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글쎄……. 산수와 작문?”
“겨우 그게 전부예요?”
카리나는 조금 기가 막혀 되물었다. 그 정도라면 롤랜드와 멜리사가 이미 충분히 익혔으리라.
카리나가 전생의 기억을 통해 알고 있는 학교는 그것보단 훨씬 많은 것들을 가르쳤기에 충격은 더욱 컸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또 뭘 가르쳐야 하지?”
“뭐, 역사라거나…….”
와일더가 웃음을 터뜨렸다.
“블로에 부인, 역사를 학교에서 가르친다면 당장 부모들부터 들고일어날 거요! 애 살아가는 데 아무 쓸모도 없는 걸 왜 가르치냐고. 그런 건 가정교사를 들여서 가르치시오.”
* * *
카리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학교에 대해 생각했다.
‘산수와 작문 정도인데, 굳이 보낼 필요가 있을까.’
둘 모두 마법에는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남매가 렝케 경의 저택에 왔을 때부터 혹독하게 배운 것 중 하나였다.
와일더의 말이 맞다면, 아이들은 학교를 가 보았자 별로 배울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카리나는 일단 아이들의 의사를 물어보기로 했다.
아이들은 학교란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워했지만, 적어도 온종일 답답한 여관 안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뭘 배워요?”
“으음, 산수와 작문을 가르친다고는 하더라.”
“마법은 안 해요?”
“안 해.”
롤랜드는 눈에 띄게 안심했지만, 멜리사는 슬쩍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그들에게 어느덧 배움이란 곧 마법만을 뜻했던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오히려 학교를 보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 안 맞으면 그만두게 하면 되지. 뭐가 문제겠어?’
카리나는 아이들을 순식간에 설득시킬 수 있는 마법의 카드를 꺼냈다.
“너희들, 친구들을 사귀고 싶진 않니?”
“친구요……?”
롤랜드와 멜리사의 똑같이 생긴 새파란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희 또래 애들이 학교엔 많을 거야. 일단 가 봤다가, 안 맞으면 그만둬도 되고.”
“갈래요!”
두 아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 뒤 일은 모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카리나는 와일더의 도움으로 학교에 바로 두 아이를 등록했고, 학교에 다니려면 꼭 필요하다는 석판을 사 주었다.
진작 사 줬어야 했나 싶을 정도로 아이들은 석판을 가지고 잘 놀았다.
카리나는 멜리사의 석판에서 마법진을 종종 발견했지만, 당분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이들의 등교 첫날, 카리나는 마치 자신의 등교 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아침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다소 긴장해 보였기 때문에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하지만 객실 문을 열자마자, 그녀에게로 튀어오는 아이들을 보니 모든 걱정은 사라졌다.
“재밌었어요!”
멜리사가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게 소리쳤다.
“진짜 재밌었어요. 선생님이 제가 글을 엄청 잘 읽는대요. 오늘 사탕도 받았어요!”
“정말 잘 됐다. 롤랜드는?”
“저도 좋았어요.”
하지만 카리나는 마냥 밝아 보이는 롤랜드의 얼굴에서 평소와 다른 그림자를 느꼈다.
무엇보다도 멜리사가 저렇게 신이 났는데, 롤랜드는 차분한 모습이라는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아원에서 단둘이 의지해서 커온 탓인지 롤랜드는 여느 자상한 오빠 이상으로 멜리사를 위했다.
멜리사가 들뜨면 롤랜드 역시 들떴다. 멜리사가 힘들면 롤랜드 역시 힘들어했다.
바로 이 점을, 렝케 경은 혹독하게 이용했다.
카리나는 롤랜드를 향해 부드럽게 물었다.
“롤랜드, 무슨 일 있었니?”
롤랜드는 마치 그런 질문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이내 추스르고는 평이한 어조로 대답했다.
“없었어요.”
“그러니? 다행이다.”
멜리사가 무언가를 아는 듯한 눈빛으로 카리나와 롤랜드를 번갈아 보았다.
카리나는 롤랜드가 보는 앞에서 멜리사에게 캐물을 정도로 무심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멜리사의 학교생활로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 멜리사는 정말로 즐겁게 보낸 모양이었다.
카리나는 아이들의 도시락을 점검했다. 아이들은 그녀가 만들어 준 샌드위치가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깨끗이 비웠다.
‘점심이라도 잘 먹어서 다행이야.’
만약 롤랜드가 점심조차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힘든 상황이라면, 그녀는 당장 학교로 찾아갔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그럴 상황까지는 아니었다.
몇 시간 후.
멜리사는 여느 때처럼 롤랜드보다 훨씬 일찍 잠이 들었다.
카리나는 아직 침대에서 뒤척거리는 롤랜드를 슬쩍 건드렸다.
