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입양합니다 (17)화 (17/145)

<17화>

“그래. 엄마를 못 믿는 건 아니지?”

“믿, 믿어요.”

멜리사를 겨우 진정시킨 카리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자, 멜리사는 이제 그만 학교 갈 준비해야지?”

“싫어요. 롤랜드 옆에 있을래요.”

“안 돼.”

“왜요?”

카리나는 온통 눈물이 말라붙어 있는 멜리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롤랜드가 빨리 나아야 하잖아? 멜리사가 옆에 계속 있으면 방해만 될 거야.”

이번만큼은 거짓말이었다.

분명 아이들은 서로에게 큰 의지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카리나에게도.

하지만 카리나는 자신이 데려오는 의사마다 멜리사의 앞에서 롤랜드가 살아날 가망이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현실이 너무나 두려웠다.

“……방해 안 될게요. 그래도 있으면 안 돼요? 제발…….”

결국 카리나는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의사는 꼭, 멜리사가 듣지 못하게 복도에서 결과를 말해 달라고 해야겠다고 맹세하면서.

* * *

세 번째 의사 역시 앞선 의사들과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불과 어제 받은 두툼한 월급봉투는 순식간에 바닥을 보였다.

이번 달 월세를 생각한다면, 사실상 다 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와일더는 월급을 반년 치라도 가불해 줄 수 있다고 했지만, 그 많은 의사가 모두 같은 말을 한다면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차라리 편하게 보내 주는 게 나을지도 몰라. 좋아하는 음식이나 먹이면서…….’

하지만 카리나의 뇌리엔 아직 조금 전에 본 글자가 선명했다.

‘사실 롤랜드랑, 렝케 경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그러고 보니 왜 그걸 깨닫지 못했을까.

그동안 렝케 경이 데려온 아이들은 모두 먼 친인척 중 한 명이었다.

카리나는 그걸 단순하게 렝케 경이 마법사의 혈통에서 후계자를 찾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 아이들의 생김새는 모두 각양각색이었는데도.

렝케 경은 아이들을 더욱더 고분고분하게 만들기 위해 그들이 자신의 친족이라고 속여 온 것이다.

‘내가 만약 롤랜드와 멜리사를 데리고 도망치지 않았다면, 롤랜드는 그걸 나중에 렝케 경을 죽일 때가 되어서야 알았겠지.’

그리고 소설 속 롤랜드는 렝케 경이 일러준 진실에 절망했다.

폭주해서 렝케 경을 포함하여 그 지역의 모든 생명체를 날려 버릴 정도로.

그 결과 롤랜드에게 붙은 수천 명의 학살자라는 오명은 그가 죽을 때까지 따라다녔다.

“롤랜드.”

카리나는 힘을 주어 말했다. 이제 완전히 의식을 잃은 롤랜드는 그녀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하는 듯했다.

“넌 행복하게 살 거야. 절대 지금 죽거나, 불행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어.”

그때였다.

의사를 부르러 달려나가기 쉽게 항상 살짝 열린 문이 펑 하고 걷어차인 것은.

카리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의사들이 들락날락 오가는 모습을 수상쩍게 여긴 여관 주인인 듯했다.

여관 주인들은 당연히 환자가 여관에 있는 걸 탐탁지 않아 했기 때문에, 카리나는 언제라도 쫓겨날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루만…… 하루만 더 있게 해 주세요. 내일부터는 방을 뺄게요.”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카리나는 낯선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황급히 돌아보았다.

“……!”

카리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무릎까지 싹둑 자른 치마를 입고 긴 머리를 뒤로 땋은 의사가, 방안을 한차례 둘러보고 있었다.

카리나와 멜리사의 눈은 모두 휘둥그레졌는데, 반은 그들이 부르지도 않은 의사였기 때문이고 또 반은 여자 의사를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의, 의사를 부르지 않았는데요.”

“데비아탄 씨가 보내셨습니다.”

“데비아탄 씨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어리둥절 해하는 카리나를 바라보는 의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는 데비아탄 씨가 보낸 베리티 솔베타인입니다. 진료할까요, 말까요?”

“해 주세요!”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발로 찾아온 의사를 거부할 정도로 카리나의 정신이 없지는 않았다.

누군가 고약한 장난질을 쳤다 해도, 지금 상황에서 뭐가 더 달라지겠는가?

새로운 의사는 여태까지 그 어느 의사들보다 롤랜드를 자세히 살폈다. 한참을 지난 후에야 의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사 몇 명이 다녀갔습니까?”

“……세 명이었어요.”

“어떤 진단을 내렸죠? 모두 알려 주세요.”

카리나는 여태까지 의사들이 말한 내용을 주워섬겼다.

“어떤 분은 페테라라고, 어떤 분은 아우코라고, 어떤 분은…… 이름도 모르는 불치병이라고…….”

