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공작이 손바닥을 펼쳤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산호 브로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카리나를 덮쳤던 구형의 빛이 그 자리에 있었다.
카리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이제 공작은 평온해 보였지만 자신이 저 빛에 당해 죽을 뻔한 게 바로 얼마 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카리나는 밖으로 달아나는 것까지 고려했지만 호기심이 본능을 억눌렀다.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공작의 손 위의 구체는 점점 길어지더니, 어느덧 1미터는 족히 될 만한 길이로 변했다.
“이런 걸 내려 줬단 말이야?”
와일더가 기가 막혀 하면서 중얼거렸다.
공작은 도저히 대답할 상태가 아닌 듯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카리나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중얼거리며 빛 덩어리를 제압하려고 애썼다.
쾅!
거대한 파열음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사방에 내려앉았다.
‘마법이야!’
카리나는 연기 사이로 보이는 공작을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
카리나는 절로 터져 나오는 비명을 간신히 속으로 삼켰다.
공작의 손에는 빛 덩어리 대신, 처음 보는 거대한 검이 들려 있었다.
햇빛이 검붉은 날을 타고 흘렀다.
“제 가게를 날려 먹을 생각이셨습니까?”
와일더가 큰 소리로 불만을 터뜨리자, 공작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내 실력을 의심하는 건가?”
“각하께서도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실수하시잖습니까!”
“이미 올해 치 실수는 끝났어.”
공작이 태연하게 받아쳤다.
“설마…….”
와일더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 블로에 부인이 집어낸 그 불균형 마정석으로 시도하다가 실패했지. 덕분에 방 하나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파이돈 백작이 각하를 잡아먹으려고 했겠군요.”
“내 사비로 수리했어.”
공작은 검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카리나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도움에 감사한다. 부인이 아니었다면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내려주신 마정석을 터뜨릴 뻔했어. 마땅한 사례를 하고 싶군.”
카리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저는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알고 싶어요.”
“그게 부인이 바라는 사례인가?”
공작이 의외라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카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사례를 원하지 않았다.
사실, 조금 원하긴 했으나 그보다도 대체 이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고 싶었다.
“네.”
카리나는 다른 대안은 주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공작은 잠시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더니, 무언가 말할 내용을 정리하는 것처럼 허공을 응시했다.
마침내 열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카리나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나는 마검사야.”
카리나는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마검사라니?
자신은 마법사가 아닌 사람치고는 제법 마법에 조예가 있었다.
그런 카리나가 전혀 들어보지 못한 존재라면 굉장히 희귀한 부류임이 틀림없었다.
“그게 뭐죠?”
공작은 대답 대신 와일더를 쳐다보았고, 와일더는 한숨을 내쉬면서 설명하는 역할을 떠맡았다.
“마정석에서 검을 뽑아내는 사람.”
“다른 것도 만들 수 있어요?”
“아니. 마정석에선 오직 마력을 응축한 마검만을 만들 수 있어.”
“왜 마법을 쓰지 않고, 굳이 검을……?”
“마법의 재능이 아예 없거나, 혹은 덜한 사람도 마검은 쓸 수 있어. 당연히 숙달된 검사에 한하지만.”
공작이 자조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한마디로 대장장이라는 거다.”
“그게 전부예요?”
“그래.”
카리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 저 검에는, 공작과 와일더의 설명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은 의문점이 보였다.
“뭔가 더 궁금한 게 있나?”
“……저 검. 정말 마력을 응축한 게 다인가요?”
“무슨 소리지?”
카리나는 망설였다.
공작의 설명만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저 검에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저 안에서…… 마법이 느껴져서요. 그것도 제법 위험한 마법이.”
“……!”
다음 순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공작이 칼을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그녀의 한쪽 손을 잡은 것이다.
카리나는 부담스러워서 빼려고 했지만, 공작은 손에 힘을 주어 놓지 않았다.
“블로에 부인, 그동안 많은 인재를 봐왔다고 생각하나 그대 같은 인재는 처음이다.”
“그, 그것참 영광이네요…….”
카리나는 적당히 물러서고 싶었으나 도저히 상황상 그럴 수가 없었다.
공작이 아직 말을 마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놓친다면 돌아가신 부모님이 날 용서하지 않겠지. 그대를 공작가의 가신으로 삼고 싶어.”
카리나는 귀를 의심했다.
공작가의 가신이라니?
황족과 어깨를 같이 하는 공작가의 가신은 최소한 기사 작위는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여자의 경우, 아무리 신분이 낮아도 기사의 딸은 되어야 했다.
일개 평민인 자신이 될 수 있는 지위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토르스 공작이 인재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이건 아니야.’
토르스 공작은 전생에 읽은 소설 속에서도 인재라면 사족을 못 썼다.
