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롤랜드는 여태까지 카리나에게 유순하던 모습답지 않게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카리나는 놀라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롤랜드의 상황이었다면 더한 짓들을 하고도 남았으리라.
“멜리사는 오늘 혼자서도 학교에 잘 다녀왔잖아. 당분간 멜리사를 지켜보고 있는 건 어때?”
“지켜본다고요?”
롤랜드가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그래.”
카리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롤랜드가 항상 멜리사의 곁에 붙어 있을 수는 없잖아. 언젠가 멜리사는 나만큼 큰 어른이 될 거야.”
“그때까지는 계속 제가 멜리사 옆에 있을 거예요.”
롤랜드는 고집스레 말했다. 카리나는 혀를 잘근잘근 씹었다.
롤랜드가 왜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알았기에 더 마음이 아팠다.
“롤랜드, 네가 그렇게까지 하는 건…… 렝케 경 때문이지?”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걸 보니, 정답인 모양이었다.
카리나는 잠시 앞이 막막해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롤랜드를 어떻게 안심시킬 수 있을지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동안 카리나가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아직 렝케 경은 롤랜드가 역사상 최고의 마법사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다는 사실을 몰라.’
그 섬뜩한 실험실에서, 전생에 읽은 소설의 정확한 몇 구절이 떠오름과 동시에 카리나는 관련된 내용을 좀 더 기억할 수 있었다.
롤랜드의 피를 모조리 뽑고 시퍼런 마력 유도제를 몸에 채워 넣는 생체 실험이 성공하면서, 렝케 경은 롤랜드가 세상을 바꿔놓을 마법사가 되리라고 완전히 확신하게 된다.
‘우리를 며칠 안에 찾아내지 못했다는 건, 이미 다른 사냥감을 물색했다는 뜻이야.’
새로운 희생양이 될 아이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지만 적어도 자신들은 렝케 경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카리나는 좀 더 간단한 방법으로 롤랜드를 설득하기로 했다.
“멜리사에게 마법을 가르치면 되잖아?”
“네……?”
“멜리사는 마법을 배우고 싶어 해. 그건 알지?”
롤랜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몸을 지킬 마법을 가르쳐 줘. 대신 뭔가 잘못될 수 있으니 내가 보는 앞에서.”
“제가 마법을 가르쳐 주는 걸…… 멜리사가 좋아할까요?”
“엄청 기뻐할걸?”
카리나의 추측은 언제나처럼 옳았다.
다음 날 아침, 멜리사가 너무 기쁜 나머지 롤랜드를 세게 껴안아 갈비뼈 하나쯤을 부러뜨릴 뻔했으니까.
* * *
“자.”
카리나는 체면도 잊고 와일더의 앞에서 어린애처럼 깡총깡총 뛰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렝케 경의 저택에서는 그간 월급 한 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은 카리나의 생애 첫 월급날이었다.
난생처음으로 받아 본 월급봉투에는 척 보기에도 두둑한 지폐가 들어 있었다.
“조금 더 넣었어. 이곳에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으니, 돈이 더 많이 필요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부인이 온 이후로 매상이 조금 올랐으니까, 딱 그 절반만큼 넣었네. 너무 기대는 하지 마.”
카리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다.
“1키브린이라도 더 들어 있으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
“그런가?”
와일더의 주름진 얼굴이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늦게까지 남겨서 미안했어. 주문이 너무 많아서……. 얼른 집에 가 봐.”
카리나는 날아갈 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여관까지 달려갔다.
행여 누가 훔쳐 갈까 싶어 봉투는 품 안에 소중히 품은 채였다.
아이들은 저녁을 항상 카리나와 함께 먹었으니 무척 배가 고플 터였다.
주전부리를 사 먹을 수 있는 용돈을 쥐여 주었지만, 그걸 한꺼번에 써 버릴 만큼 미련한 아이들도 아니었다.
카리나는 품속에서 월급봉투를 꺼내면서 문을 벌컥 열었다.
빨리 아이들과 이 기쁜 날을 축하하고 싶었다.
나잇값 못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생애 첫 월급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섰다.
“많이 기다렸지? 오늘은 맛있는 걸 먹으러…….”
카리나의 말은 맥없이 끊어졌다.
멜리사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엄마…….”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롤랜드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멜리사의 손을 꽉 부여잡고 열에 들떠 끙끙 앓고 있었다.