“그 인간들, 의사 맞습니까?”

의사의 입에서 기가 막힌다는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건 식중독입니다.”

카리나는 귀를 의심했다. 식중독이라니?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식중독이 맞단 말인가?

“예. 상한 음식 때문에 생기는 병이죠. 좀 심한 경우긴 합니다. 엉뚱한 처방들 때문에 가만히 내버려 둬도 나았을 병이 더 도지긴 했군요.”

“…….”

입에서 쓴맛이 났다.

카리나는 여태까지 욕을 퍼부어 주어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듯한 돌팔이 의사들의 말만 믿고 롤랜드를 고생시킨 것이다.

“……다들 식중독이라는 걸 몰랐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사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식중독 같은 건 금방 나을 거라고 생각해, 의사가 가벼운 병이라는 진단을 내리면 아무것도 주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 그런 경우라고 생각해서 다들 거짓말을 한 것 같군요.”

카리나는 마룻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다들 그렇게…….”

“어차피 가만히 냅둬도 고생만 좀 하고 살기는 살 테니까요. 그리고 기도만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으면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할 걸 노린 겁니다. 흔한 수법입니다.”

“……제가 계속 이상한 의사들만 불렀다면.”

“그땐 정말로 잘못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또다시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카리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롤랜드는 살 거야. 멜리사는 여전히 겁을 먹고 있어. 내가 버텨야 해.’

의사는 넋이 반쯤 나간 카리나에게 명함을 하나 건네주었다.

카리나가 평생 갈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한 토르스에서 제일가는 부자 동네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약을 드릴 테니, 이 약과 펄펄 끓인 밀죽 말고는 아무것도 먹이지 마세요. 계속 토하기만 할 테니까. 그리고 또 무언가 잘못되면 이쪽으로 바로 사람을 부르세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전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의사는 가볍게 묵례한 후 등을 돌려 방을 나갔다.

카리나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의사를 힘겹게 쫓아갔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몇 걸음 뛰어가다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의사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 데비아탄 씨께도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어디 사시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감사드린다고…….”

“이미 아는 분이실 겁니다.”

의사가 빙긋 미소 지었다.

“정, 정말요?”

“그럼요. 하지만 그분의 주소나 생김새를 노출하는 건…… 고객의 정보를 유출하는 격이 되니,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상관없어요. 그냥, 감사하다고만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의사는 순식간에 여관을 빠져나갔다.

카리나는 재빨리 객실로 돌아가 아직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롤랜드에게 약을 먹이고, 들뜬 멜리사에게 정확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미안해. 내가 멍청해서……. 많이 걱정했지?”

멜리사는 대답 대신 카리나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 * *

와일더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멀끔하게 꾸미고 나타난 카리나를 보자마자 모든 상황을 알아차린 듯했다.

“애는 다 나은 모양이군.”

“와일더 씨, 정말 감사드려요.”

“감사할 게 뭐가 있나. 자식이 그런 지경이 처하면 누구라도 눈이 돌아가기 마련이지.”

와일더는 안심하라는 듯 카리나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너무 죄지은 것처럼 생각하지 말게. 며칠 일 빠진 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게 아니라……. 의사 선생님을 불러다 주신 거, 너무 감사드려요. 베리티 솔베타인 선생님이요.”

“……?”

와일더는 조금 당황한 듯 손을 떨었다.

“그 사람이 왜 나오지?”

“와일더 씨께서 불러다 주신 게 아니었어요?”

“그 사람은……!”

와일더는 무어라 말하다가 뭔가 생각난 사람처럼 말을 멈추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제 아들이……. 크게 잘못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데비아탄 씨라는 분께서 그분을 대신 불러다 주셨다는데, 정말 와일더 씨가 아닌가요?”

“데비아탄?”

와일더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데비아탄 씨요.”

“이거 참……. 뭐라고 얘기해야 할지.”

“그냥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도 돼요.”

카리나는 데비아탄이, 분명 와일더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이 정기적으로 교류하는 사람이란 기껏해야 여관 주인과 와일더가 끝이었으니까.

“블로에 부인,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겠는데……. 나는 아니야.”

“정말 아니신가요?”

“그래. 하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는 알아.”

“……!”

카리나의 눈이 커졌다.

“누구죠? 와일더 씨가 저를 도와달라고 부탁하신 건가요?”

“……비슷하긴 하지. 우리 가게의 손님인데, 블로에 부인이 왜 보이지 않는지 궁금해하더군. 그래서 내가 이유를 말해줬어.”

카리나는 그제야 이 모든 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데비아탄 씨는 가게 손님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이름을 밝히면서 물건을 사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 이름만 듣고선 누군지 모를 수밖에 없었다.

“어디 사는지 아시나요? 직접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와일더가 굉장히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그 인간이 안다면 분명 기뻐하긴 하겠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