성인이 된 롤랜드와 마찰이 일어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대마법사는 누구나 탐낼 법한 인재였으니까.
토르스 공작은 롤랜드를 영입하기 위해 다소 무리한 수를 썼고,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내 앙숙이 되었다.
하지만 자신과 소설 속 롤랜드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그 당시의 롤랜드는 남작의 외조카이자 작위를 이어받을 후계자였지만, 자신은 출신이 불분명한 평민 과부에 불과하다.
어떻게 공작가의 가신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공작이 한결 부드러워진 어조로 말했다.
“거짓말도, 놀리려고 하는 말도 아니야. 나는 정말로 그대를 내 가신으로…….”
“제가 어떻게 가신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카리나는 도저히 황당함을 버틸 수 없어 공작의 말을 끊었다.
결례라는 건 알았지만, 방금 공작을 구해준 건 자신이니 이 정도쯤은 용서해 주지 않겠는가.
“왜 안 된다는 거지?”
“저 같은 평민이…….”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나?”
공작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토르스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니, 정말 먼 데서 왔나 보군. 내 가신 중 절반이 평민이야.”
“…….”
“토르스에는 귀족이 적어. 좀 살만하다 싶으면 다 수도로 떠나버리지. 여기는 휴양지로나 쓰고.”
“아…….”
“만약 평민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가신으로 삼지 않는다면, 공작가는 진작 망했을 거야.”
“……그렇군요.”
“당장 여기, 와일더도 평기사 작위 하나 없는데도 가신이었지. 이제 내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할 마음이 드나?”
카리나는 공작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와일더가 평민이라는 사실에 놀라야 할지, 아니면 공작의 제안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놀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좀 놀라워서…….”
“여기 있을 때와 하는 일이 바뀌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아이들을 키우기엔 좀 더 좋은 환경이 되긴 하겠지. 보수의 급이 다를 테니까.”
“하지만 전 많이 바빠지겠죠?”
“정확히 아는군.”
고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카리나는 무릎을 살짝 굽혔다.
“각하, 저는 공작가의 가신이 될 수 없습니다.”
놀랍게도 공작은 평생 거절의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크게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그는 허망한 얼굴로 한 마디를 간신히 입 밖으로 흘렸다.
“왜……?”
“저는 공작가에 진정으로 충성을 다할 수 없어요.”
“아이들 때문인가?”
카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더는 귀족의 저택에 들어가, 누군가의 시중을 드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가신이니 누군가의 시중을 든다기보단 받는 쪽이리라.
하지만 공작가에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점에선 어떻게 보면 하녀보다도 극악한 환경이었다.
카리나는 오직 자신과 아이들의 안위를 위해서만 살고 싶었다.
이런 사정들을 솔직하게 털어놓기엔 목숨이 아까웠기 때문에, 카리나는 그저 간단하게 둘러댔다.
“제겐 너무 버거운 자리입니다. 물려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그렇군. 부담이 심하단 말이지…….”
공작은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면서 눈알을 굴렸다.
“제가, 뭔가 실례라도…….”
“아니,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웠어. 오히려 다른 이유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무슨 이유인가요?”
“내가 싫다거나.”
“……!”
공작은 멍한 카리나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겨울날 얼음이 햇빛을 받으며 찬란하게 빛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카리나는 더욱 멍하니 공작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농담이야. 참, 아이들은 잘 적응하고 있나?”
“네.”
“학교는 어떻던가?”
“네?”
카리나는 제발 도와달라는 눈길로 와일더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학교라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라는 말인가?
다행히 와일더는 카리나를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각하, 블로에 부인은 원래 산골짜기에 살았다고 하더군요. 토르스에 대해 잘 모를 겁니다.”
엄밀히 말해선 산골짜기는 아니었지만 카리나는 와일더의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뭐, 산골짜기보다 더 외지고 사람들과 동떨어진 곳에서 살았던 건 맞았으니까.
“하지만 학교는 의무적으로 보내야 할 텐데.”
“관료들을 너무 믿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아시겠습니까?”
와일더는 투덜거리며 카리나를 향해 설명했다.
“가정교사를 들일 여유가 되지 않는 아이들은 기초적인 교육을 위해 학교에 갈 수 있네.”
“아…….”
카리나는 그제야 이들이 말하는 ‘학교’가, 자신이 전생에 다녔던 학교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기관임을 눈치챘다.
“나도 학교를 다녔으니, 토르스에서 이 제도가 자리 잡힌 지는 꽤 되었지.”
“뭘 배우나요?”
당연히 카리나나 카리나가 지금껏 알고 지낸 사람들 중 학교에 다닌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전생의 카리나는 학교에 다녔었다.
만약 롤랜드와 멜리사가 제대로 된 학교에 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건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