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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입양합니다 (16)화 (16/145)

<16화>

“…….”

롤랜드는 대답 대신 힘없이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스르르 정신을 놓고 말았다.

카리나는 버드나무 껍질 가루가 든 봉투를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돌팔이 의사 말 하나만 믿고 롤랜드를 방치할 순 없었다.

일단 오늘은 새로운 의사를 불러오기엔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이 가루라도 끓여서 먹여 볼 생각이었다.

잠시 후.

껍질 가루를 달여 돌아온 카리나는 침대에 똑바로 앉아 롤랜드를 바라만 보고 있는 멜리사를 발견했다.

카리나는 멜리사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부드럽게 이름을 불렀다.

“멜리사.”

“엄마…….”

멜리사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눈물이 왈칵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지금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롤랜드에게도 멜리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롤랜드 안 죽을 거예요. 그렇죠?”

“그래. 안 죽어.”

“다른 의사 선생님을 불러와요. 저 의사 선생님 싫어…….”

“나도 싫어.”

카리나는 그제야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의사가 별별 이상한 소리를 떠들도록 내버려 둔 자신의 안이함을 후회했다.

자신도 큰 충격을 받았는데, 아이들은 오죽할까.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카리나는 반쯤 졸고 있는 롤랜드를 조심스럽게 깨웠다.

“약이야. 먹기 힘들면 한 모금만 마셔.”

롤랜드는 두 손으로 컵을 부여잡고는 꿀꺽꿀꺽 마셨다. 적당한 온도로 식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이 말랐니? 물을 줄까?”

롤랜드는 고개를 젓다가 이불 위로 방금 마신 약을 그대로 토해냈다.

카리나는 서둘러 엉망이 된 롤랜드의 옷과 이불, 입을 닦아 주었다.

“……죄송해요.”

“아파서 그런 거야. 미안해하지 마.”

카리나는 속으로 역시 그 의사는 돌팔이였다고 중얼거렸다.

‘당장 해가 뜨자마자 새 의사를 불러오겠어.’

카리나가 궁여지책으로 수건이라도 찬물에 적셔오기 위해 자리를 뜨려고 하자, 롤랜드가 카리나의 팔을 잡았다.

“엄마, 나…….”

카리나는 숨마저 죽인 채 롤랜드의 말을 기다렸다. 그 어떤 부탁이든 들어 줄 자신이 있었다.

“고아원으로 보내요.”

목에 무언가 묵직하고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카리나는 이내 그것이 울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앞에서 감히 그런 감정을 내보일 수가 없었다.

대신, 카리나는 롤랜드의 손을 꽉 잡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다행히 목소리는 비틀려 있지도 울음에 잠겨 있지도 않은, 평상시 카리나의 목소리 그대로였다.

아주, 아주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열에 들뜬 롤랜드나 아직도 울고 있는 멜리사는 알아채지 못했으리라고 카리나는 생각했다.

“내가 네 엄만데, 왜 고아원에 간다는 건데?”

“……진짜 엄마는 아니잖아요.”

롤랜드가 신음과 울음이 뒤섞인 대답을 내뱉었다.

“카, 카리나가…… 우리에게 이렇게 잘해 줄 이유가 없어요.”

“너희가 없었다면 나는 그 집에서 도망칠 수 없었을 거야.”

“거짓말.”

“진짜야. 어른 말을 믿어요, 롤랜드 도련님.”

카리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만약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그 끔찍한 저택에서 도망치지 못했을 것이다.

나갈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 집에서 카리나는 렝케 경의 사생아인 덕에 특별한 하녀 취급을 받았다.

일은 고되긴 했으나 렝케 경에게 반항만 하지 않으면 따스한 잠자리와 맛있는 음식이 주어졌다.

어차피 그 저택을 빠져나간다고 하더라도 카리나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녀일 뿐.

롤랜드와 멜리사가 저택에 오기 전에도 카리나는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삶을 꿈꾸었지만, 실제 계획이라기보단 힘든 현실을 잊기 위한 망상에 불과했다.

“너희들을 알게 되었고……. 너희들을 위해 그 집에서 도망쳤어.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그러니 내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줘, 롤랜드.”

카리나는 가슴에 있는 말들을 한 번 머리로 거르지도 않고 그대로 내놓았다.

조금이라도 틈을 준다면, 롤랜드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고아원으로 달려갈까 봐 무서웠다.

카리나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롤랜드는 계속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고아원에서도 밥도 줬고, 약도 줬어요. 카리나가 우릴 돌볼 필요가 없어요.”

“롤랜드. 아플 때 말 계속하면 더 아파. 그만 말해.”

“싫…… 어요. 카리나가 저를 고아원에 보내겠다고 말할 때까지 계속 말할 거예요.”

롤랜드는 말하는 내내 숨을 헐떡였다. 카리나는 롤랜드가 행여 사레에 걸렸을까 봐 등을 두드려주었다.

