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아악!”
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새하얀 빛이 마치 타오르는 불길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카리나는 딱딱한 대리석 바닥 위를 굴렀다.
온몸에 꺼트릴 수 없는 불이 붙은 느낌이었다.
카리나는 계속해서 비명을 질렀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이러다 죽을 거야.’
카리나는 주먹으로 바닥을 쾅쾅 쳤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죽으면, 애들은……!’
그 생각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들은 카리나가 새 옷을 사러 갔다고만 알고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돈이 한 푼도 없으니 여관 주인은 겨우 하루 만에 두 아이를 길거리로 내쫓을 것이다.
‘내가 돈을 들고 도망쳤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고통이 아닌, 후회와 걱정의 눈물이 카리나의 눈에 가득 고였다.
토르스는 따뜻하니 길거리에서 얼어 죽을 리는 없다.
조금 더 행운이 따른다면 친절한 누군가가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데려갈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이 입을 상처는 영영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두 번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겠지.’
카리나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왜 자신은 이 보석 상점에 들어왔을까.
왜 보석상이 자신을 내치자마자 뛰쳐나가지 않고, 그 저주받은 돌을 쳐다보았을까.
왜……!
바로 그때.
오른손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카리나는 그 냉기가 구원의 손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달렸다.
‘누군가가 물을 끼얹은 걸까. 더, 더……. 더 끼얹어줘요.’
물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냉기 역시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카리나의 오른손을 시작으로 왼손과 어깨, 가슴, 마침내 몸 전체를 식혀주었다.
‘물이…… 아니야?’
열기에 시달리는 와중에서도 의문이 솟아났다.
시간이 지나도 냉기가 식지 않은 데다, 갈수록 그 존재감이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얼음으로 만든 조각상이 그녀를 껴안고 있는 것처럼.
얼마나 지났을까.
영원한 지옥처럼 느껴지는 고통이 드디어 가라앉았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잠시라도 방심한다면 방금 그 고통에 다시금 삼켜질 것 같았다.
카리나는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
좀 전엔 새하얀 빛이 눈을 멀게 했는데, 이제는 온통 어두컴컴해 앞을 볼 수 없었다.
설마 눈이라도 먼 게 아닐지 두려워진 카리나는 두 손을 들어 눈을 비비려고 했다.
하지만 두 손 모두 단단한 남자의 손에 붙잡혀 있어,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
그제야 카리나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은 웬 낯선 남자에게 양손을 붙들린 채,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던 건 남자가 검은색 상의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리나는 바로 비명을 지르며 남자를 뿌리쳤다.
비틀거리며 한두 걸음 뒤로 물러서니,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낯선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참 황당하게도 이 상황에서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젊은 미남이었다.
조각 같은 얼굴 위로 은빛 머리칼이 부서졌다.
나이는 카리나보다 서너 살가량 더 많을까.
얼음으로 빚은 조각에 숨을 불어넣기라도 한 것처럼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당황하는 모습에서 인간미가 느껴졌다.
카리나는 이 상황 자체가 민망하여 고개를 돌렸지만, 청자 사금파리를 박은 것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계속해서 그녀를 따라왔다.
당황한 카리나는 몇 마디 더듬거렸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이 남자의 가슴팍에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자꾸만 열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의 품을 파고들었던 기억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무, 무슨…….”
“내가 아니었다면 그대는 이미 죽었어.”
무뚝뚝한 대답에 심장이 덜컹 떨어졌다.
상황이 완전히 진정되니 주변이 너무나 평화로워 보여, 실은 자신을 태워죽일 것처럼 덮쳐오던 열기마저 자신의 착각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하지만 카리나는 정말로 죽을 뻔했다.
저 음침하고 불결한 여관에서 그녀만을 기다리는 두 아이를 남긴 채.
즉, 이 남자는 그녀와 아이들의 은인이었다.
그녀는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아무 소리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폭주를 막지 않았다면 이 가게와 함께 그대의 몸이 산산조각이 났겠지.”
남자는 한 마디를 내뱉더니, 바로 몸을 돌려 보석상을 향해 말했다.
“저런 위험한 물건을 버젓하게 전시하다니, 제정신인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공작 각하, 말은 좀 조심하는 게 나을 겁니다. 저런 부인이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카리나는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공작이라니!
자신은 조금 전 무려 공작이나 되는 사람에 의해 구해진 것이다.