카리나의 손에서 월급봉투가 미끄러졌다.
“롤랜드!”
카리나는 바닥에 떨어진 월급봉투도 잊고 롤랜드에게로 달려갔다.
롤랜드의 이마에 손을 올리자마자 카리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이의 창백한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지금처럼 발만 동동 굴리며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하얗게 변해버린 머리에선 그 어떤 대응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멜리사가 카리나의 팔에 매달렸다.
“롤, 롤랜드……. 죽는 거 아니죠?”
멜리사의 그 말 한마디에, 카리나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롤랜드가 죽긴 왜 죽어.”
카리나는 힘을 주어 대답했다.
소설 속의 롤랜드는 죽기는커녕 그 끔찍한 학대를 받으면서도 잘 버텨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마법사로 성장했다.
“지금은 의사를 불러와야 해. 멜리사, 너는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어. 롤랜드를 건드리지 말고.”
멜리사는 겁을 잔뜩 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나는 바닥에 떨어진 월급봉투를 줍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금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건 의사를 부르고 약을 살 돈이었다.
다행히 카리나는 혹시나 싶어 여관 주인에게 물어 둔 의사의 집을 아직 기억했다.
의사는 심드렁한 얼굴로 저녁 시간엔 왕진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카리나가 돈 봉투를 보여 주자마자 바로 왕진 가방을 챙겼다.
“아이가 많이 아픈가요?”
카리나는 롤랜드에게서 들은 증상을 그대로 읊었다.
“열이 심해요. 배도 심하게 아프다고 하고…….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대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저렇게 심한 열을 렝케 경의 저택에서 일할 때 두 번 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인 둘 모두가 죽었고.
‘롤랜드는 살 거야. 주인공이잖아…… 세상을 구해야 한다고.’
하지만 카리나의 가슴 깊은 곳에서 불신이 치밀어 올랐다.
이미 카리나는 미래를 바꾸어 버렸다. 그녀의 그 선택 때문에, 롤랜드가 주인공이 아니게 되었다면?
롤랜드는 여기에서 죽고, 세상은 이대로 영영 멸망해 버린다면?
신기하게도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이 아닌, 롤랜드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이고, 일단 가서 봅시다. 벌써부터 애가 죽을병에 걸린 것처럼 울 건 없어요.”
카리나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너무 바보처럼 굴었어. 의사 선생님께 애를 한 번도 보이지 않고……. 죽을 가능성부터 생각하다니.’
하지만 카리나의 희망은 의사가 롤랜드를 진찰하자마자 산산이 조각나버렸다.
“……이건 신만이 아십니다.”
롤랜드를 이리저리 진찰한 의사는 엄숙한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멜리사는 비명을 질렀고, 카리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금방이라도 졸도할 것처럼 숨을 쌕쌕거렸다.
“신만이…… 선생님, 그게 무슨 뜻인가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페테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경우 사망률은 50%가 넘고…….”
카리나는 이어지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촛불을 켰다가 껐다가 하는 것처럼 시야가 깜박거리고 의사의 말이 귓가에 메아리치며 웅웅거렸다.
“치…… 치료 약은 있죠? 네?”
의사는 가방에서 웬 갈색 가루가 든 종이 봉지를 꺼냈다.
“버드나무 껍질 가루입니다. 달여 먹이면 열은 어느 정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신만이 아실 겁니다.”
“……다른 의사를 찾아보겠어요.”
“충고 하나 해드리는데, 괜히 돈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넉넉지 않은 데다 딸도 있지 않습니까?”
“…….”
“가망이 없는 치료에 돈을 퍼붓다가 길바닥에서 딸과 함께 굶어 죽을 생각입니까?”
카리나는 의사가 퍼붓는 질문에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의사는 동정인지 경멸인지 모를 시선으로 카리나를 쳐다보더니, 돈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카리나는 의사가 요구하는 대로 돈을 다 내준 다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엄마…….”
롤랜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카리나는 반쯤 기듯 롤랜드의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나……. 죽는 거예요?”
“죽기는 무슨.”
카리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미래를 볼 줄 알아서 그런데, 넌 안 죽어. 엄청 건강하고 튼튼한 어른이 될 거야.”
“그럼 엄마는 엄마가 우리 엄마 될 거, 예전부터 알았어요?”
목이 꽉 멨다. 카리나는 울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알았어. 옛날 옛적부터 알고 있었어. 정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