“엄마……?”
“롤랜드, 우리 얘기 좀 할까?”
롤랜드는 머뭇거렸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네.”
“나가자. 꿀차 사 줄게.”
롤랜드의 얼굴이 밝아졌다. 여관의 로비에서 파는 꿀차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 중 하나였다.
카리나는 동전 두 개로 꿀차 두 잔을 산 다음, 롤랜드에게 한 잔을 넘겨주었다.
롤랜드는 꿀차를 정신없이 홀짝였다.
“그렇게 맛있니?”
“네.”
롤랜드의 동글동글한 눈이 반짝 빛났다.
“종종 사 먹어. 앞으론 용돈을 매달 줄 테니까.”
“……?”
롤랜드의 입이 벌어졌다.
무어라 감사를 표하고 싶지만, 방금 들은 말이 믿어지지 않아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모양새였다.
“많이는 안 줘. 그래도 너희들 놀기엔 충분할 거야.”
카리나는 그동안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지 않았다.
정작 자신이 용돈이라곤 한 푼도 받아본 적이 없을뿐더러, 대체 얼마나 주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전 한 푼으로 살 수 있는 꿀차 하나에도 눈치를 보는 아이들을 보니 용돈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어. 내가 너희들이 행복하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주는 게 용돈이니까.”
“저, 용돈 처음 받아 봐요.”
롤랜드의 눈이 반짝거렸다.
카리나는 아이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녀가 어렸을 적, 렝케 경의 저택에는 카리나 또래의 아이들이 많았다.
그 아이들은 하다못해 1년에 단 한 번 돌아오는 생일에라도 용돈을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겨우 꿀차 몇 잔 사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지만, 용돈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부럽던지!
카리나는 롤랜드의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받은 적 없어.”
“……엄마.”
롤랜드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아빠도 없었고, 엄마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어.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항상 부러웠지.”
“저, 저희도 그랬어요.”
롤랜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고아원 시절을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서 너희들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키우고 싶어.”
“엄마…….”
카리나는 큰마음을 먹고 롤랜드를 바라보았다.
단순한 오지랖일지도 모르지만, 힘들어하는 아이를 그냥 못 본 체하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롤랜드, 오늘 학교에서 뭐가 제일 힘들었니?”
“……!”
롤랜드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자 크게 당황했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학교생활이 힘들어질 것 같다면, 언제든지 나한테 도와달라고 해줘.”
짐작 가는 바는 제법 되었다.
과부의 아들이라고 아이들이 롤랜드를 놀렸을 수도 있다. 가난해 보인다고 놀렸을 수도 있다.
아니면, 카리나가 생각지 못하는 다양한 이유로 롤랜드가 어려움을 겪었을 수도 있다.
그 어떤 경우든 카리나는 롤랜드가 그 어려움을 혼자 감내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게 아니에요.”
“말해줄 수 있겠니?”
“…….”
롤랜드는 머뭇거렸다가 입을 열었지만, 다시 닫고 말았다.
카리나는 롤랜드를 안심시키기 위해 등을 토닥여 주었다.
시간은 많았다. 이 밤을 같이 롤랜드와 함께 새어 줄 수도 있었다.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고 달싹이던 입에서 마침내 진실이 흘러나왔다.
“그게…… 멜리사랑 같이 있을 수 없대요. 당연히 계속 같이 있을 줄 알았는데…….”
“…….”
카리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롤랜드를 바라보았다.
기억 속 어렴풋한 전생의 학교에선 학생들은 나이별로, 학습 숙련도별로, 그리고 성별로 반이 나누어졌다.
그래서 카리나는 당연히 롤랜드와 멜리사는 따로 공부하게 되었겠거니 생각만 했을 뿐이지, 그게 둘에게 어떤 충격을 불러일으킬지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멜리사랑 같은 교실에 있게 해달라고 했어요. 계속……. 빌었는데, 아무도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롤랜드. 왜 멜리사와 네가 다른 교실에 있게 되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니?”
“멜리사보다 제가 글을 조금 더 잘 읽는대요. 셈도 더 잘 알고요. 이럴 줄 알았으면 잘 모르는 척할 걸 그랬어요.”
카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롤랜드에게 멜리사와 떨어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웬만하면 같은 반 배정을 요청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기준이 있다니, 무턱대고 요구할 수가 없는 노릇 아닌가.
‘어쩌면 이게 둘을 위해서 더 잘된 일일지도 몰라.’
카리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롤랜드는 렝케 경의 저택에서부터 최대한 멜리사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평생을 이렇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롤랜드, 네가 계속 멜리사의 곁에 있을 필요는 없어.”
“저는 멜리사를 지켜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