하녀들이 신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돌려 읽던 연애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지만 카리나에겐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렝케 경의 저택에서의 생활은 카리나에게 한 가지 교훈을 주었다.
어떤 식으로든 귀족과 접촉하지 말라.
그들은 평민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게 사생아라면 더더욱.
꼭 렝케 경의 저택에서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카리나가 전생에서 배운 역사서 속에서도 누누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렝케 경이 자신의 외조카들에게 험하게 군 것도 그것과 관련이 없지는 않았다.
그의 여동생은 평민과 결혼했다.
그들의 자식인 롤랜드와 멜리사는 렝케 경의 저택에서만큼은 아가씨, 도련님으로 불렸지만 신분 자체는 물려받을 작위가 없는 평민이었다.
소설 속에서야 렝케 경이 롤랜드를 자신의 남작 위를 물려받을 후계자로 공표하기는 했으나 머나먼 미래의 이야기였다.
아마 렝케 경처럼, 평민들을 도구로만 취급하는 귀족들이 세상에 널렸을 것이다.
눈앞의 이 남자 역시 그러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 해야 하는 일은 간단명료했다.
“감사드립니다, 공작 각하.”
정중히 감사 인사를 한 이후, 최대한 빠르게 현장에서 사라지는 것.
카리나가 가게의 그 어느 것에도 눈길을 주려 하지 않으며 최대한 빨리 밖으로 달려나갈 때였다.
오만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
“멈춰라.”
카리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만약 남자가 렝케 경처럼 남작 정도였다면 카리나는 명을 무시하고 달아났을 것이다.
하지만 공작이 누군가.
‘토르스에서 공작이라 하면…… 토르스 공작밖에 없잖아!’
공작령에서 공작은 황제보다 더욱 큰 영향력을 지닌다.
사실상 한 국가의 왕이, 그녀에게 멈추라고 친히 명령을 내린 것이다.
카리나는 사형 선고가 방금 떨어진 사형수처럼 죽을 상을 한 채 천천히 몸을 돌렸다.
토르스 공작은 전생에 읽은 소설에서 성인이 된 롤랜드와 제법 대립각을 세운 인물이기도 했다.
물론 카리나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가지고 애먼 사람을 탓할 생각은 없었지만, 경계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왜 달아나려고 했나?”
“도망치려고 한 게 아니에요.”
카리나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바로 공작의 말에 반박했다.
“그냥 무서워서 빨리 나가려고 한 거예요.”
“뭐가 무섭다는 거지?”
공작은 얼굴을 찌푸렸다.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방금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무섭지 않은 게 비정상 아닌가요? 전 방금 죽을 뻔했답니다, 공작 각하.”
“무서운 사람치고는 혀가 잘 풀려 있는데.”
“저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서요. 마음에 거슬리셨다면 죄송합니다.”
카리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렝케 경의 저택에서 그녀가 그 압박감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해야 할 말들을 가슴 속에 파묻고 있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작의 힘은 당연히 렝케 경에 비할 바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컸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카리나가 느끼는 감정은 똑같았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혀라.
“아니, 거슬리는 건 아니다. 그건 아닌데…….”
공작의 얼굴에 다시금 당황한 기색이 올라왔다.
“그럼, 의문이 모두 해소되셨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집에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
공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카리나는 다시 돌아서면서도 불안한 얼굴로 뒤를 힐끔거렸다.
젊은 과부에게 애가 있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일 줄은 몰랐다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카리나에겐 쓸데없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정도의 자제력은 있었다.
“잠깐만.”
이번엔 보석상의 목소리였다.
카리나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보아하니 보석상과 공작은 무척 친근한 관계였다.
어쩌면 보석상은 무려 일을 하는 괴짜 귀족일지도 몰랐다.
정신이 나가지 않은 이상, 공작이 아무리 젊은 나이라 해도 머리에 피도 아직 마르지 않는 애송이라고 부를 평민은 없었으니까.
일반적인 귀족들은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물건을 직접 사고파는 것 같은 천한 일은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카리나는 당연히 이 상점 거리의 모든 가게 주인들이 자신과 같은 평민이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루비와 석류석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만 뽑니 어쩌니 하더니.’
평민이 루비랑 석류석을 어떻게 구분한다는 말인가? 그냥 둘 다 빨간 보석이라는 것만 알면 됐지.
“무슨 일이시죠?”
카리나는 예의 바르게 물으며 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잠깐 카리나의 얼굴을 살폈다.
“블로에 부인, 내 가게에서 일할 생각은 없나?”