“계속 말해, 계속 말해. 뭘 말하든 나는 널 고아원에 보내지 않을 테니까.”

“왜요……? 절 고아원에 보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잖아요…….”

롤랜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고개를 베개에 떨구었다.

더는 말할 힘이 없는 듯했다.

카리나는 이를 악물었다.

사실, 고아원에서 롤랜드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짐 싸서 보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카리나는 고아원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고아원 원장들은 정말로 갈 곳 없는 불쌍한 아이들을 위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고아원은 보호자가 없는, 혹은 보호자가 버린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롤랜드와 멜리사가 렝케 경의 저택으로 오기 전에 있던 고아원도 그런 고아원 중 하나였다.

당연히 일을 죽어라 하다가 병에 걸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 아이들이 의사의 진료를 받을 수 있을까?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다 나을 때까지, 혹은 죽을 때까지 침대에 방치되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리라.

그리고 롤랜드가 그 사실을 제일 잘 알고 있으리라는 게, 카리나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롤랜드는 오랫동안 고집을 피우지 못했다.

카리나는 지쳐서 쓰러진 롤랜드의 이마를 닦아 주며 생각했다.

‘아침이 되면, 제대로 된 의사를 불러오자. 그리고 롤랜드를 완전히 치료하는 거야.’

* * *

“가망이 없습니다.”

카리나는 사형 선고를 받는 기분이었다. 와일더에게 물어서 데려온 의사 역시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페테라는 아니고, 아우코처럼 보이는데 이건 치사율이 더 높습니다. 다행히 전염되는 병은 아니니 편하게 보내 줄 수 있겠군요.”

“만약 전염되는 병이었다면…….”

“전염병 관리소로 가서 죽을 때까지 방치당했을 겁니다. 그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들 품에서 죽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행운입니까?”

카리나는 살찐 두꺼비처럼 생긴 의사의 얼굴에 대고 그게 무슨 행운이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간신히 자제심을 붙들었다.

“약은…….”

“아이고, 그냥 진료비만 받겠습니다. 여기엔 무슨 약을 써도 안 들어요. 그냥 신께 기도하십시오.”

의사는 돈 욕심이 없는 듯한 사람치고는 카리나가 잔돈을 끌어모아 준 진료비 액수가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이나 확인하고 있었다.

카리나는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또 그놈의 신.

대체 신이 실제로 있다면, 주인공이 이렇게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데 어디서 뭘 하고 있다는 말인가?

카리나는 으득,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나치게 세게 깨문 탓인지 피가 주륵 흘렀다.

“엄마!”

멜리사가 겁에 질려 소리쳤다.

카리나는 손을 뻗어 멜리사를 토닥이려고 했다.

“그냥 입술이 찢어진 거야. 걱…….”

순간, 카리나의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멜리사도 롤랜드도, 방안의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카리나는 겁이 나 아이들의 이름을 소리쳤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자신 혼자 새하얀 공간에 갇힌 듯했다.

잠시 후, 새하얀 시야에 시뻘건 글씨가 떠올랐다.

「롤랜드! 내가 정말로 네 삼촌이라고 생각했느냐? 네가 감히 이 렝케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하! 고맙게도 내 여동생은 그 평민과 결혼해서 자식 한 명 없이 죽었지. 너희 남매는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피 한 톨 안 섞인 네놈을 대마법사로 키워줬는데, 고마워해야 할 게 아니냐?」

“엄마! 엄마!”

새된 멜리사의 소리가 카리나를 깨웠다.

카리나는 눈을 떴다. 겁에 질린 멜리사가 카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멜리사.”

카리나는 허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났다.

의사는 카리나가 쓰러지든 말든 돈만 챙기고 가 버린 모양이었다.

멜리사가 카리나의 품에 폭 안겨들었다.

‘아니야. 멜리사는…….’

카리나는 이내 자신이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멜리사는 조금이라도 힘을 풀었다간 카리나가 사라져 버릴 걸 두려워하는 것처럼 힘을 꽉 주어 그녀를 껴안고 있었다.

“엄마도, 아픈 거예요?”

“아니야. 피곤해서 그래.”

카리나는 자꾸만 자신의 이마를 만지려 드는 멜리사의 팔을 조심스레 내렸다.

“엄만 열없고, 엄청 건강해. 절대 아프지 않을 거야.”

“…….”

짧은 침묵이 흘렀다. 카리나가 멜리사가 자신을 믿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하여 입을 열려는 찰나, 멜리사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롤랜드도 그렇게 말했어요. 절대 절 두고 어디 안 갈 거라고…….”

“그래. 롤랜드는 멜리사 두고 어디 안 가. 알잖니?”

“지금, 죽으려고 하고 있잖아요.”

멜리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부모님처럼…… 죽으면 볼 수 없어지잖아요. 그런 거 싫어요.”

“죽지 않아.”

카리나는 멜리사의 눈물 그렁그렁한 눈을 깊게 들여다보았다.

“엄마가 어떻게든 낫게 할 테니까.”

“……정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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