 그럴 것까지야 없다는 듯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라. 앞으로 또 아프면 꼭 그 솔베타인 선생에게 연락하고.”
“네!”
롤랜드는 힘차게 대답했지만 카리나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눈에 띄게 경계하는 기색을 숨기려 애쓰며 클로드를 여관의 출입구까지 배웅했다.
‘……?’
카리나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클로드는 그동안 와일더 보석 상점에도 혼자 들어오곤 했다.
하지만 그 거리는 제법 번화가에 속했고, 치안대가 매시간 순찰하는 토르스 제일의 거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자신처럼 돈이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저렴한 여관 거리. 당연히 치안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공작이나 되는 사람이 이런 거리에 올 땐, 호위한 몇과 번듯한 마차 정도는 대동하고 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관 입구에는 잘생긴 준마 한 마리뿐이었다.
혼자 왔냐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카리나는 그 어떤 의문도 삼킨 채 클로드를 배웅했다.
‘이상해.’
클로드 데비아탄 토르스 공작은 카리나를 만난다는 사실을 측근들에게까지 숨기고 온 게 분명했다.
의문은 계속해서 카리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카리나는 아이들을 재울 때까지도 계속해서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너무 이상하단 말이야…….”
“뭐가요?”
롤랜드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잖아요. 아까 공작님을 만날 때부터……. 계속 뭔가 이상했어요.”
카리나는 롤랜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 어린아이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는 게 맞을까?’
어떻게 보면 롤랜드는 사건의 당사자였다.
게다가 아이들은 직감이 뛰어나다고 하니, 무언가 느꼈을지도 모른다.
카리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롤랜드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롤랜드, 아까 공작 각하를 뵈었을 때 뭔가 이상한 것 못 느꼈니? 너무……. 우리한테 잘해주신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네게도 굉장히 관심이 많아 보이셨고…….”
롤랜드는 그게 고민이었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작님이 우리한테 잘해 주는 게, 나쁜 거예요?”
“아니, 나쁜 건 당연히 아니지.”
카리나는 황급히 자신의 말을 수습했다.
클로드가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자산에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함이니 당연했다고 치자.
하지만 롤랜드에게 친절을 베푼 게 결코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평생의 은인으로 여긴다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았다.
하지만 카리나는 도저히 찜찜한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럼 왜요?”
“바로 그게 문제야. 왜 이렇게까지 해 주실까……. 보통, 저렇게 높은 분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잖니?”
“엄마 때문이 아닐까요?”
카리나는 아이의 천진난만함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보아도 공작은 롤랜드에게 꽂혀 있었는데, 겨우 보석 가게 점원에 불과한 자신 때문이라니!
“나 때문일 리가 없잖아, 롤랜드.”
“하지만 공작님은 엄마가 딴 데 정신이 팔릴 때마다 계속 엄마만 쳐다보았는걸요.”
“롤랜드, 어른을 놀리면 못 써요.”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카리나와 반대로, 롤랜드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놀리는 게 아니에요! 공작님은 정말로 엄마만 보고 있었는걸요.”
“정말?”
“네.”
카리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왤까?’
분명 자신이 중간중간 한눈을 팔기는 했다.
클로드를 계속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 자체가 무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클로드가 자신을 유심히 관찰할 이유는 못 된다.
“엄마가 좋아서 계속 보는 것 같았어요. 진짜로, 엄마가 고개만 살짝 돌려도 공작님이 엄마를 보면서 웃었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